“만평은 앉아서 그리는 게 아니야”…‘춘천 촌놈’ 끌고 다닌 선배의 속뜻

유환석 화백, 정중헌 국장과의 인연 공개"세상 사람들 만나고 시대의 표정 읽으라"대학로·신촌·압구정서 문화예술계 인사들 소개편집회의선 “매일 히트작 낼 순 없다” 감싸“시야를 더 넓은 세상으로...보호자 같았던 분”

“오늘은 또 어디를 가는 겁니까?”

“만화는 앉아서 그리는 게 아니야!”

시사만화가 유환석 화백의 데뷔 50주년 기념전 ‘따뜻한 풍자’에 내걸린 대작 ‘기억 속의 얼굴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다 보면 웃음이 터지는 장면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정중헌 국장(90년 초반 당시 스포츠조선 문화예술부장)이 한 손으로 유 화백의 옷깃을 잡고 어디론가 질질 끌고 간다.

그 옆에는 ‘서울의 문화예술 관광’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끌려가는 유 화백은 펜을 든 채 눈이 빙글빙글 돈다. 마치 “오늘은 또 어디를 가는 겁니까”라고 묻는 표정이다.

그 우스꽝스러운 한 장면에는 한 젊은 만화가를 키우려 했던 선배 언론인의 마음이 숨어 있다. 11일 밤, 이 그림의 사연이 궁금해 유 화백에게 카카오톡으로 물었다.

대학로 연극판으로, 신촌과 압구정으로

“정중헌 국장께서 어디를 주로 데리고 다니셨나요? 왜 데리고 다니셨대요? 그 과정에서 얻은 것은 무엇이고, 지금 감사드리고 싶은 말씀은요? ㅋㅋㅋ”

다음 날 아침 휴대전화를 열어보니 제법 긴 답변이 와 있었다. 강원도 춘천에서 서울로 올라온 유 화백에게 당시 서울 문화예술계는 낯선 세계였다. 정 국장은 그런 후배를 대학로 연극판으로, 신촌과 압구정으로 데리고 다녔다.

배우 이순재를 비롯해 가수 조영남, 연예인 김현경 등 문화·연예계 사람들을 직접 만나게 했다. 미술과 영화, 연극, 시사 이야기도 틈틈이 들려줬다. 유 화백의 표현을 빌리면 “강원도 촌놈인 내가 모르는 장소”를 찾아다니며 세상을 보여준 셈이다.

배우 이순재, 가수 조영남 등 연결

정 국장이 보기에 시사만화가의 교과서는 책상 위에만 있지 않았던 것 같다. 사람의 얼굴과 말투, 거리의 풍경, 공연장의 공기와 예술가들의 생각까지 직접 보고 들어야 한 컷의 만평도 깊어질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만화는 앉아서 그리는 게 아니야”라는 말은 단순히 밖으로 나가라는 주문이 아니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 사람을 만나고 시대의 표정을 읽으라는 선배의 가르침에 가까웠다.

정 국장은 유 화백에게 세상을 보여준 ‘문화 안내자’인 동시에 편집국 안에서는 든든한 ‘보호자’이기도 했다. 편집회의에서 유 화백의 만평을 놓고 비평이 나오면 정 국장은 그의 편에 섰다. “논설이나 칼럼은 여러 사람이 나눠 쓸 수 있지만 만평은 혼자 그린다. 매일 히트작을 만들 수는 없는 것 아니냐”는 취지로 감싸줬다고 한다.

편집회의 비평 땐 "매일 히트작 만들 순 없다" 변호

세월이 흐른 지금 유 화백이 가장 또렷하게 기억하는 대목도 바로 이것이었다. “그 대목이 제일 좋았는데, 마치 보호자처럼 해 주셨다. ㅋㅋㅋ”라는 유 화백의 표현 뒤에는 오랜 고마움이 묻어난다. 문화예술의 세계로 후배의 손을 잡아끌고, 때로는 비평의 바람 앞에서 방패가 되어준 선배였던 것이다.

그래서 전시장 그림 속 정 국장의 손에 붙잡혀 질질 끌려가는 유 화백의 모습은 이제 조금 다르게 보인다. 당시에는 눈알이 헤롱헤롱할 만큼 힘겨운 ‘서울 문화예술 관광’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손은 결국 한 젊은 만화가의 시야를 더 넓은 세상으로 끌어낸 손이었다.

“국장님, 50년 공부했으니 이제 졸업검사해 주시죠”

50년 동안 시사만화가의 길을 걸어온 유환석 화백은 그 손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반세기가 흐른 뒤, 자신의 만인보 한구석에 그 시절의 선배를 다시 불러냈다. 후배를 키우려 했던 선배의 안목과 자신을 품어준 사람을 오래 기억하는 후배의 마음. 웃으라고 그린 한 컷인데, 오래 들여다보면 슬며시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유다.

14일 전시장에서는 그림 속 장면이 거꾸로 재연될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정 국장이 ‘강원도 촌놈’을 서울 문화판으로 끌고 다녔다면, 이번에는 유 화백이 “국장님, 50년 공부했으니 이제 졸업검사 한번 해주시죠” 하며 정 국장을 전시장 안으로 이끌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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