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치유 칼럼] 나쁜 기억을 지우려 하지 마세요

부정적인 기억을 억누르기보다 행복했던 순간을 되살리는 마음 훈련

잊으려고 애쓸수록 오히려 그 기억이 더욱 선명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다.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 돌이킬 수 없는 실수, 억울했던 사건,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그렇다. 세월이 흘러도 문득 떠오르는 기억은 마음을 아프게 한다. 사람들은 이런 기억을 잊어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잊으려고 애쓸수록 오히려 그 기억이 더욱 선명해지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김주환 교수는 내면소통 강의에서 "나쁜 기억을 지우려 애쓰지 마세요"라고 강조한다. 부정적인 기억을 그대로 방치하라는 뜻이 아니다. 기억을 억지로 없애려는 노력보다 그 기억을 대하는 마음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이미 일어난 과거가 아니라 과거를 떠올리는 현재의 반응이다.

기억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저장하는 창고가 아니다. 어떤 기억을 떠올리느냐에 따라 지금의 감정과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진다. 상처받았던 순간을 반복해서 되새기면 당시의 분노와 슬픔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 반대로 사랑받고 인정받았던 순간을 떠올리면 따뜻한 감정을 다시 경험할 수도 있다.

나쁜 기억보다 좋은 기억 깨워라

인간의 뇌에는 부정성 편향이라는 특성이 있다. 위험하거나 불쾌한 정보에 더 빠르게 주의를 기울이는 경향이다. 진화 과정에서 생존에 유리했던 이러한 특성은 현대인의 일상에서도 나타난다. 여러 사람에게 칭찬받고도 한 사람의 비난이 오래 마음에 남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과거의 기억을 회상하는 과정은 조금 다르다. 건강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사건을 더 많이 떠올리거나 부정적인 사건에 수반된 감정이 상대적으로 빨리 약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퇴색 정서 편향(Fading Affect Bias)'이라고 부른다. 시간이 지나면서 힘들었던 일보다 즐거웠던 추억이 더 따뜻하게 남는 현상이다.

반면 우울 증상이 있는 사람은 이러한 긍정적 기억의 이점이 약해질 수 있다. 좋았던 일을 쉽게 떠올리지 못하거나 행복했던 경험을 기억하더라도 구체적인 장면을 되살리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김 교수는 우울과 불안을 이해할 때 부정적인 기억에 사로잡히는 현상뿐 아니라 긍정적인 기억에 접근하는 능력이 약해지는 현상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행복했던 순간을 구체적으로 떠올려라

그렇다면 좋은 기억을 어떻게 되살릴 수 있을까. 강의에서 소개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기억의 발굴(Memory Mining)'이라는 개념이 실마리를 제공한다. 자신의 삶에서 행복했던 순간을 찾아내고, 그 경험을 구체적으로 회상하며 당시의 의미와 감정을 다시 느껴보는 방법이다.

가령 "지난봄 가족과 여행해서 좋았다"고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는 것이다. 그날 하늘은 어떤 색이었는지, 누구와 걸었는지,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가족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차근차근 떠올려 본다. 사진을 꺼내 보거나 함께했던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도움이 된다. 기억의 양보다 구체성과 생생함에 주목하는 것이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좋았던 순간 하나를 기록하는 습관도 시도해 볼 만하다. 거창한 행복일 필요는 없다. 아침 햇살의 따스함, 이웃의 친절한 인사, 자녀에게 받은 전화 한 통이면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좋은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순간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천천히 되살리는 일이다.

호흡을 가다듬고 자신을 존중하라

마음의 안정을 위해서는 기억을 다루는 훈련과 함께 현재의 몸과 감정을 알아차리는 연습도 필요하다. 불안하거나 화가 날 때는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자신의 호흡에 주의를 기울여 보자. 숨을 억지로 조절하기보다 공기가 들어오고 나가는 감각을 자연스럽게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챙김은 감정에 즉각적으로 휩쓸리지 않도록 돕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자신을 존중하는 태도 역시 중요하다. 과거의 실수를 떠올리며 "나는 왜 그랬을까"라고 자책하기보다 "그때는 힘들었지만 지금까지 잘 견뎌 왔다"고 자신에게 말해 보자. 자기 존중은 잘못을 부정하거나 현실을 외면하는 일이 아니다. 부족함과 상처가 있어도 자신을 함부로 비난하지 않고 소중한 존재로 대하는 자세다.

물론 좋은 기억을 떠올리고 호흡을 가다듬는 것만으로 모든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심한 우울이나 외상 경험으로 일상생활이 어렵다면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다만 일상에서 실천하는 작은 마음 훈련은 자신을 돌보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행복은 나쁜 기억이 모두 사라진 뒤에야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상처의 기억을 안고서도 삶에 남아 있는 따뜻한 순간을 발견할 때, 마음은 조금씩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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