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m 화폭도 모자란 유환석의 ‘스포츠조선 만인보...’“못 그린 사우들 섭섭할라나 ㅋㅋ 맥주 쏘는 그림으로 대신~"

옛 동료들 익살맞게 등장“그려야 할 사우들 계속 떠올라못 담은 분들은 맥주 파티로 대신”14일부터 25일, 춘천 아트프라자 갤러리데뷔 50주년 기념전 개최

스포츠조선 '기억 속의 얼굴들'.
스포츠조선 '기억 속의 얼굴들'.

10m 대작 <기억 속의 얼굴들> 완성

“저기 안 들어간 사우들 섭섭할라나 ㅋㅋㅋㅋ.”

유환석 화백은 데뷔 50주년 기념전 '따뜻한 풍자'(춘천·14~25일)에 내놓을 10m 대작 <기억 속의 얼굴들>을 완성하고도 마음 한구석이 영 개운하지 않은 모양이다. 수십 년 동안 만나고 인연을 맺은 사람들을 한 폭에 불러 모은, 말하자면 ‘유환석의 만인보(萬人譜)’다. 그런데 자신이 몸담았던 스포츠조선 시절을 그리면서 옛 사우 몇 사람을 화폭에 올리고 나니, 오히려 미처 그리지 못한 얼굴들이 더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한 사람을 떠올리자 그 뒤로 또 한 사람이 나오고, 다시 몇 사람이 줄을 섰다. 기억의 문을 열어놓으니 옛 동료들이 유 화백의 표현처럼 ‘총알처럼’ 끊이지 않고 튀어나온 것이다. 기자가 카카오톡으로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없을 거예요. ㅎㅎㅎ”라고 안심시키자 유 화백은 그래도 마음이 쓰였던지 한마디를 더 보탰다.

“지면이 한정돼 있어서 사정상 다 못 넣었다고 전해 ㅋㅋㅋㅋ.”

그려야 할 사우들 ‘총알처럼’ 끊이지 않고 튀어나와

스프츠조선 광화문 옛 사옥.
스프츠조선 광화문 옛 사옥.

얼굴은 못 그렸어도 추억까지 빠진 건 아니다

평생 한정된 신문 지면과 씨름하며 그림을 그렸던 시사만화가가 이번에는 무려 10m짜리 화폭을 펼쳐놓고도 또다시 ‘지면 부족’을 호소한 셈이다. 그러더니 이내 유 화백다운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려줘야 할 사우들이 계속 생각나서 ㅋㅋㅋ 어쩔 수 없어. 맥주 파티 쏘는 그림으로 대신해야지.”

먼저 밝혀둘 것이 있다. 이 그림은 ‘누가 들어갔고 누가 빠졌느냐’를 확인하는 출석부가 아니다. 그림에 등장했다고 더 각별한 사람이고, 등장하지 않았다고 덜 소중한 사람도 아니다. 유 화백의 기억 속에 유난히 선명하게 남은 몇몇 장면을 꺼내 만화적 재미를 더해 재구성했을 뿐이다.

오히려 그림에 보이지 않는 얼굴들까지 함께 떠올려야 스포츠조선 부분이 완성된다. 유 화백과 같은 공간에서 기사를 만들고 마감시간을 쫓으며 농담을 주고받고, 때로는 티격태격하다가도 퇴근 뒤 술잔 앞에서 다시 웃었던 사우들이 모두 그 시절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티격태격 하면서 신문 제작 추억

만평 주인공 '헹가래'.
만평 주인공 '헹가래'.

스포츠조선 가족, 유환석의 펜 끝에서 다시 출근

화폭에는 몇 사람만 들어갔지만 추억에는 훨씬 더 많은 사람이 들어 있다. 한 사람을 떠올리면 또 다른 사람이 생각나 끝을 낼 수 없었다. 한 명을 더 그리면 두 명이 생각나고, 두 명을 넣으면 다시 서너 명이 뒤에서 손을 흔드는 식이었다. 그러니 10m가 아니라 20m였어도 부족했을지 모른다. 화폭에는 끝이 있지만 사람 사이의 인연에는 정해진 규격이 없기 때문이다.

<기억 속의 얼굴들> 가운데 스포츠조선 부분은 작은 ‘사우열전’처럼 보인다. 그러나 근엄한 사사(社史)와는 거리가 멀다. 사장과 국장, 부장과 기자들이 직급순으로 차렷 자세를 하고 서 있는 것이 아니다.

말 한마디, 몸짓, 별명으로 포착

달리는가 하면 뛰어오르고, 축구공을 들고 가기도 한다. 야구방망이를 움켜쥐고 나타나는가 하면 산봉우리를 훌쩍 뛰어넘는 사우도 있다. 마감 직전 만평 아이디어를 들고 죽어라 달려오는 후배도 있다. 스포츠조선 가족이 수십년만에 유환석 화백의 펜 끝에서 다시 출근한 셈이다.

그림 왼쪽에는 스포츠조선 사옥이 우뚝 서 있다. 사옥 앞에서는 “비주얼이 중요!!”라는 외침이 터져 나온다. 스포츠신문에서 사진과 그림, 편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압축해 보여주는 말처럼 들린다. 그 주변에는 유 화백과 한솥밥을 먹었던 사우들이 저마다의 표정과 몸짓으로 등장한다.

유 화백의 사람 기억법은 독특하다. 직함과 경력을 장황하게 늘어놓기보다 그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말 한마디, 몸짓 하나, 별명 하나를 붙잡는다. 세월이 흐르면 명함에 적혀 있던 직함은 사라지지만 사람의 말투와 표정, 성품은 이상하리만큼 오래 남는다. 유 화백의 그림은 바로 그런 기억을 몇 줄의 선으로 끄집어낸다.

야구방망이 들고 나타난 야구 전문기자

신동호 스포츠조선 초대 사장.
신동호 스포츠조선 초대 사장.

신동호 초대 사장도 등장

“스포츠조선 마스코트, 헹가래!” 격려에 항상 '감사'

신동호 초대 사장은 “스포츠조선의 마스코트, ‘헹가래’”라며 유 화백의 대표 캐릭터를 치켜세우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유 화백은 그 곁에 ‘멋진 신사장님’이라고 적고, 작은 자신의 캐릭터를 세워 “감사합니다”라고 화답했다. 짧은 두 마디지만 스포츠조선 창간 시절부터 ‘헹가래’를 매개로 이어진 인연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거창한 회고 대신 “마스코트”와 “감사합니다”라는 짧은 대화로 당시를 되살린 것이 유환석식 기억법이다.

‘백총’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모 사우에게 붙인 설명은 ‘입담 좋은 분’으로 더욱 짧다. 말을 시작하면 주변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고 웃었던 사람의 특징을 단 몇 글자로 압축했다. 시사만화가가 한 사람을 기억하는 방식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권총 장면으로 ‘백총’ 별명 사우도 표현

마감 30분 전 “선배! 만화 아이디어 드릴게…”

사회레저부에서 일한 전직 기자는 스포츠신문 기자답게 그림 속에서도 얌전히 서 있지 않는다. 마감을 불과 30분 남겨놓고 “선배! 만화 아이디어 제공해줄게…”라며 무언가를 들고 전력질주한다. 유 화백에게 아이디어 하나라도 보태겠다며 뛰어오는 후배 기자의 모습을 재미있게 되살렸다.

신문사에서 ‘마감 30분 전’은 단순한 30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기사도, 그림도, 제목도 모두 초침에 쫓기는 시간이다. 그런 순간 만화 아이디어를 들고 뛰어오는 후배의 모습은 당시 편집국에서 함께 일했던 사우들에게 웃음과 함께 오래된 기억을 건드리는 장면일 법하다.

편집부 기자를 거쳐 현재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도 가만있지 않는다. 그림에서는 두 팔을 벌리고 힘차게 껑충 뛰어오른다. 유 화백이 붙인 설명은 ‘에너지 짱’. 활달한 성격을 긴 설명 대신 한 번의 뜀박질로 표현했다. 기자 시절부터 기억해온 생동감 넘치는 모습을 그렇게 압축한 것이다.

초등학교 교사로 전직한 사우도 출연

정중헌 국장 “만화는 앉아서 그리는 게 아니야!”

“만화는 앉아서 그리는 게 아니야!!”란 대사를 곁들인 정중헌 전 국장과의 장면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짧은 만화 같다. 정 전 국장은 유 화백을 데리고 서울 곳곳의 문화·예술 현장을 누볐다. 그림 속 유 화백은 그를 따라다니다 지쳤는지 혀를 빼물고 거의 헤롱헤롱한 상태다. 조선일보 논설위원이자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도 지낸 정 전 국장이 문화·예술 현장을 직접 보여주며 유 화백의 시야를 넓혀주던 시절을 익살스럽게 되살린 장면이다.

책상 앞에서 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들어가 사람을 만나고 현장을 보아야 한다는 의미도 자연스럽게 읽힌다. 유 화백에게 서울 구석구석을 안내했던 정 전 국장은 ‘걸어 다니는 문화예술 안내서’였던 셈이다.

정중헌 국장.
정중헌 국장.

‘은은한 선비’로 묘사된 사우들도

문화부장 출신인 모 대학교수는 “평론에 유 선배 그림이 들어가야 한다”란 대사와 함께 말끔한 신사복 차림으로 등장한다. 유 화백은 그에게 ‘은은한 선비!’라는 표현을 붙였다. 앞에 나서 요란하게 챙기기보다는 필요한 순간 조용히 유 화백의 그림을 챙겨주던 사람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베스트셀러 단행본의 저자인 모 기자에게도 ‘은은한 선비!’란 표현을 붙였다. 평소 등산을 즐기는 그는 그림 속에서도 산에 가만히 서 있지 않는다. 산봉우리를 훌쩍 뛰어넘는다. 그 옆에는 “늘 너무 챙겨줘 땡큐”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산을 좋아했던 그 사우의 취미와 자신을 살뜰하게 챙겨준 데 대한 고마움이 한 장면에 포개져 있다.

야구 정보는 OOO...OOO은 스토커

스포츠신문답게 야구와 축구도 빠질 수 없다. 메이저리그 특파원 출신인 모 기자는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야구방망이를 들고 “야구에 대한 정보는 제가 책임”란 문구와 함께 등장한다. 현재 야구해설위원으로 활동하는 그의 이력을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메이저리그 현장을 누빈 야구 전문기자에게 방망이 하나를 쥐여주니 그의 캐릭터가 단숨에 완성된다.

축구 쪽에서는 편집부를 거쳐 체육부 기자로 활동했던 모 사우가 “축구는 나!!”란 문구와 함께 축구공과 펜을 들고 달린다. 그런데 유 화백이 옆에 붙인 설명이 더 익살스럽다. ‘유 선배 스토커!’란 문구는 물론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아니다.

유 화백의 시사만화가 50년 사연을 하나씩 발굴해 화제 기사로 풀어온 인연을 재미있게 표현한 것이다. 유 화백의 그림 속에 그가 등장하고, 그는 다시 유 화백의 그림과 인생 이야기를 기사로 기록한다. 서로의 기록 속에 서로 들어가는 묘한 인연이다.

"문화·예술은 내가”…문화·음식·연예 상식 백과사전도

문화 분야의 사우들도 저마다 자신의 영역을 들고 나온다. 모 기자는 “문화·예술은 내가…”라고 나선다. 짧은 한마디에 문화부 기자로 활동했던 그의 정체성을 담았다. 사회부 출신의 한 기자는 더 재미있다. 포크를 들고 달려가는 모습과 함께 ‘문화·음식·연예 상식 백과사전’이라는 설명이 붙었다.

한 분야만이 아니라 여러 방면의 이야깃거리가 머릿속에서 술술 나오던 동료를 유 화백은 ‘백과사전’이라는 말로 기억한 것이다. 사람을 직함으로만 기억하지 않고 무엇을 좋아했는지, 무엇을 잘했는지, 함께 있을 때 어떤 분위기를 만들어냈는지로 기억한다는 점에서 <기억 속의 얼굴들>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고급 승용차를 보더니 “나도 한대유~”

그림 오른쪽 아래로 눈을 돌리면 분위기가 또 달라진다. ‘동욱’이라고 적힌 멋진 고급 승용차가 달리고 있다. 그러자 유 화백은 손을 내밀며 “나도 한대유~” 하면서 능청스럽게 말한다. 오랜 인연을 근엄하게 기념하는 대신 옛 동료끼리 주고받을 법한 농담으로 풀어낸다. 그래서 이 그림에는 ‘50년 회고전’이라는 말에서 연상되는 무게감보다 오랜만에 만난 옛 사우들의 동창회 같은 웃음이 먼저 흐른다.

이처럼 유 화백의 그림 속 사람들은 직함 순서대로 줄을 맞춰 서 있지 않는다. 뛰고, 달리고, 공을 차고, 야구방망이를 들고, 산을 넘는다. 그래서 스포츠조선 부분은 공식적인 사사라기보다 유환석식 ‘사우열전’에 가깝다. 이름과 연도, 직책을 차곡차곡 정리하는 역사가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기억의 역사’다.

그런 점에서 이 그림에는 반드시 덧붙여야 할 이야기가 있다. 바로 그림에 등장하지 않은 사우들이다. 유 화백은 그림을 완성하고 난 뒤 오히려 그 사우들 때문에 마음이 쓰였다.

그림에 등장하지 않은 사우들에게 마음 쓰여

한 사람 생각하면 또 다른 사우가 떠올라

“저기 안 들어간 사우들 섭섭할라나 ㅋㅋㅋㅋ.”

몇몇 사우의 이름을 차례로 떠올렸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한 사람의 얼굴을 생각하면 또 다른 사람이 떠올랐다. 그렇게 기억의 문을 열어놓자 옛 사우들이 줄줄이 걸어 나왔다. 사람은 몇 명을 그렸는데 추억은 몇 배로 불어났다. 이 대작이 ‘만인보’라고 불릴 만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만 명을 실제로 그렸다는 뜻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 뒤에는 그와 함께 웃고 일하고 부딪치며 시간을 나눈 수많은 사람이 있다는 의미에서다.

따라서 그림에 얼굴이 없다고 해서 유 화백의 기억에서도 빠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 그 사람을 왜 못 그렸지” 하고 뒤늦게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그 사람은 이미 또 다른 방식으로 이 만인보 안에 들어온다. 10m짜리 화폭에도 공간은 유한하다. 하지만 기억 속 사람들의 자리는 그렇게 쉽게 닫히지 않는다.

"그림에 얼굴 없다고 기억에서도 빠진 건 아니다"

스포츠조선 가족들과 맥주 파티 하는 장면을 담은 만평.
스포츠조선 가족들과 맥주 파티 하는 장면을 담은 만평.

화폭 모자라 결국 ‘맥주 파티 그림'으로 대신

유 화백이 생각해낸 마지막 해결책은 그래서 더욱 그답다. 그림에 못 넣은 사우들을 한 사람씩 다시 그리는 대신 모두 함께 맥주잔을 드는 장면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누구는 크게 그렸고 누구는 작게 그렸는지, 누구는 들어갔고 누구는 빠졌는지를 따지는 대신 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야, 오랜만이다” 하며 맥주잔을 부딪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맥주잔은 단순한 소품이 아니다. 10m 화폭 밖에 서 있는 사우들까지 그림 안으로 초대하는 ‘추가 입장권’ 같은 것이다. 유 화백의 마음을 한 문장으로 옮긴다면 아마 이쯤 되지 않을까.

“얼굴을 못 그렸다고 당신을 잊은 게 아닙니다. 그리다 보니 10m도 모자랐습니다. 그러니 섭섭해하지 말고, 맥주 한잔합시다.”

14일부터 25일까지 춘천서 데뷔 50주년 전시회

화폭에는 마침표를 찍을 수 있어도 인연에는 쉽게 마침표를 찍을 수 없다. 그래서 작품은 완성됐지만 유환석의 ‘스포츠조선 만인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는 14일부터 25일까지 춘천 아트프라자 갤러리에서 열리는 유환석 화백 데뷔 50주년 기념전에서 <기억 속의 얼굴들>을 만날 수 있다. 옛 사우들이 전시장에 모인다면 그림 앞에서 가장 먼저 자기 얼굴부터 찾을지도 모른다. 있으면 “나 여기 있네” 하고 웃으면 된다. 없어도 괜찮다. 유환석의 기억 속에는 이미 출근해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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