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안주 '육포' 사려다 시드니를 웃겼다…유환석 화백의 '그림 외교'

영어 통하지 않자 대신 종이와 펜 꺼내소 그린 뒤 드라이기로 말리는 시늉상점 점원은 '강아지 육포' 간식 내밀어사람 입으로 들어가는 그림 그리자 진짜 육포 등장.다음날엔 종이·연필 들고 "더 그려달라" 보채

시드니올림픽 현장 파견 잊지 못해 내달 춘천에서 데뷔 50주년 특별전 '따뜻한 풍자'를 여는 유환석 화백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꼽아 달라"고 했다. 시사만화가 인생 중 시드니올림픽 현장 파견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유 화백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 당시 스포츠조선의 간판 시사만화 '헹가래'를 연재하고 있었다. 그는 '헹가래 시드니올림픽 가다'를 연재하며 경기장과 선수촌, 시드니의 풍경을 그림으로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었다. 낮에는 현장을 뛰어다니고, 밤이면 그림을 그려 본사로 송고하는 숨 가쁜 일정의 연속이었다.

'헹가래 시드니올림픽 가다' 연재

그러던 어느 날 밤, 호텔에서 소주 한잔할 안주가 생각났다.

"육포나 좀 사 와야겠다. 근데 영어가 안 통하는데 살 수 있을까?"

근처 슈퍼마켓으로 들어갔지만 예상대로 난관에 부딪혔다. 영어가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비프 저키(Beef Jerky)'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손짓발짓도 소용이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직업병처럼 주머니에서 종이와 펜을 꺼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스포츠조선에 연재한 시사만화 '헹가래 시드니 가다'. 시드니 상공을 향하는 비행기와 올림픽 주경기장을 배경으로, 올림픽 현장 취재를 앞둔 설렘과 기대감을 담아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스포츠조선에 연재한 시사만화 '헹가래 시드니 가다'. 시드니 상공을 향하는 비행기와 올림픽 주경기장을 배경으로, 올림픽 현장 취재를 앞둔 설렘과 기대감을 담아냈다.

드라이기 쐬는 시늉 하면서 말린 고기 설명

먼저 소 한 마리를 그렸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번에는 드라이기로 바람을 쐬는 시늉을 하며 "말린 고기"라는 뜻을 온몸으로 설명했다. 그래도 점원이 갸웃거리자, 종이 위에는 길게 말린 고기를 그리고, 네모난 비닐봉지에 담긴 모습까지 덧그렸다.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던 점원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케이!"

잠시 뒤 자신 있게 들고간 물건을 본 기자 일행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사람이 먹는 육포가 아니라 개 간식이었던 것이다. 안주를 기대하던 이들은 파안대소했다.

유 화백은 다시 종이를 집어 들고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사람 얼굴을 그리고 입을 크게 벌린 뒤, 고기가 그 입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큼지막하게 그렸다. 그제야 점원은 "아!" 하고 무릎을 탁 치더니 진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소고기 육포를 찾아 건넸다.

그는 "영어 한마디보다 그림 한 장이 더 빨랐다"며 지금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웃음이 나온다고 했다.

시드니올림픽 개막식의 감동을 그린 시사만화. 한반도기와 오륜기가 함께 휘날리는 모습을 통해 남북 선수단 공동입장의 역사적 의미와 화합의 메시지를 표현했다.
시드니올림픽 개막식의 감동을 그린 시사만화. 한반도기와 오륜기가 함께 휘날리는 모습을 통해 남북 선수단 공동입장의 역사적 의미와 화합의 메시지를 표현했다.

영어 한마디보다 그림이 이해시키는 데 더 빨라

이 에피소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취재를 나서려고 호텔을 나서는데, 전날 그 슈퍼마켓 직원들이 종이와 연필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처럼 또 그림 좀 그려 주세요. 고사리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신기했어요."

말이 통하지 않아 시작된 낙서가 하루 만에 작은 놀이가 된 것이다. 유 화백은 웃으며 몇 장의 그림을 더 그려줬고, 직원들과는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누지 못했지만 한동안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림은 세계 공용어" 실감

그 장면은 시사만화가 유환석을 가장 잘 보여준다. 신문에서는 한 컷의 만평으로 권력을 풍자했고, 낯선 시드니의 슈퍼마켓에서는 몇 줄의 선으로 육포를 주문했다. 말이 통하지 않자 드라이기로 고기를 말리는 시늉까지 곁들였고, 결국 세계 어디서나 통하는 것은 영어가 아니라 그림과 유머였다.

유 화백은 "영어는 서툴렀지만 그림은 세계 공용어더라고요" 하면서 활짝 웃었다. 올림픽 취재를 하며 수많은 경기를 봤지만, 그의 기억 속에는 금메달 시상식과 함께 슈퍼마켓에서 종이 한 장과 몇 번의 몸짓으로 시작된 작은 '국제 만화 외교'였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취재 당시 시드니 하버브리지 앞에서. 스포츠조선 올림픽 취재기자 출입증을 목에 걸고, 세계인의 스포츠 축제가 열린 현장에서 취재의 각오와 설렘을 담아 기념 촬영을 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취재 당시 시드니 하버브리지 앞에서. 스포츠조선 올림픽 취재기자 출입증을 목에 걸고, 세계인의 스포츠 축제가 열린 현장에서 취재의 각오와 설렘을 담아 기념 촬영을 했다.

기사 댓글 0

0 / 400

욕설, 타인 비방, 광고 등의 댓글은 예고 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관련 기사

종합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