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과 2019년의 차이는 박종환과 정정용의 차이

[이해준 기자의 내가 만난 스포츠 스타__청소년 축구를 보면서]

[편집자 주] 체육기자로 활약한 중앙일보 이해준 기자의 ‘내가 만난 스타’를 연재합니다. 이 기자는 간결하고 반듯한 문장과 현장감 넘치는 표현으로 독자들에게 ‘글맛’을 느끼게 합니다. 단순 나열식 문장이 아니라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하는 방식으로 묘사를 합니다. 독자 여러분도 이 기자처럼 자신의 경험담을 글로 진솔하게 표현해 보내 주시면 실어 드리겠습니다.

[글쓴이 주] 편집국 스포츠부를 떠난 지 어언 4년이 흘렀다. 한동안 글쓰기도 싫고, 운동 경기를 쳐다 보기도 싫었다. 일로 글을 쓰고, 스포츠를 본 세월이 너무 길어서다. 지난해부터 다시 축구를 보기 시작했다. 글을 쓰고 싶은 마음도 다시 생겼다. 내가 스포츠를 취재하며 만난 사람들, 겪은 사건, 들었던 이야기, 느꼈던 점을 편한 마음으로 쓰려한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한동안 고민했다. 그냥 나를 위해서 쓰기로 했다. 그 시절을 추억하는 건, 자신을 돌아보는 즐거운 일이다.

청소년 축구대표팀이 준우승을 했다. 내 기억은 어느새 1983년 즈음으로 달려간다.

#1 그 때는 전 국민이 4강 신화에 흠뻑 취했다. 열기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다. 거의 대부분의 국민이 오후 8시반 일일드라마를 보고, 9시면 TV 뉴스를 ‘함께’ 보던 시대였다. 다양한 즐길 거리도 부족하던 때라 청소년 축구의 돌풍은 엄청난 관심의 대상이 됐다.

#2 어렴풋한 기억에 그 때 중요한 경기가 일요일 교회 예배 시간에 열렸다. 한국이 골을 넣으면, 그 소식이 목사에게 전달되고, 목사가 성도에게 선포했다.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한국이 한 골을 넣었습니다!!’ “와아아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요일 예배당의 풍경인가.

#3 우리는 이미 (엄청난 개최국의 어드밴티지에 힘입어) 월드컵 4강을 경험했으니, 청소년 월드컵의 4강을 바라보는 마음이 그 때보다는 훨씬 여유로울 수밖에 없다.

지금은 관심 분야도 참 다양하고 세분화됐다. 1983년에 한국 축구팬 가운데 잉글랜드, 독일, 스페인 등 유럽 축구리그에 관심을 기울인 사람이 과연 존재하긴 했을까. 2019년엔 청소년 월드컵보다 리버풀의 유럽챔피언스리그 우승에 더 감동을 느끼는 축구팬도 적지 않으리라.

2019년과 1983년.(사진=이해준 기자 페북)
2019년과 1983년.(사진=이해준 기자 페북)

#4 그 땐 박종환 감독이 엄청나게 많은 인기를 끌었다. 지옥 훈련이라는 단어도 키워드였다. 선수에게 지옥훈련을 시켜 4강 신화를 만든 그는 한국 축구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 우리 엄마 아빠와 언니 오빠는 지옥 훈련을 이겨낸 바로 그 선수들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우리는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멕시코 아즈테카 고원을 누비는 젊은 호랑이를 목이 터져라 응원한 게 아니었을까.

#5 그 때 그 시절 우리 곁엔 또 얼마나 수많은 ‘또 다른’ 박종환이 있었는지 모른다. 지옥훈련만이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할 것이라 믿기 시작한 건 1983년부터가 아니었을까. '과정이 고통스러울수록 열매는 달다'는 믿음은 지금도 내 사고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고 있다.

#6 이번 청소년 대표팀은 그런 믿음에 금을 냈다. 과거 한국 축구는 기계처럼 움직였다. 도식적이었다. 공이 오면 공식대로 반응했고, 공식을 제대로 적용하지 못한 선수는 슬금슬금 ‘호랑이 감독’이 지키고 있는 벤치의 눈치를 봤다. 그런데 이번 청소년 대표선수는 도전적으로 상대를 일대일로 돌파하며, 스스로 전개하려는 모습이 보인다. 지옥 훈련을 안 해도 더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축구를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했다.

#7 주 5일제를 시행할 때 ‘이렇게 놀아도 세상이 돌아가나’라고 걱정했던 난 ‘꼰대’다 새로운 세대는 주 52시간 제 아래에서도 더 멋진 세상을 열어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 브라질, 독일 같은 이름 앞에서도 30년 전처럼 주눅들지 않는 모습도 든든하고 믿음직스럽다.

#8 두 살이나 어린 이강인이 팀의 리더라는 사실도 놀랍다. 20세 이하일 땐 한두 살이 꽤 큰 차이다. 나이에 구애 받지 않고 어린 동생에게 재능을 맘껏 발휘할 기회를 준 다른 선수들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9 마지막으로 정정용 감독. 훈련장에 화이트보드를 갖다 놓고 훈련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2부리그가 경력의 전부인 무명 감독. 그는 축구를 하는 능력과 축구를 가르치는 재능은 별개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는 한양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늘 새로운 것을 배우고자 하는 아카데믹한 신세대 지도자의 등장을 환영한다.

1983년과 2019년의 차이는 박종환과 정정용의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그 간극만큼 한국 축구가, 우리 사회가 발돋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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