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첫승 '한(恨)' 내질렀으니 이젠 세상을 내질러보자구"

[전직 축구기자 최원창 씨 공개]백기완 선생의 2002년 월드컵 첫승 관전기

최원창 씨 페이스북.
최원창 씨 페이스북.

한국과 폴란드가 맞붙은 2002한일월드컵 조별예선 첫 경기가 펼쳐진 2002년 6월 4일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 황선홍의 선제골로 1-0으로 앞서던 하프타임.

나는 6만여 관중 속을 비집고 백기완 선생님을 찾아 구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귀를 쫑긋 세워 온 신경을 곤두세워도 함성소리에 묻혀 간신히 글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구술을 받던 도중 터져나온 유상철의 추가골에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다던 백기완 선생님의 환한 웃음이 기억이 납니다.

1992년 대선 때 나는 백선본(백기완 선거운동본부)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대학로에서, 가리봉 오거리에서 멀찌감치 바라보던 선생님을 기자가 된 뒤 가까이서 뵐 수 있었던 건 신향식 선배 덕분이었습니다.

선생님의 별세 소식에 오랫동안 연락 한번 못 드린 게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다시 한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선생님이 꿈꾸던 대동세상이 하루 빨리 실현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래 글은 월드컵 첫 승을 현장에서 지켜본 백기완 선생님의 감회를 구술해서 받았던 글입니다.

통일운동가 백기완 선생과 전직 축구기자 최원창 씨(왼쪽).
통일운동가 백기완 선생과 전직 축구기자 최원창 씨(왼쪽).

[백기완 선생의 2002년 월드컵 조별예선 첫승 관전기]

한을 내질렀으니, 이젠 세상을 내질러 보자구.

마침내 한을 내질렀구나. 축구는 맺힌 한을 내지르는 것이거늘, 우리 선수들이 이제야 진짜 축구를 보여주고 말았구나.

서양 사람들이 붉은 색을 정열이라고 한다면 우리 민족에게는 ‘붉은 색’이 목숨이었지. 목숨을 내놓고 하면 뭐든지 되지 않겠어. 오늘은 선수들의 붉은 유니폼도 관중들의 붉은 파도 응원도 모두 목숨이 벌떡벌떡 뛰는 것과 같구나.

우리 말로 파도를 ‘몰개’라고 하지. 선수들의 뜀박질도 숨소리도 거대한 ‘몰개’가 몰려오는 듯하고 관중들의 함성 소리가 ‘몰개’가 거대한 바위를 쳐대는 맥박의 움직임 같구나.

축구가 이제야 민족의 한을 풀고 말았구나. 그동안 수 차례 축구경기를 보러갔지만 환호만이 있을 뿐 감격이 없어 아쉬웠는데 오늘에서야 진정한 축구의 의미인 한을 내지르는 감격을 얻었구나.

사진=스포츠경향 2002년 월드컵이 끝난 직후인 7월, 인천공항으로 출국하는 히딩크 축구대표팀 감독과 만난 백기완 선생.
[사진=스포츠경향] 2002년 월드컵이 끝난 직후인 7월, 인천공항으로 출국하는 히딩크 축구대표팀 감독과 만난 백기완 선생.

동학농민운동도, 3.1 만세운동도, 독재타도투쟁도 해내지 못한 국민 화합을 축구가 비로소 해내는구나.

첫 골을 터트린 황선홍이도, 두 번째 골을 터트린 유상철이도, 모두 내 자식이요. 힘차게 박동하며 '꽈이 땅(슛)' 하는 모든 선수들이 우리 겨레의 자식이구나.

오늘은 4천만 국민의 잔치가 아니요. 7천만 겨레 모두의 잔치가 돼야지. 부산에서만의 함성이 아니라 광주도, 대전도, 서울도, 평양도, 신의주도 모두 들썩이는 한판 대동의 댓거리판을 펼쳐야지.

이제 우리는 ‘아리아리’라고 외치며 길이 없으면 길을 내서 가고, 힘들다 지치면 서로 부둥켜 주며 함께 가는 지혜를 오늘 이곳에서 배웠을 거야. 오늘의 이 ‘몰개’를 잊지 말아야 할 거야.

이제 16강 진출이 문젠가. 이제는 한을 내질렀으니 세상을 내질러보자구. 우리 민족의 희망을 담아서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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