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운동길 지팡이 짚고 매일 걷는 어르신평범한 달력 뒷면에 지나온 삶을 한 자 한 자 기록기록 통해 같은 실수 되풀이하지 않는 지혜 터득아픈 기억을 글과 그림으로 꺼낸 뒤 태워 보내는 ‘마음의 소각’도과거를 붙잡는 대신 삶의 방향 바로잡는 기록치유 실천
[편집자 주] 물치유 전도사로 알려진 (주)물들임 정연숙 대표의 생애를 따라가는 연재를 합니다. 단순한 성공담이 아니라, 한 어린이의 호기심이 어떻게 소명이 되었는지, 상처를 보던 시선이 어떻게 치유의 길로 발전했는지, 그리고 물을 통한 몸의 회복이 어떻게 마음의 회복과 연결되는지를 차근히 풀어봅니다. 독자에게도 잊고 있던 자신의 ‘마음의 씨앗’을 다시 떠올리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새벽길에서 눈에 들어온 한 사람
정연숙 대표가 하루 2만 보 걷기를 이어가던 어느 날 아침. 이 날도 운동장에서 늘 비슷한 시간에 한 할머니와 마주쳤다. 70대 중반에서 80대쯤으로 보이는 할머니는 다리가 불편해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면서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길을 걸었다. 걷는 속도는 느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비가 오거나 몸이 불편해 보이는 날에도 어김없이 같은 길에 나타났다.
처음에는 서로 얼굴만 익힌 채 지나쳤다. 그러나 거의 매일 같은 시간에 마주치다 보니 정 대표의 마음에 궁금증이 생겼다. 불편한 몸으로도 날마다 길을 나서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 그는 언젠가 기회가 오면 꼭 말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먼저 인사를 건넸다.
대화를 나누면서 정 대표는 할머니가 젊은 시절부터 많은 고생을 겪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지금은 혼자 생활하고 있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자신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걷기와 체육공원 운동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실천하고 있었다. 지팡이에 의지해 한 걸음씩 내딛는 할머니는 때로 하루 1만 보 이상을 걷기도 했다.
달력 뒷면에 기록한 한 사람의 생애
할머니에게는 걷기만큼이나 오래 이어온 또 하나의 습관이 있었다. 바로 자신의 생애를 기록하는 일이었다. 젊었을 때는 먹고사는 일에 쫓겨 지나온 삶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지만, 나이가 들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자신의 인생을 한번 적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별도의 노트나 컴퓨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할머니가 선택한 것은 집에 있던 커다란 달력이었다. 날짜가 지나고 쓸모를 다한 달력의 넓은 뒷면에 생각나는 대로 자신의 삶을 써 내려갔다. 많이 배우지 못했다고 했지만, 잘 다듬어진 문장을 쓰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다. 살아오며 겪었던 일과 그때 느꼈던 마음을 자신의 말로 남기는 일이 중요했다.
정 대표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기록이 꼭 많이 배우고 글을 잘 쓰는 사람만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생각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싶다는 마음만 있으면 달력 한 장도 생애기록장이 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문장의 완성도가 아니라, 지나온 시간을 외면하지 않고 정직하게 마주하는 태도였다.
할머니는 자신의 삶을 기록하면서 무엇이 잘못됐고, 어떤 선택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는지를 조금씩 깨닫게 됐다고 했다. 그 깨달음은 건강을 지키는 생활로도 이어졌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니 하루하루 자신을 돌보고, 한번 정한 일을 꾸준히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기록하면 삶의 원인과 결과가 보인다 정 대표 역시 기록의 가장 큰 힘을 ‘삶의 원인과 결과를 보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억에만 맡겨두면 사람은 불편한 일은 피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과거를 바꾸어 받아들이기 쉽다. 그러나 글로 남겨놓으면 당시 자신이 무엇을 선택했고, 그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지를 비교적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냥 지나가 버리면 같은 실수를 또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무엇 때문에 좋았고, 무엇 때문에 잘못된 길을 선택했는지를 기록해 놓으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되더라고요.”
마음속 기억을 글과 그림으로 꺼내
물론 정 대표는 오래전부터 자신의 마음에 남은 기억을 글로 적어왔다. 기쁜 일만 기록한 것은 아니었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어떤 길을 택했고, 그 결과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써보았다. 마음에 응어리처럼 남은 일은 일기로 적기도 하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은 그림으로 그리기도 했다.
그는 기록한 것을 오래 간직하는 데만 의미를 두지 않았다. 충분히 들여다보고 마음속에서 정리됐다고 느끼면 그 종이를 태우는 ‘소각 작업’을 하기도 했다. 기록을 태운다는 것은 자신의 생애를 부정하거나 기억을 없애려는 행위가 아니었다. 종이 위로 꺼내놓은 상처와 스트레스를 더 이상 몸과 마음 안에 붙들어 두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사람은 아픈 일을 잊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 오랫동안 간직한다. 말하지 못한 서운함과 분노, 후회는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때때로 몸과 마음을 무겁게 한다. 정 대표는 그 감정을 글과 그림으로 밖에 꺼낸 뒤, 충분히 바라보고 태워 보내면서 기억과 자신 사이에 거리를 두려 했다.
기록은 과거가 아니라 다음 길을 위한 것
달력 뒤에 자신의 생애를 적은 할머니와 노트에 마음을 기록한 뒤 태워 보내는 정연숙 대표의 방식은 서로 달라 보인다. 그러나 두 사람의 기록에는 같은 목적이 담겨 있다. 지나온 삶을 통해 지금의 자신을 이해하고, 앞으로 걸어갈 길을 더 바르게 선택하려는 것이다.
할머니는 불편한 다리로 매일 같은 길을 걸었고, 달력 뒷면에 자신의 인생을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다. 정 대표는 그 모습을 통해 몸을 움직이는 꾸준함과 삶을 기록하는 성찰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배웠다. 걷기가 흐트러진 몸의 균형을 되찾는 과정이라면 기록은 흔들린 마음의 방향을 바로잡는 과정이었다.
사람의 인생은 기록한다고 달라지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록하면 자신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가 보인다. 길이 보이면 잘못 들어선 자리도 알 수 있고, 다시 어디로 가야 할지도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 기록은 지나간 삶을 붙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은 삶을 더 바르게 살아가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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