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숙 생애기록③] “재활용품으로 충당...학급비 안 걷겠다” 파격적 선거공약 적중한 사연

1984년 3월 충남 논산 강경여고 1학년 시절골목 돌며 친구들과 빈병, 종이상자 수거 판매

[편집자 주] 물치유 전도사로 알려진 (주)물들임 정연숙 대표의 생애를 따라가는 연재 기록을 시작합니다. 단순한 성공담이 아니라, 한 어린이의 호기심이 어떻게 소명이 되었는지, 상처를 보던 시선이 어떻게 치유의 길로 발전했는지, 그리고 물을 통한 몸의 회복이 어떻게 마음의 회복과 연결되는지를 차근히 풀어봅니다. 독자에게도 잊고 있던 자신의 ‘마음의 씨앗’을 다시 떠올리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돈 안 내도 되는 거야?" 친구들 환호

1984년 3월, 충남 논산시 강경여고 1학년의 한 교실. 친구들 이름도 익히지 못한 채 어색함이 남아 있던 새학기에 반장 선거가 열렸다. 몇몇이 머뭇거리며 눈치를 보던 그때, 정연숙 양이 번쩍 손을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반장하겠습니다. 학급비를 걷지 않는 걸 공약으로 걸겠습니다.”

친구들이 웅성거렸다. 선생님도 잠시 시선을 멈췄다. 교실의 공기가 바꾸기에 충분했다. 학급비를 걷지 않겠다는 공약은 너무 낯설어 호기심을 자극했다. 정 양은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재활용품을 모아서 팔겠습니다. 친구들이 도와주면 됩니다.”

“진짜? 그럼 우리 돈 안 내도 되는 거야?”

창의적 아이디어에 선생님도 시선 멈춰

교실 안에 작은 파장이 일었다. 친구들은 환호했다. 그의 말에는 계산보다 마음이 먼저 담겨 있었다. 친구들은 갸웃하면서도 웃음꽃으로 화답했다. 이 장면은 한 사람의 내면이 바깥으로 드러나는 순간으로 보였다.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먼저 몸을 일으키는 것이다.

“재밌겠다. 어디가서 빈 병을 주워올까?”

약속은 곧 현실이 되었다. 처음엔 쉽지 않았다. 재활용품을 모은다는 것은 생각보다 번거로운 일이었다. 학교가 끝난 뒤 골목을 돌며 종이 상자와 빈 병을 모으고, 그것을 분류하고, 쌓고, 옮기는 과정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손이 더러워졌고, 냄새도 났다. 처음에는 몇몇 친구들만 따라 나섰다. 하지만 정연숙 양은 멈추지 않고 친구들을 독려했다.

골목골목 돌며 종이상자, 빈병 모아

“조금만 더 해보자. 우리 진짜 할 수 있어.”

그 말은 명령이 아니라 제안이었다. 억지로 끌어당기기보다, 함께 가자고 손을 내미는 방식이었다. 며칠 지나자 변화가 생겼다. 한 명, 두 명, 친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구경만 하던 친구들도,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손을 보탰다. 종이 상자를 묶기도 했고, 병을 씻기도 했다. 일부는 손수레를 끌었다.

일은 힘들었지만, 분위기는 달라졌다. 혼자 할 때는 버거웠던 일이, 함께 하니 견딜 수 있는 일이 되었고, 나중에는 기다려지는 일이 되었다. 정연숙 양은 ‘사람은 혼자보다 함께할 때 더 큰 힘을 낸다'는 점을 실감했다.

재활용품은 점점 쌓였고, 그것을 팔아 돈으로 바꾸는 날이 왔다. 손에 쥐어진 금액은 크지 않았지만, 친구들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번져 있었다. 그 돈은 누군가에게 받은 것이 아니었다. 함께 만들어낸 결과였다.

재활용품으로 돈 바꾸는 날 자부심 뿌듯

이 경험은 중요한 전환점이다. 사람은 타인을 위해 움직일 때,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더 선명하게 느낀다. ‘나는 쓸모 있는 사람이다’라는 감각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는 것이다.

정연숙 양은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먼저 시작할 수 있는 용기, 혼자 시작한 일을 끝까지 이어가는 힘, 그리고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 그 모든 것이 이미 어린 여학생에게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재활용품으로 학급비를 마련하는 방식은 완전히 자리 잡았다. 학급비를 따로 걷지 않아도 되었고, 필요한 비용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관계였다. 친구들은 서로를 더 잘 알게 되었고, 함께 무언가를 해낸 경험으로 단단해졌다.

"친구들과 함께 뭔가를 해냈다"

정 양은 그 시절을 떠올리며 “친구들과 같이 뭔가를 해내는 게 얼마나 좋은지 그때 처음 알았어요”하고 말했다. 우렁을 잡던 아이가 몰입을 배웠다면, 고아원을 바라보던 아이가 공감을 배웠다면, 이 시기의 정 양은 ‘함께 살아가는 힘’을 배웠다. 이 세 가지는 결국 하나로 이어진다. 몰입하는 힘, 공감하는 마음, 그리고 함께하는 능력. 그것이 한 사람의 삶을 치유의 방향으로 이끈다.

"함께 할 때 더 멀리 갈 수 있다" 실감

독자 역시 자신에게 물어볼 수 있다. 나는 언제 누군가와 함께 무언가를 해본 적이 있었는가. 그 경험이 나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어쩌면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사람은 혼자보다 함께할 때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시작은 아주 작은 선언일지도 모른다.

“학급비를 받지 않겠습니다”란 한마디가 한 교실을 바꾸었고, 한 사람의 삶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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