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아픈 사람에게는 살이 도움이 될까… 의학 데이터가 밝힌 생존의 조건

심부전·심근경색 환자 연구에서 반복확인된 생존격차마른 몸보다 버티는 몸이 예후를 좌우한 임상데이터체중이 아닌 근육·영양 상태가 생존을 좌우급성질환 앞에서 지방은 연료가 될 수 있었다숫자보다 몸의 상태를 보라는 의학의 경고

통통한 사람이 더 오래 버티는 결과 나와

병에 걸리면 가장 먼저 듣는 조언은 대개 같다. 살부터 빼라는 말이다. 그런데 응급실과 중환자실의 기록을 들여다본 의학 통계는 이 상식을 조용히 뒤집는다. 오히려 통통한 사람이 더 오래 버틴다는 결과가 반복해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의사들조차 처음엔 고개를 갸웃했던 이 현상은 이후 ‘비만의 역설’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날씬함이 정말 건강의 정답인지, 의료 데이터는 이제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응급실에 동시에 실려 온 두 명의 심근경색 환자가 있었다. 한 명은 평소 날씬하다는 말을 듣던 사람이었고, 다른 한 명은 주변에서 늘 “살 좀 빼야 한다”는 소리를 듣던 체형이었다. 의료진의 직감은 자연스럽게 한쪽으로 쏠렸지만, 몇 년 뒤 생존 곡선은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통통했던 환자가 더 오래 살았고, 합병증도 적었다는 결과가 통계로 확인됐다(Circulation).

이처럼 직관과 정반대의 결과는 우연이 아니었다. 심부전, 심근경색, 뇌졸중 환자를 대상으로 한 대규모 임상 연구와 메타분석에서 “체중이 더 나가는 환자의 사망률이 더 낮다”는 결과가 반복적으로 보고됐다(American Journal of Cardiology). 이 현상은 이후 ‘비만의 역설(obesity paradox)’이라는 이름으로 정리돼 의학 교과서와 주요 학술지에 등장하기 시작했다(The Lancet).

비만은 여전히 질병의 위험요인이지만...

비만은 여전히 질병의 위험요인이다. 고혈압, 제2형 당뇨병, 관상동맥질환의 발생 위험을 높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그러나 이미 질병이 발생한 환자 집단에서는 체중과 예후의 관계가 단순하지 않다는 점이 임상 데이터로 확인됐다(JAMA).

심부전 환자 20만 명 이상을 분석한 메타분석 연구에 따르면, 정상 체중군보다 BMI 27에서 32 사이의 과체중군에서 전체 사망률이 유의하게 낮았다(Circulation). 급성 심근경색 환자를 대상으로 한 다기관 연구에서도 유사한 경향이 관찰됐으며 입원 후 장기 생존율은 과체중군에서 가장 높았다(American Journal of Cardiology).

뇌졸중 환자에서도 같은 패턴이 반복됐다. 허혈성 뇌졸중 환자를 장기간 추적한 연구에서 저체중군의 사망률이 가장 높았고, 과체중군의 기능 회복률이 가장 좋았다(Stroke). 이러한 경향은 암 환자, 만성 폐쇄성 폐질환 환자, 만성 신부전 환자, 중환자실 입원 환자에서도 관찰됐다(JAMA, The Lancet Respiratory Medicine).

체중과 예후의 관계가 단순하지 않음 확인돼

지방-근육, 단순 체중 아니라 생존 위한 연료저장고

이 역설을 설명하는 첫 번째 단서는 ‘에너지 비축’이라는 개념이다. 급성 질환은 인체에 대규모 화재가 발생한 것과 유사하다. 염증 반응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에너지는 단기간에 소모된다. 이때 지방과 근육은 단순한 체중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연료 저장고 역할을 한다(The American Journal of Medicine).

두 번째 핵심은 근육량이다. 최근 연구들은 체중보다 근육량이 예후를 더 정확히 예측한다는 점을 강조한다(Journal of Cachexia, Sarcopenia and Muscle). 저체중 환자 상당수는 이미 근감소증 상태에 있으며, 이 경우 감염 위험과 사망률이 급격히 증가한다(Age and Ageing).

즉, 날씬해 보이는 몸이 반드시 건강한 몸은 아니다. 외형상 마른 체형이라도 근육이 줄고 체력이 떨어진 상태라면, 질병 앞에서는 오히려 취약해진다(European Heart Journal). 반대로 체중이 다소 나가더라도 근육량이 유지된 환자는 재활 성공률과 치료 지속률이 높았다(Clinical Nutrition).

체중 나가도 근육량 있으면 치료 지속률 높아

세 번째 설명은 ‘역인과성’이다. 관찰 연구에서 정상 체중 또는 저체중 환자 중 상당수는 이미 암, 만성 염증, 흡연, 영양결핍 등의 요인으로 체중이 감소한 상태였다(Epidemiology). 이 경우 마른 몸은 건강의 원인이 아니라 질병의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BMJ).

네 번째 요인은 치료 여력이다. 심부전과 심혈관질환 치료에 사용되는 약물은 일정 수준의 혈압과 영양 상태를 전제로 한다. 저체중 환자는 저혈압, 전해질 이상, 약물 부작용으로 치료를 충분히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European Heart Journal).

이러한 연구 결과는 “살쪄도 괜찮다”는 메시지가 아니다. 비만의 역설은 비만을 옹호하는 이론이 아니라, 체중이라는 단일 숫자로 건강을 판단하는 사고방식의 한계를 드러낸다(Obesity Reviews).

BMI는 체중과 키를 단순 계산한 지표일 뿐, 근육과 지방의 비율, 염증 상태, 대사 건강을 반영하지 못한다(Lancet Diabetes & Endocrinology). 체온계 하나로 모든 질병을 진단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살쪄도 된다"는 주장은 아니다

최근 연구들은 체중보다 혈당, 염증, 근육 기능이 예후를 좌우한다고 말한다. 당화혈색소가 안정적이고, 중성지방과 염증 지표가 낮은 경우, 체형이 다소 통통해도 심혈관 위험은 높지 않았다(Diabetes Care, Circulation).

그렇다면 중장년 이후, 특히 심혈관질환을 경험했거나 위험군에 속한 사람은 어떻게 관리해야 할까. 첫째, 무조건 체중을 줄이려는 다이어트는 피하는 것이 좋다. 급격한 식사 제한은 지방보다 근육을 먼저 소모시키며, 이는 오히려 예후를 악화시킨다(Clinical Nutrition).

둘째, 단백질 섭취는 충분해야 한다. 근육은 노년기의 보험과 같다. 매 끼니 단백질이 포함된 식사는 근감소를 늦추고 회복력을 높인다(Journal of Nutrition).

체중보다 혈당, 염증, 근육 기능이 중요

셋째, 지방을 적으로 돌리지 말아야 한다. 극단적인 저지방 식단은 호르몬 불균형과 대사 불안을 초래할 수 있다. 지중해식 식단처럼 좋은 지방을 적절히 포함한 식단은 심혈관 사건을 줄였다(PREDIMED,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넷째, 체중계 숫자보다 혈당과 염증 지표를 관리해야 한다. 당화혈색소, 중성지방, C-반응성 단백(CRP)은 체중보다 더 정직한 건강 신호다(Circulation).

비만의 역설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우리는 그동안 몸을 너무 단순하게 판단해 온 것은 아닐까. 질병 앞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말랐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버틸 수 있는 몸이냐는 사실이다.

체중을 줄이는 데 집착하기보다 근육을 지키고, 잘 먹고, 꾸준히 움직이는 삶. 그것이 오늘날 의학 데이터가 환자와 독자 모두에게 건네는 가장 현실적인 조언이다.

[참고문헌]

Oreopoulos A, et al. Body mass index and mortality in heart failure: A meta-analysis. Circulation. 2013;128(7):781-790.

Romero-Corral A, et al. Association of bodyweight with total mortality and with cardiovascular events in coronary artery disease. American Journal of Cardiology. 2006;98(12):1619-1625.

Vemmos K, et al. Association between obesity and mortality after acute first-ever stroke. Stroke. 2011;42(1):30-36.

Flegal KM, et al. Association of all-cause mortality with overweight and obesity using standard BMI categories. JAMA. 2013;309(1):71-82.

Kalantar-Zadeh K, et al. Obesity paradox in patients with chronic kidney disease. American Journal of Clinical Nutrition. 2005;81(3):543-554.

Donini LM, et al. Sarcopenic obesity: definition, epidemiology and clinical implications. Ageing Research Reviews. 2020;61:101061.

Estruch R, et al. Primary prevention of cardiovascular disease with a Mediterranean diet.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2018;378: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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