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마해 당선했는데 무엇을 ‘수락’한다는 것인가"

이희용 전 연합뉴스 기자, 페이스북서 문제제기"‘당선 인사’, ‘당선 소감’으로 했어야"현실과 어긋난 언어를 바로잡는 일은호들갑이 아니라 언론의 기본 책무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의 ‘당 대표 수락 연설’이란 표현은 어색

17일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나온 ‘당 대표 수락 연설’이란 표현은 어색하다. 스스로 출마해 표를 달라고 호소한 사람이 당선된 뒤 대표직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말의 앞뒤가 맞지 않는다. 경선으로 뽑혔다면 ‘수락 연설’보다 ‘당선 연설’이나 ‘당선인 인사’가 정확하다.

이희용 전 연합뉴스 기자가 이날 페이스북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다. 오랫동안 정치권과 언론이 별다른 의심 없이 사용해온 표현에 질문을 던졌다. 익숙한 말이 반드시 바른 말은 아니다. 너무 오래 신어 불편함조차 잊어버린 신발도 있다.

‘수락’은 남이 먼저 건넨 제안이나 요구를 받아들이는 행위다. 사전도 ‘요구를 받아들임’이라고 풀이한다. “요청을 수락하다”, “제의를 수락하다”라고 한다. 말의 구조에는 요청하는 사람과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따로 존재한다.

‘수락’은 남이 먼저 건넨 제안을 받아들이는 행위

경선은 정반대다. 후보가 먼저 나선다. 출마를 선언하고 지지를 요청한다. 공약을 내걸고 연설을 한다. 때로는 한 표를 달라고 읍소하고, 경쟁자의 약점을 파고들며, 조직과 세력을 총동원한다. 당원들이 자리를 맡아달라고 문을 두드린 것이 아니다. 후보가 대표직을 얻으려고 당원들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그런 사람이 선출된 뒤 “대표직을 수락한다”고 하면 주객이 뒤바뀐다. 취업하려고 원서를 내고 면접까지 치른 사람이 합격한 뒤 “회사의 채용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틀렸다고 단정하기에 앞서 부자연스럽다. 치열했던 권력 경쟁은 사라지고, 당원들의 간청을 대승적으로 받아들인 듯한 그림만 남는다.

물론 ‘수락 연설’이라는 말에는 연원이 있다. 미국 정치의 ‘acceptance speech’를 옮긴 번역어로 볼 수 있다. 미국 정당의 전당대회에서는 대의원들이 대통령 후보를 공식 지명하고, 후보는 그 지명을 받아들이는 절차를 밟는다. 수락하는 대상은 선거 승리가 아니라 정당의 공식 지명이다.

경선은 정반대인데 '수락한다'고 하면 주객전도

그러나 외국 정치의 옷을 우리 제도에 무조건 입힐 수는 없다. 번역어는 원산지가 아니라 사용 환경에서 적절성을 평가해야 한다. 미국식 후보 지명 절차에서 자연스러운 말도 국내 정당의 대표 경선에 옮겨놓으면 의미가 달라진다. 제도가 다른데 간판만 같으면 언어가 현실을 가린다.

실제 언어 관행과 비교해도 일관성이 부족하다. 대통령선거나 국회의원선거에서 승리한 사람은 ‘당선 인사’를 하고 ‘당선 소감’을 밝힌다. 취임식에서는 ‘취임 연설’을 한다. 그들이 출마해 국민의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이 표현에 그대로 드러난다. 그런데 정당 내부 선거의 승자에게만 ‘수락’이라는 말을 붙일 뚜렷한 까닭은 없다.

‘수락 연설’이 언제나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당원들이 특정 인물을 합의 추대하고 그가 요청을 받아 대표직을 맡았다면 잘 어울린다. 정당이 공식적으로 후보를 지명하고 당사자가 이를 받아들이는 절차라면 ‘후보 지명 수락 연설’이라고 할 수 있다. 수락에는 수락할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 대상이 분명할수록 표현도 정확해진다.

경선의 승자에겐 ‘당선 연설’이 가장 명료

경쟁 경선의 승자에게는 ‘당선 연설’이 가장 명료하다. ‘당선 인사’나 ‘당선 소감’도 자연스럽다. 대표직 수행을 시작하는 자리라면 ‘취임 연설’이라고 하면 된다. 선출, 인사, 취임은 서로 다른 장면이다. 장면에 맞는 이름을 붙이면 독자도 정치의 과정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이 문제를 말꼬리 잡기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정치 언어는 권력의 이동 과정을 기록하는 장부다. 누가 먼저 권력을 원했는지, 어떤 절차로 권력을 얻었는지, 그 결과에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가 말 속에 담긴다. 표현이 흐릿하면 책임도 흐릿해진다.

특히 ‘수락’은 정치인에게 수동적이고 헌신적인 이미지를 입힐 수 있다. 권력을 얻기 위해 경쟁한 사람이 공동체의 부름에 응답해 짐을 떠안은 사람처럼 보인다. 치열한 득표전은 무대 뒤로 사라지고 희생과 봉사의 조명만 켜진다. 언론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말이 만들어내는 효과는 남는다.

'수락'은 헌신적 이미지...희생과 봉사의 조명만 켜져

언론과 정치권은 오래된 표현일수록 다시 살펴야 한다. 관행은 정확성을 보증하는 도장이 아니다. 잘못 놓인 철길도 기차가 오래 다니면 길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실과 어긋난 언어를 바로잡는 일은 호들갑이 아니라 언론의 기본 책무다.

출마한 사람은 지지를 요청한 사람이다. 선출된 사람은 당선한 사람이다. 추대를 받아들인 사람이라야 수락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단순한 구분만 지켜도 정치 언어는 한결 또렷해진다.

당 대표가 되겠다고 나서 표를 얻고 경쟁자를 이겼다면 그는 대표직을 ‘수락한 사람’이기에 앞서 선거에 ‘당선한 사람’이다. 이제 경선 승자의 첫 연설에는 그 과정에 맞는 이름을 붙이자. ‘수락 연설’이라는 낡은 번역의 외투를 벗기고 ‘당선 연설’이라는 정확한 이름을 돌려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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