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끊어지는 면발에 담긴 액운 정리의 상징슬픈 기억과 실패를 내려놓는 연말 식탁도시코시 소바에 남은 동아시아 연말 풍습메밀의 성질로 읽는 비움과 마침표의 의미새해를 맞기 전 마음을 가볍게 하는 의식

마지막 끼니로 메밀면 선택하는 이유
그날 밤, 국수집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결국 메밀국수를 고르는 사람들이 있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굳이 이유를 설명할 필요도 없다. 다만 올해는 유난히 마음에 매듭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연말의 마지막 끼니로, 일부러 잘 끊어지는 면을 선택한다.
메밀국수가 ‘정리의 음식’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상징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그 상징은 메밀이 국수가 되는 물리적 과정에서부터 시작된다. 메밀은 밀과 달리 글루텐을 거의 함유하지 않는 곡물이다. 글루텐은 반죽을 질기게 붙잡아 주는 단백질인데, 메밀에는 이 성분이 거의 없어 가루를 반죽해도 쉽게 뭉쳐지지 않는다(Fasano & Catassi,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2012). 그래서 메밀가루로만 만든 반죽은 조금만 힘을 주어도 갈라지고 부서진다.
이 특성 때문에 메밀면을 만드는 과정은 까다롭다. 가루를 반죽하고, 눌러서 면을 뽑고, 짧은 시간 안에 삶아내지 않으면 면이 끊어지거나 퍼진다. 제대로 된 메밀면일수록 조리 시간은 짧고, 다루기도 어렵다. 하지만 바로 이 점 때문에 메밀면은 질기게 늘어지지 않는다. 억지로 이어 붙이지 않고, 자기 몫을 다하면 담백하게 끊어진다. 일본 식문화 연구자 가와무라 요코는 이를 두고 “메밀면의 약한 결속력 자체가 일본에서 ‘끊어냄’의 상징으로 해석되어 왔다”고 설명한다(가와무라 요코, 『일본 음식문화사』, 2015).
자기 몫 다하면 담백하게 끊어지는 메밀국수
그래서 일본에서는 지금도 12월 31일 밤에 도시코시 소바를 먹는다. 도시코시란 ‘해를 넘긴다’는 뜻이다. 이 풍습은 에도 시대에 일반화되었는데, 당시 기록을 보면 소바를 먹는 이유로 “한 해의 고생을 끊어낸다”는 설명이 반복해서 등장한다(이시게 나오미치, 『일본 음식의 역사』, 2001). 잘 끊어지는 메밀면을 씹으며, 지난 한 해의 불운과 고단함을 문턱에 두고 간다는 인식이 이미 그때부터 분명했다.
흥미로운 점은 메밀이 가진 또 다른 상징이다. 메밀은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라는 작물이다. 흉년이 들어도 비교적 수확이 가능해, 가난한 시절 사람들의 생존을 도왔다. 일본 민속학에서는 이 점 때문에 메밀을 ‘버티는 곡식’으로 분류한다. 하지만 그 곡식으로 만든 면은 정반대로 잘 끊어진다. 일본 민속학자 미야모토 쓰네이치는 이를 두고 “메밀은 견디는 힘과 내려놓는 태도를 동시에 상징하는 드문 식재료”라고 해석했다(미야모토 쓰네이치, 『민속으로 읽는 일본인의 식탁』, 1993). 버텼지만, 집착하지는 않는다는 태도다.
이 감각은 일본만의 것이 아니다. 중국에서도 연말에는 일부러 잘 끊어 먹는 면을 선택해 액운을 정리하는 관습이 있었다. 중국 음식문화 연구서에서는 이를 ‘단면(斷麵)의 관념’이라 부르며, 해의 끝에서는 이어짐보다 단절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작동했다고 설명한다(왕런싱, 『중국 음식문화사』, 2010).

한국 세시풍속연구서도 '메밀' 추천
한국 역시 비슷하다. 한국의 세시풍속을 다룬 연구를 보면, 연말에는 묵은지, 팥, 메밀처럼 ‘묵은 기운을 씻고 비우는 재료’가 식탁에 올랐고, 새해 첫날에는 떡국처럼 이어짐과 축적을 상징하는 음식이 등장했다(정승모, 『한국 세시풍속의 이해』, 2008).
이 지점에서 메밀면의 함량 문제는 상징적으로도 중요해진다. 시중의 많은 메밀국수는 밀가루를 섞어 만든다. 밀가루를 넣으면 면은 훨씬 질겨지고 잘 끊어지지 않는다. 조리도 쉬워진다. 하지만 상징은 달라진다. 100% 메밀면은 끝까지 잘 끊어진다. 반죽도 약하고, 면발도 섬세하다. 일본 소바 장인들이 연말에 ‘주와리 소바’, 즉 100% 메밀 소바를 고집해 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상징의 순도를 지키기 위해서다(소바학회 편, 『소바의 과학과 문화』, 2017).
음식이 운명을 바꾼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음식이 마음의 작동 방식을 바꾼다는 점은 여러 연구에서도 확인된다. 의례적 식사는 개인의 감정 정리와 스트레스 완화에 도움을 준다는 심리학 연구도 있다(Conner et al., Appetite, 2018). 메밀국수를 먹는 행위는 말 없는 선언에 가깝다. 잘 끊어지는 면을 삼키며 사람은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이 관계는 여기까지, 이 실패도 여기까지, 이 슬픔도 여기까지.
한 해의 실패, 슬픔도 여기까지...
서양의 연말 식탁과 비교하면 차이는 더 선명해진다. 서양에서는 연말에 로스트 고기, 케이크, 와인처럼 풍요를 쌓아 올리는 음식이 중심이 된다. 이는 성취를 축하하고 다음 해의 번영을 당겨오는 상징으로 해석된다(Montanari, 『Food is Culture』, 2006). 반면 동아시아는 연말에 오히려 덜어내는 쪽을 택해 왔다. 해의 끝에서는 더하기보다 빼기가 먼저라는 감각이다.
그래서 이 말은 분명히 해야 한다. 올해 유난히 슬픈 일이 많았던 한국인이라면, 12월 31일에 메밀국수를 꼭 먹어야 한다. 가능하다면 100% 메밀면으로 먹는 것이 좋다. 그 면발이 쉽게 끊어질수록 상징은 더 분명해진다. 억지로 이어온 시간들, 더 이상 붙잡지 않아도 될 마음들을 그날 밤에 함께 끊어내라는 메시지다.
메밀국수는 위로의 음식이 아니라 정리의 음식이다. 잘 끊어지는 면처럼, 올해의 슬픔도 거기까지다. 그 정도의 마침표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참고문헌)
Fasano, A., & Catassi, C. (2012). Celiac disease.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367(25), 2419-2426.
Conner, T. S., Brookie, K. L., Richardson, A. C., & Polak, M. A. (2018). On carrots and curiosity: Eating fruit and vegetables is associated with greater flourishing in daily life. Appetite, 128, 52-62.
Montanari, M. (2006). Food is culture.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이시게 나오미치. (2001). 일본 음식의 역사. 도쿄: 이와나미서점.
가와무라 요코. (2015). 일본 음식문화사. 도쿄: 요시카와고분칸.
미야모토 쓰네이치. (1993). 민속으로 읽는 일본인의 식탁. 도쿄: 고단샤.
소바학회 편. (2017). 소바의 과학과 문화. 나가노: 소바문화연구소.
왕런싱. (2010). 중국 음식문화사. 베이징: 중국사회과학출판사.
정승모. (2008). 한국 세시풍속의 이해. 서울: 민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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