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어필 600년 스토리 발굴한 언론인 이상주

'세종대왕 어필(御筆) 탈취 사건과 600년 수난사' 출간11년 추적 “세종 친필을 보관해 왔다” 후손들 증언왕실문화작가로 활약…2021년 세종대왕신문 창간도

'상식의 오류'는 확인되지 사실을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지레짐작으로 믿는 것이다. 상식의 오류는 세종대왕에게도 보인다. 그중의 하나가 왕의 친필이다. 세종은 한글을 창제하고, 문물을 크게 일으켰다. 문예진흥을 이끈 왕은 많은 글을 지었고, 직접 쓴 글씨가 다수 존재할 것으로 여길 수 있다.

그런데 실용주의 군주인 세종은 문학창작 활동에 담을 쌓았다. 시(詩)나 문(文)을 통한 신하 통제나 왕권 강화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 결과 세종이 짓거나 쓴 글은 극히 적었다. 이는 아들 문종의 증언에서 확인된다. "부왕의 어필(御筆)은 지극히 신묘(神妙)하다. 그러나 글쓰기에 연연하지 않으셨다. 어필이 참으로 드물다." 그나마 극히 소수였던 세종의 작품은 수백년 세월이 흐르면서 사라졌다. 현재 전해지는 세종의 친필은 세상에 없다. 나라에서 공인한 어필이 단 한 점도 없다.

세종이 쓴 글 극히 적어

11년간 세종 어필 찾아 의미있는 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의 어필 존재 가능성에 대해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이상주 왕실문화작가가 대표적이다. 11년간 세종대왕 어필을 찾아온 그는 한국사에 의미있는 역사자원을 찾아냈다. 파란만장한 세종대왕 어필 스토리를 밝혀낸 것이다. 세종대왕이 직접 써 형인 효령대군에게 선물한 친필에 쌓인 600년 우여곡절 사연이다. 역대 왕들의 보존대책, 토호들의 강탈, 유림들의 사발통문, 효령대군 후손의 절규, 철종대왕의 판결 등 어필에 관한 자료를 수북하게 찾아냈다.

세종의 친필 사연에는 전통시대의 우애, 효성, 감동, 임금, 격쟁, 정승과 토호의 결탁, 선과 악, 현대의 국회 국정감사 등 갖가지 인간군상의 모습이 두루 담긴 대하 소설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이상주 왕실문화작가는 최근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세종대왕 어필(御筆) 탈취 사건과 600년 수난사(다음생각 펴냄)'를 출간했다. 부제는 '세종대왕 어사희우정효령대군방문(世宗大王 御賜喜雨亭孝寧大君房文)'이다.

효령대군 후손 절규 등 자료 발굴

왕의 친필인 어사희우정효령대군방문은 애민정신과 형제애에서 비롯됐다. 세종은 즉위 7년인 1425년 4월에 한강에서 기우제를 지낸 뒤 인근의 효령대군 정자를 찾아 형제의 정을 나누었다. 술잔이 반쯤 비워졌을 때 간절히 바라던 비가 하늘에서 쏟아졌다. 임금은 크게 기뻐하여 합강정(合江亭)으로 불린 정자 이름을 희우정(喜雨亭)으로 바꾸게 했다. 그 감흥을 왕실용 고급 한지 10매에 528자의 해서(楷書)로 써 형 효령대군에게 선물했다. 효령대군은 89세에 왕의 어필을 증손자인 주계군 이심원에게 상속했다.

주계군 이심원은 세종 어필을 희우정에 봉안각을 세워 보관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주계군 후손이 미약해졌다. 이 틈을 타 조선 후기에는 세도가와 결탁한 모리배들이 희우정 관리에 따른 이권을 가로채고, 세종의 어필을 탈취했다. 이에 주계군 후손 이진호는 궁궐 앞에서 4개월간 1인 시위를 했고, 분노한 전국의 유림이 통문(通文)으로 의견을 모으며 나라에 공정한 수사를 촉구했다. 또 세종대왕이 실행한 바에 따라 원상 복원조치를 호소했다. 철종은 엄정한 수사를 지시했다.

기우제 뒤 비 쏟아지자 한시로 감흥 작성

세종대왕 여주 영릉에서 제향을 모시는 이상주 작가
세종대왕 여주 영릉에서 제향을 모시는 이상주 작가
효령대군 친필.
효령대군 친필.
세종대왕 친필로 알려진 어사희우정효령대군방문
세종대왕 친필로 알려진 어사희우정효령대군방문

세도가 결탁 모리배들, 세종 어필 탈취

사건의 진실을 확인한 철종은 1853년에 왕의 판결문인 내사완문(內賜完文)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세종의 어필은 원소유자인 효령대군 증손 주계군 후손에게 다시 돌아가게 됐다. 철종은 이와 함께 정부에서 규정을 만들어 이 제도가 항구적으로 준수되도록 했다. 정부는 준수해야 할 항목을 한성부와 형조에 내렸다. 이것이 정부여형한양사게판절목(政府與刑漢兩司揭板節目)이다.

어사희우정효령대군방문이 세종의 친필임은 효령대군친필전문, 헌종(재위1834~1849년) 때 형조에서 소유자로부터 받은 글, 철종(재위 1849~1863년) 때 효령대군 종친회에서 쓴 탄원서, 충청도 화양서원 통문, 경상도 상주 흥암서원 통문, 경상도 함창도회 통문, 철종의 격쟁 비답, 철종의 내사완문, 철종이 형조와 한성부에 내린 정부여형한양사게판절목(政府與刑漢兩司揭板節目) 등에서 확인된다. 영조, 정조, 문조(효명세자), 헌종, 철종이 어사희우정문과 이를 보관한 정자 보존에 지극히 신경을 쓴 배경이다.

충남 계룡시의 주계군 사당에서 보관돼오던 세종의 어필은 현대에는 국가에서 감정을 미루는 사이에 개인 사이의 이전 등 관리 문제가 뒤따랐다. 그 결과 2018년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는 세종친필(추정)인 어사희우정 서첩 도난사건이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 같이 켜켜이 쌓인 어사희우정효령대군방문의 600년 대하서사시를 이상주 왕실문화작가가 11년의 발품 끝에 발굴해 세상에 알렸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600년 대하서사시 11년 발품 끝 세상에 알려

세종대왕 여주 영릉 제향 모습. 왼쪽에서 세번째가 이상주 작가
세종대왕 여주 영릉 제향 모습. 왼쪽에서 세번째가 이상주 작가

“2005년 한글날 SBS 보도로 관심 갖기 시작”

- 세종대왕 친필은 언제부터 관심이 있었는가.

“초등학생 시절부터 왕의 글씨를 보고 싶었다. 그 열망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사라졌다. 세상에 세종의 친필이 없음을 안 것이다.”

- 언제부터 친필을 연구했는가.

“2005년 한글날인 10월 9일, SBS에서 ‘세종 친필인 어사희우정 효령대군방문 발견’ 보도를 했다. 이 때부터 다시 관심을 갖게 되었다.”

- 서첩을 언제 처음 보았는가.

“2014년 봄에 문화재에 조예가 깊은 원로 스님의 주선으로 처음 보았다.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그날의 감흥을 전주이씨 종합교양지인 '이화'에 실은 바 있다. 그 일부를 소개한다.

‘황금색 비단 보자기가 풀어졌다. 찰나, 경외심(敬畏心)에 온몸이 전율한다. 600년 동안 잠 잔 세종대왕의 친필(이하 추정)이다. ‘御賜喜雨亭(어사희우정)!’ 첫 문장이 펼쳐지는 데 숨이 콱 막힌다. 혹여, 글이 손상될까, 혹여 예에 어긋날까 머리칼이 쭈볏선다. 정성을 다해 한 장씩 조심스럽게 넘겼다. 모두 10매에 쓰인 528자의 글. 손에 낀 면장갑 위로 대왕의 따스함이 전해져온다. 작은 방안에 옥음이 가득한 듯, 상서로운 기운이 넘친다. 혼이 담긴 해서체 글은 손을 대는 순간, 용틀임의 웅장함으로 승천할 듯하다. 수백 년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성군(聖君)을 뵙는 의식이다. 어필(御筆)을 뵙는 시간은 두려움과 감사함과 희열감이 어우러진 혼돈이었다.‘”

“면장갑 위로 대왕의 따스함 느껴져”

태종 헌릉과 이상주 작가
태종 헌릉과 이상주 작가

"고미술 전문 감정기관서 세종 친필로 감정"

- 어사희우정효령대군방문은 세종대왕이 직접 쓴 친필인가.

“어사희우정문이 세종의 어제(御製) 어필(御筆)임은 600년 동안 여러 글에서 확인되고 있다. 고미술 전문 감정기관인 한국고미술협회도 2017년에 세종대왕 친필로 감정했다. 또 한 기관의 분석에서는 글씨가 쓰인 지질을 1400년대 것으로 분석했다.”

- 왕이 직접 쓰지 않고, 사자관이 베껴 쓸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국왕 문서는 주로 문신이 작성하고, 왕이 검토하는 형식으로 완성된다. 승문원의 사자관(寫字官)도 임금의 글을 베껴서 바르게 썼다. 조선시대 왕의 글 절대다수는 글씨를 잘 쓰는 승지를 비롯한 문신과 사자관이 쓴 것이다. 친필은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어사희우정효령대군방문은 세종이 직접 썼다고 다양한 문헌에서 확인된다.”

"왕이 직접 쓴 글과 신하 대필 글, 구분하여 감정"

- 왕이 직접 쓴 글과 신하가 대신 쓴 글은 어떻게 구분하는가.

“왕이 직접 쓴 글과 신하가 대신 쓴 글은 형식과 단어 선택 등 에서 차이가 난다. 대표적인 게 임금을 상징하는 용어 표현이다. 신하가 대신 쓴 글은 최고존엄 의미를 담았다. 왕을 칭하는 용어인 성상(聖上) 등의 글자를 높이고, 다음 글자는 줄을 바꿔 쓰는 형식이다. 이것이 줄 바꿈인 개행(改行)이고, 기준이 되는 글자 자리가 수자(首字)다. 개행이 수자의 위치와 같게 이루어진 게 평행(平行)이다. 개행을 평행보다 한 자 올려 공경하는 게 상일자(上一字)이고, 두 자를 올려 더욱 공경하는 게 상이자(上二字)다. 또 내용에서도 왕을 지칭하는 성상(聖上) 등의 단어를 선택했다. 반면 왕이 직접 쓴 글은 상일자(上一字) 등 공경 형식에 연연하지 않았고, 왕을 지칭하는 단어도 평범하게 나를 뜻하는 여(予)가 보인다. 이 같은 눈으로 보면 ‘어사희우정효령대군방문’은 임금의 뜻을 받들어 신하가 쓴 어제(御製) 보다는 임금이 직접 쓴 어필(御筆) 가능성이 있다.”

"왕 지칭 단어도 '나'를 뜻하는 '여(予)'로 작성"

세종대왕 친필로 알려진 어사희우정효령대군방문.
세종대왕 친필로 알려진 어사희우정효령대군방문.

“관리 허점” 국정감사서 한때 지적 받아

- 세종 어필이 국정감사에서도 논란이 되었는데.

“국가유산청은 2018년에 어사희우정효령대군방문을 도난 문화재로 등재했다. 그해 10월 국정감사에서는국가유산청(문화재청)이 도난 사실을 1년 동안 알지 못한 점과 세상에 문서가 알려진 후 12년 동안 (문화재 지정 등) 관리하지 않은 점이 지적됐다. 이에 국가유산청장(문화재청장)은 “개인 소유이기에 비지정 문화재로 두었다. 앞으로는 비지정문화재를 지정문화재로 돌리도록 노력하겠다”고 답변했다. 어사희우정효령대군방문은 2021년 10월에 도난문화재 등재에서 해지됐다.“

- 세종 친필의 스토리가 알려진 뒤 어떤 반응이 있는가.

”어사희우정효령대군방문을 보관해온 효령대군 증손자 주계군 문중에서 연락이 왔다. 충남 계룡시 신도안면에 있던 주계군 사당에서 대대로 이 서첩을 보관해왔다고 했다. 팔순, 구순의 노인 문중원은 어린 시절에 사당에서 이 서첩을 본 기억을 떠올린다고 했다.”

- 문화계에서도 관심을 가질만한 내용이 아닌가.

”약 100만명인 세종대왕 후손, 50만 종원이 있는 효령대군 청권사,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등에서 크게 주목하고 있다. 또 한 기관에서는 세종대왕 어필 600년 사연 뮤지컬 제작 가능성, 또 다른 기관에서는 세종대왕 어필 스토리를 담은 에니메이션 제작, 한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세종대왕 전시관 운영 검토 등 친필 스토리 활용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세종 어필 600년 사연 뮤지컬 제작 가능성도"

태종 헌릉의 하전석 돌우물을 설명하는 이상주 작가
태종 헌릉의 하전석 돌우물을 설명하는 이상주 작가

“세종이 태종 헌릉에 돌우물 조성설 최초 제기”

- 세종의 효도와 태종우의 연관성을 최초로 제기했는데.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태종의 헌릉 하전석에는 돌 우물이 조성돼 있다. 이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기에 언제, 왜, 누가 조성했는지 모른다. 나는 2012년에 돌우물과 태종우와의 연관성을 최초로 제기했다. 태종이 비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태종우 사연을 만들었다. 부왕의 간절한 마음을 아는 세종은 태종의 헌릉에 돌우물을 조성했을 가능성이 짙다. 그 개연성을 논리적으로 추론했다. 이후 내 주장은 다양한 매체에 실리게 됐다.”

- 세종이 술 7잔에 왕이 됐다는 스토리텔링의 주인공인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이 왕이 되는 과정이 소개돼 있다. 태종은 세종에게 대권을 맡기는 이유 중 하나로 술을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는 점을 들었다. 반면 왕위 계승 서열이 앞서는 효령대군은 술을 한 잔도 마시지 못해 외교관계에서 마이너스 요인이라고 했다. 그런데 기존의 역사학자나 작가들은 이 점을 거론하지 않았다. 세종이 자질이 뛰어난 게 왕이 된 큰 이유지만 술과의 관계도 변수임을 분명했다. 600년 만에 내가 처음으로 이 부분을 독립시켜 강의하고, 각종 매체에 기고를 했다. 이후 많은 매체에 소개되기에 이르렀다.”

- 불효자 태종을 효자로 재해석도 했는데.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가 잠든 곳이 정릉이다. 태조의 능은 건원릉이다. 이에 대해 역사학자나 작가들은 태종이 계모인 신덕왕후를 미워해 부왕을 정릉이 아닌 건원릉에 모신 것으로 쓰고 있다. 이는 역사에서 기록된 게 아니라 당시 정황을 보고 추측한 것이다. 잘못된 해석은 아니다. 그러나 반대의 풀이도 가능하다. 건원릉은 태조가 사후에 안식처럼 점찍은 수릉의 한 곳이다. 태종은 부왕을 위해 함흥의 띠풀과 흙으로 봉분을 조성했다. 당시인의 사상적 배경인 음양오행으로 보면 건국군주는 상징적으로 도성 동쪽에 모실 필요가 있었다. 이 같은 점을 고려하면 태종은 불효가 아닌 효도 차원에서 부왕을 건원릉에 모셨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나는 이점을 설명하고, 반대의 관점에서도 풀이가 가능함을 말한 것이다.”

철종이 어사희우정효령대군방문을 세종의 친필로 판부한 내사완문.
철종이 어사희우정효령대군방문을 세종의 친필로 판부한 내사완문.
세종대왕 친필로 알려진 어사희우정효령대군방문.
세종대왕 친필로 알려진 어사희우정효령대군방문.

“'세종의 공부', '세종의 자녀교육법' 등 20권 집필”

- 작가 생활은 언제 시작했는가.

“어려서부터 흥미를 느낀 게 스포츠와 역사였다. 신문기자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기자 생활 23년 중 20년을 스포츠 기자로 일했다. 스포츠조선에서 야구부장, 총무부장, 사회부장, 체육부장을 지낸 뒤 역사에 빠져 살고 있다. 서울시립대 시민대학 등에서 10여년 조선왕실사와 역사스토리텔링 등을 강의했다. 세계문화유산인 종묘대제와 사직대제 전수자로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전례위원과 문화위원을 역임했다. 세종대왕 왕자 밀성군파종회 학술이사, 백강 이경여문중 문화이사로 2021년부터는 세종대왕신문을 창간해 발행하고 있다.”

- 다양한 책을 집필했는데, 주요 작품을 소개한다면.

“첫 작품인 '이 경기장에선 내가 최고다'를 시작으로 20종을 썼다. 신문사 재직 시에는 스포츠 관련 집필을 주로 했고, 퇴직 후에는 역사 관련 책을 써왔다. 세종의 삶을 다룬 주요 작품에는 '세종의 공부', '세종의 자녀교육법'이 있다. 세종 후손을 추적한 책에는 '세종의 후손 여산에 뿌리를 내리다', '조선의 혼 백강에 흐르다', '도봉산에 깃든 세종왕자 영해군 500년 이야기', '(중종왕자) 봉성군과 을사사화(번역)'가 있다.

또 조선 왕실의 사당과 왕릉을 살핀 '왕의 영혼 조선의 비밀을 말하다', '태조와 건원릉', '태종과 헌릉'을 썼다. 태종 승하 600주년(2022년)에는 '위대한 군주 태종대왕'을 대표 집필했다. 조선 선비의 가치관이 녹아있는 '조선명문가 독서교육법'과 연안이씨 의정공 종중 역사를 복원한 '혁명가와 의병장을 키운 어머니(공저)'도 주목받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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