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글 독립운동 발자취(7)]일본이 밉더라도 일본에게 배울 것은 배우자.

삼국시대엔 한자를 쓰더라도 우리말투로 쓰려고 이두, 구결을 생각해내고 실천했다. 일본은 그 방식을 받아들여서 제 글자 ‘가나’를 만들었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서 머물렀고 중국 한문 속에서 헤맸다. 고려가 400여 년 동안 이 땅에 있었는데 그동안 한자를 쓰고 한문 말글살이만 했지 우리 글자를 만들고 우리 말글로 글꽃(문학)을 피우려는 사람도 없었고 그런 정책도 없었다. 400여 년 동안 한자로 글을 썼더라도 대단한 한문 문학작품도 보이지 않는다. 밤낮 공자왈 맹자왈이었고 중국인 이태백이나 소동파가 쓴 한시나 외우고 있었다. 한마디로 고려시대는 우리말 독립 암흑기였다.
고려 제11대 문종의 셋째 왕자로 태어난 의천(1055-1101)은 중국 송나라로 가서 불경 공부를많이 하고 중국 항주 상주사 주지 정원(1011-1088)으로부터 화엄경을 전수받고, 그곳 절 혜인원에 화엄교장을 설치하고 책 7500여 권을 비치했는데 그 경비를 의천 대각국사가 지원했다고 한다. 그 공적으로 그 후에 혜인원은 ‘고려사’로 이름을 바꾸었었다. 그런데 그 때 고려 사람인 의천 대각국사를 미워한 소동파가 그 항주 행정 책임자로 있을 때 그 절을 없애버렸다. 그래서 그 절터에 소동파 동상이 서 있다. 그리고 오늘날 중국이 그 절을 다시 세우면서 그 절이 있던 자리에 소동파 동상이 있기 때문에 그곳에 세우지 못하고 그 언저리에 세우고 ‘고려헤인사’란 간판을 달았다.

왼쪽은 중국 송나라 때에 의천 대각국사가 있던 고려사 터에 서있는 소동파 동상이고 오른쪽은 그 절터에서 몇 백 미터 떨어진 곳에 오늘날 중국이 다시 세운 혜인고려사 모습. 항주 서호 근처에 있는데 한국 관광객을 끌어들이려고 다시 지은 것으로 보인다. 2008년에 글쓴이 리대로가 항주에 가서 찍은 것임.
그런데 고려 때 사람뿐이 아니라 조선시대를 지나 오늘날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고려 사람을 미워한 소동파가 쓴 한시를 대단한 문학작품이라고 외우고 우러러보고 있다. 제 말글로 좋은 글을 쓸 생각은 안 하고 그러는 것은 얼빠진 꼴이다. 아무튼 고려도 한자로 글을 썼지만 오늘날까지 읽히고 있는 중국 사서삼경을 뛰어넘는 한문 문학작품이 없다. 무엇 때문일까? 중국 지배와 원나라 침략에 살아남기 힘들더라도 마음만이라도 제 정신으로 살았다면 제대로 된 한문 글을 남겼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일부러 찾아보려고 해도 빼어난 한문 저서가 없다. 중국에서 넘어온 불교 경전을 베낀 8만대장경이나 유교 경전들뿐이다.
그때 일반 백성들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나 임금이나 많이 배우고 잘난 지배층은 도대체 무엇에 매달렸는지 모르겠다. 힘센 중국과 원나라 눈치나 보면서 그들 문화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한문 나라 중국인이 쓴 글이 나무줄기라면 우리가 쓴 글은 곁가지였다. 그러니 고려 400여 년 동안 중국 사서삼경을 뛰어넘는 저서가 없다. 또 고려 때 400여 년 동안 우리 말글 독립을 외치거나 애쓴 발자취가 없다. 한마디로 그 때는 우리 말글 독립 암흑기였다. 그 때 일본처럼 우리 글자를 만들고 제 정신을 가지고 우리 말글로 말글살이를 했다면 오늘날 일본에 짓밟히고 업신여김을 당하지도 , 미국에 끌려 다니는 나라꼴이지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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