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느질 하나로 서민갑부된 유별난 엄마의 골 때리는 이야기
제3장 사랑의 로맨스(2)

고향 떠나온 남영철, 만주 곳곳서 온갖 일하며 고생
격변 시대상황 속 이뤄낸 결혼과 가정

북만 땅에서의 남영철
북만 땅에서의 남영철

북만 땅에서 보낸 방황의 시기

남영철은 22살이라는 나이에 중국으로 건너오게 되면서 목단강 일대에 처음으로 정착했다. 당시는 우물을 인공적으로 파던 시기였는데 그는 우물 파는 일을 비롯해 돈이 되는 일이면 가리지 않고 했다. 어딜가나 일제 치하 세상이었던지라 잡공으로 여러 일들을 했지만 돈은 좀처럼 모아지지 않고 몸과 마음은 지쳐가고 있었다.

그렇게 돈벌이가 잘 되지 않자 별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다시 귀향길에 올랐다 며칠을 걷고 또 걸어 두만강 인근에 이르렀는데 차마 그 강을 건널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한국엔 노쇠하신 부모님과 태어난 딸까지 있었던 상황이었던지라 빈털터리가 되어 집에 들어설 생각을 하니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두만강 근처를 한참동안 서성이다 결국 강을 건너지 못하고 다시 뒤돌아섰다. 그렇게 새로 돌아들어간 곳은 하얼빈 일대였다.

하얼빈에서 운전기사로 일하던 시절의 남영철.
하얼빈에서 운전기사로 일하던 시절의 남영철.

드디어 찾아온 기회…일본인 운수회사 보조기사로 트럭 운전

하얼빈에서 여기저기 잡다한 일을 하다가 찾은 직업이 바로 일본인이 운영하는 운수회사 보조기사였는데 트럭을 모는 일이라 몸은 고됐지만 배워두었던 기술을 써먹으면서 수입을 챙길 수 있었던지라 꽤 괜찮은 자리였다. 그 후 여러 운수회사를 전전하며 트럭기사로 경력을 쌓아나갔다.

그러다 그는 여러 업체를 전전하며 자동차 정비와 운수 쪽 일을 전담했는데 동아물산에 근무할 적 그의 훤칠한 키와 성실한 성품, 뛰어난 운전실력을 본 지배인이 그를 꽤나 마음에 들어했다.

어느 날 지배인은 남영철을 불러들이며 자신의 자가용을 몰아보라고 권유했다. 그는 어정쩡한 마음이었지만 핸들을 잡고 정비업체 주변을 한 바퀴 돌았고 그의 운전 솜씨를 확인한 지배인은 다음 날부터 가족운전기사를 맡기며 남은 시간에는 택시를 해서 돈을 벌어보라고 했다.

당시 자가용을 운전한다는 것은 참으로 신사적인 이미지의 직종이었다. 그렇게 기름투성이 작업복의 남영철은 근사한 정장 차림에 손에는 새하얀 장갑을 끼는 운전기사가 되었다.

지배인은 이따금 술을 한 잔 마시면 그에게 자신의 사위가 되지 않겠냐며 호의를 보이곤 했다. 하지만 남영철은 당시 한국에 두고 온 가족이 있는지라 이렇다 할 태도도 보이지 못하고 그저 묵묵히 일만 하였다.

지배인 가족의 운전기사 발탁

그러던 어느 날 지배인이 그에게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에 기념사진 한 장 남기자고 제안했다. 제안이 싫지 않았던 남영철은 이를 수락하며 같이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고용인과 고용주가 한 프레임에 담긴 희한한 사진을 찍고 난 뒤 얼마 되지 않아 국제 정서에 큰 이변이 일어났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9일 소련이 태평양전쟁에 참전하게 되면서 일본군국주의가 완전히 무너져 내린 것이다.

소련군은 일본 관동군을 쉽게 격파하면서 10일엔 조선반도에 진주하고 12일엔 선봉(구 웅기)과 라진(경흥군 신안면), 14일엔 청진(함경북도 중동부의 동해안에 위치한 시)에 진격하며 엄청난 속도로 남하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 오키나와까지 진격했던 미군은 소련군의 급속한 남하와 일본의 항복 선언이 확실시되자 조선 전체가 소련의 군사점령에 들어갈 것을 우려해 38선 분할을 제안했다.

사랑하는 가족과 상봉할 날을 고대하며 차곡차곡 준비하며 살아왔지만 고국의 땅덩어리가 두 쪽으로 갈리게 되고 남과 북의 정치적 이념이 갈리면서 그의 귀향길은 점점 멀어져만 갔다.

3.8선으로 갈리면서 군 입대 제의 받아

그러던 어느 날 하얼빈 송강군구 포병탄에서 그에게 입대제의가 들어왔다. 1946년 4월, 그의 나이 28살이었다.

당시 일본군국주의자들이 전쟁도구로 사용하다가 도망가면서 버리고 간 군용자동차, 대포, 탱크 등이 꽤 많았는데 이것들을 하나하나 몰아다 정비해서 해방전쟁 전선원호에 내보내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된 것이다. 당연히 그런 기술력을 가진 인재의 수요가 늘었고 자동차 및 기계정비 분야라면 둘도 없는 베테랑이던 그는 본의 아니게 현 상황에 참전하게 된 것이다.

남영철은 아무렇게나 버려져있는 자동차 탱크며 바삐 몰며 일에 매진했고 거기에 정비 기술력까지 갖췄던 그는 일약 부대에서 각광받는 인물로 떠올랐다. 그렇게 그는 전리품들을 하나하나 분해해서 정비한다는 중일전쟁(해방전쟁)에 내보내는 일을 맡게 되면서 총을 들지 않은 군은으로 후방에서 몫을 다하게 되었다.

그 뒤 해방전쟁이 거세지면서 그가 소속되어 있던 포병탄이 남하하게 되었는데 남영철도 이를 따라 목단강을 거쳐 도문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는 1947년 2월, 도문에 진입해서 공화국이 설립될 때 까지 도문시자동차공회 조직위원회 주임 겸 도문시총공회 집행위원으로 있으면서 상당한 활약을 보였다.

당시 해방전쟁이 막바지 단계에 접어든 때라 승리의 희열을 눈앞에 둔 군인들의 혁명열조가 하늘을 찌를 태세였고 남영철은 거의 해마다 자동차공회나 총공회 선진사업일군 노동모범으로 표창을 받으며 중국 조선족의 젊은이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러다 공화국이 성립되면서 도문운수공사에서 개인차 동업 형식으로 운전기사 노릇도 하였는데 그는 매일 지정된 시간에 얽매여 정해진 구간을 달리는 기사 직업이 신물이 나도록 싫었다. 해서 1951년 3월, 기사에서 벗어나 정비업체를 운영하기로 했다. 도문에 몇 안 되는 정비업체였던지라 수입이 쏠쏠했다.

그러나 1952년 말, 중앙으로부터 새로운 이념이 하달되면서 타이어정비업체를 접고 다시 도문기계공장에 들어가 대약진 운동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 해까지 기술원으로 있었다. 그 사이 수차 시에서 조직한 당원학습반에 참가하면서 조직에 대한 갈망이 생겼고 1956년 3월 29일 중국 조선족으로 호적 등록이 되면서 까마득한 기억 속에 남아있던 고향땅을 서서히 지워버릴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댁의 따님을 주십시오" 간청에 혼인 허락

그러던 어느 날 길동군구 모범인물 표창모임에 갔다가 황정자 양을 만나게 되며 운명 같은 사랑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남쪽에서 온 사내놈이라며 거센 반기를 들었지만 이미 두 사람은 사랑의 싹이 터 주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남영철은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같은 처지의 의형제들을 거느리고 장인어른 앞에 나타나 대뜸 무릎부터 꿇고 “부디 댁의 따님을 저한테 주십시오. 하늘이 두 쪽으로 갈리는 한이 있더라도 따님만은 꼭 지켜드릴 자신이 있습니다!”라 말하며 당찬 모습을 드러냈다.

선글라스를 낀 그의 의형제들도 같이 무릎을 꿇고 “아버님, 이번만은 저의 형님의 말을 믿어주십시오! 저희들이 두 분 사랑의 보증을 서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며 허락을 구하는데 그 의형제들 속에 피복공장 이공장장도 끼어 있었다고 한다. 장인 황화순은 이 모습에 소탈하게 한바탕 껄껄 웃고 나서 그를 진짜 사내라고 인정하고는 결혼을 허락했다.

남영철과 황정자(왼쪽 황정자, 오른쪽 남영철, 가운데 있는 아기 남용운)
남영철과 황정자(왼쪽 황정자, 오른쪽 남영철, 가운데 있는 아기 남용운)

의령 남 씨 가문 24대 장손 남용운 태어나다

그렇게 조선전쟁(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대 30대 중반에 접어든 남남 남영철군과 20대 중반에 접어든 북녀 황정자양이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우연히 서로를 만나 애틋한 시간을 보내고 결혼까지 오기까지 무려 4년이라는 시간을 쏟아 결국 이렇게 결실을 맺었다.

신부 쪽은 형제자매가 꽤 많아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신랑 쪽은 신랑 본인과 의형제들뿐이었다. 하지만 워낙 포병탄 시절부터 도문자동차공회 부주석을 거치며 늘 핸들을 놓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왔던 지라 수백 명에 달하는 친구들이 하객으로 와 왁자지껄하는 통에 식장 분위기가 전에 없이 흥성흥성했다고 한다. 주변에서 예식장 분위기를 보고 사위에 대한 칭찬을 쏟아내자 딸의 혼사를 두고 언짢아하던 황 씨 어르신도 선입견을 달리 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중국은 공산당이 세력을 가져오면서 제국주의 통치를 끝내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맞이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창립은 사실상 신민주주의혁명단계가 기본으로 결속되고 사회주의혁명단계가 시작되었다는 의미였다.

이 때 국자가에는 조선민족대학이 설립되면서 화제를 불러 모았고 그들이 결혼한 이듬해 여름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되며 계속된 변화가 일어났다. 뒤이어 자치주는 항미원조, 토지개혁, 반혁명진압 등 여러 운동에서 승리를 거두며 온보적인 발전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이러한 격변의 시대에서 결혼을 한 두 남남북녀는 결혼한 그 해 의령 남 씨 가문 24대 장손 남용운을 낳았고 3년 뒤 둘째 남용해를 낳았다, 또 3년 뒤인 1957년 셋째 남용일이 태어나며 슬하에 세 자식을 두었다. (계속)

국자가의 전설
국자가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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