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느질 하나로 서민갑부된 엄마의 골 때리는 이야기
제4장 못 말리는 엄마의 유별난 이야기(2)

사진전문가 사로잡은 처세로 자녀에게 도약 기회 선사
연변조선족자치주 30주년 사진전시행사 등서 맹활약
누구든 화끈하게 돕는 ‘황재단사’...따르는 사람들 많아
뛰어난 바느질 솜씨와 넉넉한 인품 '국자가 전설' 떠올라

연길서시장 ‘왕언니’ 되다

복장점을 운영하는 내내 황정자는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쌓으며 돈독한 우애를 나누었다. 가게를 드나드는 사람들은 직위를 가진 간부부터 지식인, 노동자, 농민까지 계급 상관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그녀가 신흥복장점을 다닐 땐 외곽에 사는 농민들이 자주 찾아왔다. 그들은 본인 옷뿐만 아니라 남편이나 자식들 옷도 의뢰하곤 했다. 그녀가 체중이나 키 같은 정보만을 대충 얻어듣고 신통방통하게 딱 맞는 옷을 지어주니 감사한 마음을 담아 감자며 고구마 같은 걸 가져다주며 인사를 건넸다.

소박한 시골 아낙네들의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 그녀는 가공비용은 거의 절반으로 절충해서 받고 서비스는 최상으로 제공하느라 신경을 많이 기울였다. 게다가 살림이 어려운 사람에게는 외상을 걸어둬 가을에 돈이 생기면 그 때 갚을 수 있도록 특혜를 주기도 하는 등 넉넉한 인심을 베풀었다.

어려웠던 시기인 만큼 당연히 그 몇 푼 안 되는 외상값마저 물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타박하지 않고 살갑게 대하며 그들이 미안해 몸 둘 바 몰라 하면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라며 "힘내라"고 용기를 북돋아주곤 했다.

이런 일화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물건을 팔러 오는 김에 병원을 다녀와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면 무거운 짐짝을 복장점에 내려놓고 갔다 오곤 했다. 별의별 짐들로 복장점이 창고로 변해갔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황정자 여사(1982년)
황정자 여사(1982년)

어떤 손님은 물건을 다 팔고 가려고 시간을 지체하다가 막차를 놓치곤 했는데 지금처럼 택시가 있었던 게 아니니 밤새도록 그 먼 길을 걸어가야 했다. 그녀는 그런 사람들을 집에 데려와 재우고 다음 날 아침까지 챙겨주곤 했다.

이렇듯 넉넉하고 따뜻한 인품 때문인지 그녀 주변엔 늘 사람이 많았다. 황정자는 그 바쁜 생계 전선의 한가운데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얘기에 귀 기울여주고 참견했다. 그래서인지 서시장 바닥에서 그녀가 운영하는 ‘황재단사’하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연길서 시장 바닥에서는 ‘왕’으로 통한다는 뜻이었다.

이러한 그녀의 베풂에 사람들은 풋옥수수, 콩, 감자, 돌배 같은 걸 가져다주는 것으로 성의를 표했다. 그녀는 거기에 버금가는 사탕이나 과자 같은 걸 사서 답례를 했다.

어지럽고 팍팍한 시대였지만 받기보단 베풀고, 얻기보단 먼저 쓰는 넉넉한 삶을 원한 그녀 곁에 많은 사람이 모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소 대갈’ 황 씨 아저씨를 용서한 배포

황정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흥성흥성한 분위기를 좋아했다. 예전에 복장점을 할 때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보면 별의별 계층의 사람들이 다 있다.

미장원을 운영하는 ‘파마쟁이’ 아줌마에서 짠지장사를 하는 ‘반찬아줌마’, 빵가게를 하는 ‘빵순이 아줌마’, 인력거를 모는 삼륜차부까지 점심시간이면 도시락을 챙겨들고 삼삼오오 복장점으로 몰려온다.

그 때마다 그녀는 김치며 반찬이며 이것저것 아낌없이 내어줬고 아줌마들은 점심을 먹으며 남편과 싸운 얘기, 자식 놈들이 속 썩이던 얘기, 시누이 얄미운 얘기… 하여간 별의별 얘기들을 다 터놓는다. 그녀는 늘 그런 북적대는 분위기의 중심에 서있는 걸 좋아했다.

그렇게 자주 복장점을 드나드는 사람 중에 황 씨 성을 가진 시골 아저씨가 한 명 있었다. 그는 시장에 남새 같은 걸 갖고 와서 팔다가는 남은 게 있으면 복장점에 맡겨두고 다음날 와서는 계속 팔았다. 워낙 사람을 좋아하는 황정자는 같은 황 씨라는 공통점이 있어 그 둘은 ‘누님, 동생’하면서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맨날 계급투쟁만 부르짖는 매정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 황 씨 아저씨와 몰래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황 씨에게 투자해 송아지 몇 마리 키워 그 이윤을 반반씩 나눠가지기로 한 것이다. 당연히 사육관리는 황 씨가 전담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렇게 숫송아지 한 마리와 암송아지 네 마리를 사들여 쥐도 새도 모르게 ‘황우농장’을 열었다.

이후 2년 째에 접어들던 어느 날 황 씨가 느닷없이 소대가리 하나 둘러메고 복장점에 나타났다. 소가 갑자기 병이 들어 다 죽었다는 것이다. 한두 푼도 아니고 당시 수 백원을 투자해 연 농장인데 소가 다 죽고 대가리만 들고 왔다는 건 정말이지 분해 원통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성실하지 못한 황 씨 오라버니께 따끔하게 한 마디 하고 통 크게 일을 덮었다.

“소대가리라도 하나 챙겨줘서 눈물이 나게 고맙네. 애초에 사람 잘 못 보고 투자한 내가 소보다 더 아둔한 년이지! 아무튼 썰썰하던 차 한 끼 잘 먹겠네.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라고만 생각하게나.”

그녀는 그렇게 한 마디 하고 가져온 소대가리를 고아 먹는 것으로 일을 정리했다. 주변에서는 그 작자를 잡아다 깜방에 처넣어야 한다고 윽박질렀으나 자신의 선택이 빗나갔기에 미련을 버리는 것으로 홀가분하게 일을 마무리했다. 그 후로 그 소 대갈 아저씨는 다시는 복장점에 나타나지 않았다.

‘사업가’ 말고 ‘자선사업가’

이런 일도 있었다. 그녀가 자주 만나는 사람 중 구씨 성을 가진 아줌마가 있었는데 어느 가도에서 주임으로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녀하고는 50년대부터 교분이 있었던 분이라 친분 있게 지내는 친구였던 셈이다.

구 씨 아줌마 남편이 1969년도에 ‘하방간부’로 농촌에 내려가게 되어 그녀도 같이 시골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 당시 국가간부들이 정부에서 주는 사택에 들어 살다가 2년이 지나 그 사택이 정책낙실이 되어 다시 시가지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원래 살던 집이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간 상황이라 갑자기 엉덩이를 들일 집이 없었다.

황정자는 가족들하고 아무 상의 없이 그들 가족을 집으로 불러들였다. 그들이 갖고 온 가장집물들은 아예 창고에 넣어두고 두 세간이 50평방도 안 되는 집에서 함께 지내기로 한 것이다. 황 씨 일가 다섯 식구에 그 집 식구 다섯을 합쳐 갑자기 열 식구가 그 좁은 공간에서 비비닥거리며 지내게 된 것이다.

한 식구가 살기도 비좁은 공간인데 갑자기 인원이 배가 되니 그 불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이 집에서 늘 ‘최고지시’였으니 자식들은 잠자코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만큼 그는 주견이 셌고 남을 도와준다고 마음먹으면 끝까지 도와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몇 달이 지나고 구씨 아지미네가 다시 집이 생겨 나간 지 한 달이 되나마나했는데 이번에는 전에 연변가무단 단장으로 계셨던 조득현(1913~2002년생. 조선 평양 태생. 연변대학 예술학원 교수, 무용가) 선생의 사모님이 어머니를 찾아와 세 들어 살 집을 구해달라고 닦달하였다.

그 당시 사모님이 연변의학원 강사로 계셨는데 어머님하고는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들도 자주 그녀의 복장점에 드나들었던 단골이었다.

사모님 말대로라면 이젠 도저히 촌에서 지낼 수 없어서 한시 급히 정책락실이 되기도 전에 여하를 불문하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단은 엉덩이를 들여놓을 집구석부터 얻어야 하는데 그녀더러 나서달라고 한다.

황정자는 그들의 조급한 심정을 이해하고 그냥 그분들을 또 집에 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녀도 자식들에게 미안한지 일단은 급한 불부터 꺼야 하니 그리 할 수밖에 없다는 도리를 구구히 설명했다고 한다. 그렇게 또 두 세간이 한 가마밥을 먹게 되기도 했다.

이후 한 달이 지나 그들 일가는 황 씨 일가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20여평 되는 집을 사고 나갔다. 알고 보니 곁에서 지켜보던 그녀가 돕는 셈 치고 그 집값을 선대해 준 것이다.

이렇듯 황정자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 준 이야기는 ‘천방야담’이라 해도 전혀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그녀는 누구를 도와주면 끝까지, 화끈하게 도와주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사실 이런 얘기는 부지기수다.

황정자 여사(1982년)
황정자 여사(1982년)

피 한방울 안 섞인 알콜중독자까지 보듬어

그녀가 선의를 베푼 이야기는 소설로 쓴다 치면 장편 소설 몇 권은 되고도 남을 만큼 이야기가 많다.

당시 한승학(韩承学)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장춘에서 수리전업을 전공한 보기 드문 고급 지식인이었다. 그녀와는 예닐곱 살 아랫벌 되는 분인데 ‘문화혁명’시기 같은 ‘보수파’진영에 있었던 어설픈 인연이 있다. 한 씨는 독신숙사에 있는 사람이라 자주 그녀의 집에 들러 밥도 먹고 신세타령도 하며 그녀와 가까이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그는 지식인답게 고상하고 진정성 있는 말투를 가지고 있었지만 술에 취하면 나오는 말들은 어째 다 현실에 대한 불만만 늘어놓았다. 그녀는 그런 그가 빈 속에 술을 먹는 게 안쓰러워 안주도 볶아주며 챙겨주었지만 당연히 자주 찾아오며 푸념만 늘어놓는 그를 다른 식구들은 은근히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남 씨 형제는 그를 받아주는 그녀를 넌지시 나무람 할 때가 많았다. 그래도 그럴 때마다 그녀는 진담 반 변명 반으로 이렇게 말한다.

“나라고 그 사람이 반가워서 그리 대하겠니? ‘문화혁명’이 너무도 많은 간부와 지식인들에게 이름 할 수 없는 고통과 피해를 준 게 아니겠니? 그 아픔을 터놓고 싶은 곳이 우리 집이라고 찾아 온 건데 그걸 들어줘야지 어떡하겠니? 너희들이 조금 불편하더라도 저 아저씨 마음을 받아주는 척이라도 하려무나. 그게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니?”

생각해보니 술을 마시지 않았을 때는 아주 점잖은 사람이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놈의 술이 목구멍으로 한 잔만 넘어가면 주체를 못한다는 게 문제였다.

어떤 날엔 술을 많이 마셔 몸을 가누지도 못할 정도가 되어 황 씨 일가 집에 찾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차수가 차츰 잦아지면서 ‘알코올중독’으로 번지자 남 씨 형제들은 그를 보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에게 인심 좋게 밥을 꼭 챙겨주곤 했다. 이런 어색한 국면은 한두 해 정도 꽤나 오래 지속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한 씨가 나타나지 않아 이상해 그녀에게 그의 행방을 물으니 좋은 짝을 만나 결혼했다고 한다. 당시 한 씨의 나이는 자그마치 마흔 다섯을 넘겼다.

그의 결혼 소식을 들은 후 형제들은 한 씨 생각만 하면 어머님이 대견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그 험난한 시국에 젊은 지식인의 운명을 책임져 준 거나 다름없는 ‘쾌거’를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그녀 역시 그가 가정을 이루고 착실히 출근한다는 얘기를 듣고 기뻐했으며 형제들은 앎던 이를 뽑아버린 기분으로 덩달아 좋아했다. 그렇게 집에 술 냄새가 가셔진지 한두 해가 지났을까 하던 어느 날 한 씨가 갑자기 양손에 큰 보자기를 갖고 다시 나타났다.

한 씨를 마주친 순간 형제들은 또 골치 아픈 일이 생긴 거라고 예측하며 그를 외면했지만 여전히 그녀는 한 씨 더러 "어서 들라"며 밥을 챙겨줬다. 한 씨는 서먹서먹해 하며 밥술을 들고 그녀는 술을 따라주며 웬일로 보따리까지 챙겨가지고 왔냐고 묻는데 한 씨는 머뭇머뭇하다가 그간의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그에겐 결혼한 아내와의 사이에서 딸이 하나 있었고 세 식구가 오붓하게 한 가족이 되어 1년 넘게 살다가 어느 날 공안에서 그가 미성년강간범으로 제보가 들어왔다며 그를 잡아가 6년이라는 판결을 내려버렸다고 한다.

그는 40대 중반이 되도록 홀아비 신세로 살아 온데다가 오랜 알코올 중독자여서 그때 이미 성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는데 강간범이라니 말도 안 되는 얘기라며 억울함을 풀기 위해 기소를 진행했고 후에 법원에서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석방되었지만 출옥 후 갈 곳이 없어 이 곳에 다시 찾아왔다고 말했다.

얘기를 듣던 그녀는 원래 단위에 찾아가 사정 얘기를 해야 한다고 했지만 한 씨는 이미 공직을 떼인 상황인데다 회복한다 해도 새로운 정책 락실을 기다려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말은 즉슨 황 씨 식구 집 말고는 엉덩이를 들이 밀 곳이 없다는 얘기였다.

형제들은 우리 집이 자선단체나 여인숙도 아닌데 또 그 아저씨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니 이건 도저히 용납이 안 되었다. 게다가 알코올중독자에 감방까지 다녀 온 사람을 또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에 가차 없이 반기를 들고 나섰다.

이에 그녀는 형제들에게 “의지할 곳이 없어 찾아 온 사람을 문전박대하다니? 그다지 반가운 손님이 아닐지라도 찾아 온 사람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지. 누구를 막론하고 도와주려고 했으면 끝까지 도와줘야지. 중도에 껄끄럽다고 물러설 거면 아예 도와 나서지 말아야지!” 라 말하며 다시 또 그를 받아주었다.

이렇게 되어 앓던 이를 뽑았다고 좋아했던 한 씨 아저씨가 또 다시 우리 집에 들어 살게 되었다.

그 뒤 한 씨는 부지런히 래신래방판공실을 찾아다녔지만 정부에서 하는 정책 락실이라는 게 하루 이틀 사이에 진전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다고 무한대로 기다리자니 속이 터지는 일이었던지라 그는 여기 저기 감춰둔 술을 어떻게 알고 찾아내서 벌컥벌컥 마셔댔다.

자연히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알코올중독증은 더 심해졌고 황정자는 이대로 가다가 무슨 변고가 생길 게 뻔하다는 생각이 들어 직접 신흥가판사처 서기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다행이도 며칠이 지나 가도에서 소식이 왔다. 한 씨를 정신병원에 보내 치료를 받게 하기로 했다고 말이다. 당시엔 알코올환자를 그렇게 치료하기도 했다.

이튿날 병원에서 보낸 차가 와서 한 씨를 실어갔고 형제는 제발 이젠 이런 일이 반복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에 한 숨을 쉬었다. 그들은 은근 어머니를 원망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녀는 한 씨가 불쌍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두둔해 나섰다.

세월을 잘 못 만난데다 부모는 물론 형제자매나 일가친척 하나 없고 아내 복, 자식 복 마저 없으니 얼마나 불쌍하냐고 하며 넋두리를 했고 맛난 음식을 해가지고 그가 있는 병원에 자주 찾아갔다.

국자가의 전설
국자가의 전설

그렇게 몇 개월 지나니 그도 안정을 많이 되찾았는데 병원에선 이제 그의 의존증이 많이 호전되었으니 한 씨를 데려가라고 연락이 왔다. 그가 보호자로 그녀의 집 주소를 적어놓았던지라 어쩔 수 없이 병원에 가 한 씨를 데려왔다.

그런데 한 씨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피골이 상접해 바람이 불면 넘어갈까 무서울 정도로 허약해져 있었다. 이런 사람을 식구로 받아들였다 무슨 변고라도 생기면 더 큰 화가 불러올 수 있다고 판단한 형제들과 남편의 반대로 그녀는 문제 해결을 위해 안달이 났다.

우선 한 씨를 집에 데려다놓고는 다시 가도에 찾아가서 교섭하고 또 민정국에 찾아가 교섭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서야 민정국에서 한 씨를 요양원에 보내주기로 했다는 결론이 나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한 씨는 그냥 우리 집에 있는 게 편하다고 하면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했다.

그렇게 2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고 어느 날 남 씨 형제는 문득 한 씨 생각이 나 어머니에게 잘 지내냐고 물었다. 그리 미워하더니 미운 정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이 사뭇 어두워지며 말이 없다가 요양원에 간지 얼마 안 되어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고 말했다.

“내가 끝까지 지켜줬어야 했는데 중도에 포기했으니 일찍 간 거지…”

그녀는 꼭 한 씨의 죽음이 자신이 최선을 다 하지 못해 빚어진 결과라고 자책하고 있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에게 자신이 한 노력보다는 그의 슬픈 결말을 곱씹는 유별난 사람이었다.

비상한 머리로 선보인 무대포 ‘처세술’

그녀는 평생 학교 문을 넘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문화 정도는 논할 수준이 안 되었다. 해방이 나면서 야학에 좀 다녔고 또 본의 아니게 군에 입대해서 어섯눈이라도 뜨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군정대학 조양천교도대에 들어가 토지개혁 선전원으로 일하게 되면서 극본을 암송하고 연극에 출연하다보니 신문 정도는 읽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총기가 남다르고 머리가 빨리 도는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작은 아버지 댁에 있을 때 계집은 출가외인이라고 서당에 보내주지 않고 동생만 서당에 보내주었는데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며 동생이 외는 천자문을 줄줄 외울 정도로 기억력이 뛰어나고 머리가 비상했다.

그녀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일에 대해선 남이 뭐라든 개의치 않고 무작정 밀어붙였는데 자식들은 그런 어머니를 ‘도깨비엄마’, ‘무대포엄마’라고 얕보았다. 하지만 나중에 보면 그녀는 본인이 이루고자 하는 일은 꼭 이루어내고야 마는 그런 끈질긴 성미였다. 참말로 어이없다는 일도 그녀는 척척 해냈다.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담대한 성격에 뚜렷한 생존철학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옳다고 생각하면 벽이라도 밀고 나가는 그런 면모가 있었는데 그러다보니 때론 철면피라 할 정도로 부끄러움이라는 게 뭔지 모르고 살기도 했다.

그녀의 중국어는 하위권 수준이었지만 누구를 상대하든 의사표현에는 문제가 없다. 발음도 어순도 엉망이지만 ‘손마선’질을 해가면서라도 의사표현은 확실하게 한다. 손짓 발짓을 하면서 교류를 해도 소통이 안 되면 아예 분필로 바닥에 그림을 그려가면서라도 납득을 시킨다.

또한 누구든 고객이 될 수 있다고 판단이 들면 그 사람 비위나 취향에 맞추어 끊임없이 ‘애정공세’를 들이대 무조건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에피소드가 바로 ‘강찬혁 선생과의 이야기’다.

당시 ‘연변일보’ 촬영부 주임이었던 강찬혁 선생이 하루는 같은 부서에 사진기사로 일하는 동생과 함께 퇴근길에 양복점에 들렀는데 그를 처음 본 순간 그녀는 이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친해져두면 낭패볼 게 없다는 촉이 들자 그녀는 바로 하던 일을 제치고 술상부터 차렸다.

강찬혁(姜赞赫,1924~1995). 화룡현 덕화 태생. 1955년부터 《연변일보》사 촬영기자에 이어 미술촬영조 조장, 중국촬영학회 연변분회 비서장, 주석, 길림성촬영가협회 회원, 중국촬영학회 리사 역임. 중국 조선족촬영예술 개척자의 한 사람.
강찬혁(姜赞赫,1924~1995). 화룡현 덕화 태생. 1955년부터 《연변일보》사 촬영기자에 이어 미술촬영조 조장, 중국촬영학회 연변분회 비서장, 주석, 길림성촬영가협회 회원, 중국촬영학회 리사 역임. 중국 조선족촬영예술 개척자의 한 사람.

강 주임은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몇 잔 넘기고 나니 흥이 올라 장단을 뽑으면 그녀가 ‘얼씨구 좋다! 지화쟈 좋구나, 좋다!’ 하면서 부지런히 안주를 볶아 올렸다. 술도, 움식도 모두 귀하던 그 시대에 지나가는 나그네를 그리 후하게 대접하는 집은 국자가에서 그녀 집이 유일했다.

밤이 깊어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강 주임한테 그녀는 “다음에 오시면 제가 근사한 양복 한 벌 맞춰드리겠습꾸마. 언제든 들립소” 라며 센스 있는 한 마디를 던졌다.

그러자 워낙 신사였던 강주임은 “술을 공짜로 먹었는데 양복이야 돈 내고 지어 입어야지요. 그렇잖아도 한 벌 맞추려던 참인데 마침 잘 됐수다. 이제부터 내 양복은 황 여사 전담이요”라 답했다.

이렇게 그녀는 강주임과 인연을 맺었고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양복점에 들려 옷도 맞춰 입고 술잔도 자주 나눴다. 강주임은 잘생긴 신사스타일이었던지라 그 자체로 홍보 아닌 홍보가 되는 사람이라 은근히 양복점 홍보에도 톡톡한 값을 했다.

이 때 당시 그녀의 아들이었던 남용해 군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연변농구공장 주조차간에 배치를 받았는데 그 직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 고민하고 있었다. 일이 힘든 건 둘째 치고 먼지투성이 꼬라지 모습이 정말 보기 싫었다. 이러다가 장가나 갈 수 있을는지 미래가 걱정되었다.

남 씨 형제들은 모두 촬영기자를 하던 삼촌과 함께 자라다보니 사진기 다루는 재주가 남달랐는데 이 점을 알아보고 황정자는 강주임에게 꼬깃꼬깃 숨겨두었던 말을 넌지시 꺼냈다.

“부탁 하나 해도 되겠습둥? 우리 둘째가 사진에 애착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어디 써 줄만한 곳이 없겠습둥?” 

'국자가의 전설' 저자인 남룡해 선생이 2022년 6월 25일 중국 청도시 성양구 람해호텔(蓝海大酒店)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서 책 출간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이 출판기념회는 청도조선족기업협회, 월드옥타 청도지회, 청도조선족과학문화인협회의 공동주최로 성황리에 열렸다.(사진=주최측 제공)
'국자가의 전설' 저자인 남룡해 선생이 2022년 6월 25일 중국 청도시 성양구 람해호텔(蓝海大酒店)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서 책 출간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이 출판기념회는 청도조선족기업협회, 월드옥타 청도지회, 청도조선족과학문화인협회의 공동주최로 성황리에 열렸다.(사진=주최측 제공)

그 소리를 옆에서 듣고 남 군은 자신의 앞 일을 생각한 어머니께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머니가 놓은 덫에 강 주임이 꼼짝 못하고 걸려든 것에도 놀랐지만 강 주임은 어쩐지 발뺌하려는 눈치가 아니었다. 

“어허, 룡해 그놈이 사진 감각이 남다르지유, 내 그 얘기 허투루 들어두지 않을 거니 어두 두고 봅시다!”

이렇게 무대포 어머니의 처세술덕에 남 군은 강주임의 소개로 위 선전부에서 주관하는 자치주창립 30주년 사진전시행사 주비처에 들어가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진짜 사진기를 멘 카메라맨이 된 것이다.

당시 대형촬영행사들도 많았는데 그게 열정을 가진 그에게 끼를 펼쳐 보일 수 있는 도약의 기회로 다가왔다. 행사를 마치고 그는 정식으로 연변력사연구소에 사진편집으로 초빙되면서 그렇게 원했던 카메라를 만질 수 있는 기회가 차려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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