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느질 하나로 서민갑부된 유별난 엄마의 골 때리는 이야기
제3장 사랑의 로맨스(1)

피복공장 모범 ‘황정자’와 도문자동차공회 모범 ‘남영철’
무대 올라가 표창장 받는 두 사람 보고
피복공장 공장장이 "잘 어울린다" 오작교 역할
남남북녀 로맨스 시작...예비장인 반대에도 혼인 성사

'남남북녀' 황정자와 남영철.
'남남북녀' 황정자와 남영철.

180cm 큰키에 운전 잘하고 노래 잘 부르는 '남영철'

성실하고 손끝 야무지고 이쁘장한 '황정자'

황정자는 성실한 근무태도와 뛰어난 바느질 솜씨로 피복공장 모범으로 뽑혀 1947년 길동군구 산하 모범인물 표창대회에 참석했다. 당시 도문자동차공회의 모범으론 ‘남영철’군이 뽑혔는데 이렇게 두 남녀의 운명적 만남이 시작되었다.

당시 제3차 국내혁명전쟁(1925년~1927년)으로 국민당과 공산당 간에 항일전쟁(중일전쟁) 승리의 과실을 두고 서로 세력 간 줄다리기를 하는 시기였는데 투쟁의 정점이 동북 근거지를 공고히 하느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싸움 속에서 황정자와 남영철 두 사람 모두 군 후방에서 한 몫을 하는 인물로 각광을 받다보니 그들의 만남은 실로 의미가 남달랐다.

피복공장 이공장장은 무대에 올라가 표창장을 받는 두 사람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다 이거야말로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하며 두 사람의 오작교 역할을 자처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공장장은 남영철하고 소싯적부터 한 동네에서 함께 지내온 동무였고 남영철군에게 늘 공장에서 손끝이 가장 야무지고 이쁘장한 처녀를 소개해준다고 희떠운 소리를 흘렸었는데 마침 무대에 올라 나란히 표창장을 받는 두 사람을 보는 순간 하늘이 정해준 운명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이었지만 황화순은 두 사람의 혼인을 반대했는데 신랑의 나이가 무려 11살이나 위였고 사윗감이 남쪽에서 왔다는 이유 때문에 강경하게 남영철을 반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황정자는 이미 남영철에게 마음이 쏠려 있었다. 키는 180cm가 넘을 정도로 훤칠하고 이목구비 의젓해, 운전도 할 줄 알아, 심지어 옛 노래도 간드러지게 잘 부르는 멋쟁이였던 그에게 이미 완전히 빠졌던지라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사랑이 커져가고 있었다.

게다가 남영철 역시 삼십 대 중반을 훌쩍 넘긴 나이였던지라 더는 이 만남을, 결혼을 미룰 수 없어 거센 반대에도 물러설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워낙 과격한 성격의 예비 장인어른께서 거세게 반대를 하니 두 사람의 고민도 깊어져 갔다.

남영철(맨 오른쪽)이 중국 하얼빈에서 운전기사로 일하던 시절.
남영철(맨 오른쪽)이 중국 하얼빈에서 운전기사로 일하던 시절.

나이 차이 많고, 남쪽서 왔다며 예비장인이 반대

황 씨 어르신이 불같이 반대한 상황과는 다르게 남쪽에서 온 남자 ‘남영철’은 황 씨 네 집과 시조의 뿌리가 사뭇 닮아있었다.

그는 의령 남 씨 23대 장손이었는데 ‘의령 남 씨’와 황정자의 뿌리였던 ‘남원 황 씨’ 모두 그 시조가 중각의 한나라나 당나라에서 사신으로 파견되어 인근 국에 다녀오던 중 풍랑을 만나 조선 반도에 정착하며 그 씨족(氏族)이 형성되었다.

게다가 두 씨족 모두 조선반도에서 중국으로 건너 온 시간도 비슷하고 북만을 무대로 살아온 파란만장한 가족사도 비슷했다. 거기에 두 주인공 모두 본의 아니게 군에 입대해 중국공산당이 주도하는 토지개혁의 선줄꾼이 되어 활약했고 해방전쟁 전선원호라는 같은 맥락에서 볼 때 두 사람은 군복을 입지 않는 후방에서 동고동락해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러한 공통점이 끈이 되어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졌지만 안타깝게도 남과 북의 정치적 이념 차이로 3.8선이 그어지면서 두 사람의 사랑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었다. 이 장애물은 현재까지도 이어져 같은 민족의 동질성을 공유하지 못하는 벽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현실은 ‘남남북녀’(남쪽은 남자 인물이 잘났고 북쪽은 여자 인물이 아름답다)라는 말을 만들었는데 어찌 보면 안타까운 현재의 모습을 설명하는 얘기인 듯 하다.

경성에서 자동차운전면허를 따고 남긴 남영철의 기념 사진
경성에서 자동차운전면허를 따고 남긴 남영철의 기념 사진

'운전 배우면 돈 벌 수 있다' 판단 서울서 면허 취득

자동차 많다는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 진출

‘황정자’의 마음을 앗아간 남쪽 사내 ‘남영철’은 1917년 4월 10일(음력) 충청북도 청주시 강서 2동 남촌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조선이 이미 일제 치하로 넘어가 황민화 교육이 실시된 지 시간이 제법 지난 때였다.

남영철은 마을 서당에 들어가 한글을 배우고 천자문도 익혔지만 서당공부를 마친 후엔 황민화교육으로 인해 일제 치하의 국민우급학교에 들어가 일제식 교육을 받게 되었다.

넉넉하지 못했던 형편 때문에 그는 일찌감치 학업을 포기하고 농사일에 전념했지만 농사에 매달려선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해서 일단은 강서면에 있는 일본어학당에 가서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일본어를 익히고 난 후엔 수산물 시장을 거쳐 제과점 노동자로도 일을 하며 운명의 방향을 바꾸는데 힘을 썼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그를 비켜갔다. 그가 제과점 점원으로 있던 시절 독일 베를린에서 제 11회 하계 올림픽이 열렸는데 조선인 손기정 선수(당시 11살)가 마라톤 경합에 나가 2시간 29분 19초라는 신기록을 달성하면서 챔피언을 따낸 것이다. 당시 조선인으로서 최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된 것이다. 그것도 세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생 초짜 신인이 말이다.

온 나라가 기뻐할 경사였지만 시상식 게양대에는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가 오르고, 애국가가 아닌 일본국가가 연주되면서 손 선수는 물론 온 나라가 심연에 빠져들었다. 이튿날 동아일보는 일장기를 없앤 손 선수의 사진을 실어 통분함을 호소했고 그것이 당시 열혈 청춘들에게 민족의 혼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남영철 역시 일제 치하의 학교를 다니면서 달리기선수로 활약해왔던지라 손 선수의 모습을 보며 격분을 금치 못했고 나라가 주관을 잃고 우왕자왕하는 모습을 실감하며 조선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살아가려면 기술이 있어야 하는데 당시 남영철은 내세울만한 기술이 아무것도 없었던지라 그는 진로 선택을 두고 제법 긴 방황을 거치다 운전기사 자격증을 따기로 결심했다. 운전만 할 줄 안다면 돈도 벌고 가문도 살릴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렇게 1939년 3월부터 한 달간 서울에 있는 경성자동차학교에 들어가 자동차 정비 및 운전면허 공부에 전념했고 고생 끝에 면허를 취득했지만 운전할 자동차가 없던 현실에 또 한 번 실망하고 말았다.

손기정(1912~2002). 국제올림픽 메달리스트. 조선 신의주의 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남. 어려서 달리기를 비롯한 스포츠 경기에 재능을 보임. 조선인 최초로 일제 강점기인 1936년에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대회에서 금메달 획득.
손기정(1912~2002). 국제올림픽 메달리스트. 조선 신의주의 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남. 어려서 달리기를 비롯한 스포츠 경기에 재능을 보임. 조선인 최초로 일제 강점기인 1936년에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대회에서 금메달 획득.

3.8선에 막혀 고향 남녘으로 돌아오지 못해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경성바닥은 자동차를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적었던지라 무경력자인 그에게 핸들을 맡길 업체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 그에게 누군가 자동차를 몰려면 만주국의 수도인 신경(신징) 아니면 하얼빈쯤은 가야 한다고 귀띔해주었다. 그래서 남영철은 자나 깨나 탈출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집안 어른들끼리 상견례를 진행해 이웃마을에 사는 한 여인과 혼인을 하게 되면서 본의 아니게 한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남 씨 가문 장손인데다 가장까지 되고 아내가 임신까지 하게 되면서 돈을 많이 벌어와야겠다는 생각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갔고 그렇게 탈출 계획이 무르익어갔다.

그러던 1939년 경성 시내 운수업체를 다 돌아다니며 면접을 보러 다니는데 아내가 딸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기술은 있지만 취직은 안 되고, 거기에 식구까지 늘어나니 앞이 막막하다는 생각이 덮쳐왔다.

덮쳐온 생각은 그렇게 행동으로 이어졌다. 남영철은 홧김에 집에 돌아가지 않고 막무가내로 중국 북간도로 건너오게 되었다. 일단은 만주 땅을 밟자는 생각이었지만 어찌보면 현실도피였던 셈이다. 그 때 그의 나이 22살이었다. (계속)

국자가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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