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갈림길 끝 도착한 난민수용소

1945년 11월 어느 날 새벽 5시 경. 쓰러질 힘조차 없는 몸을 이끌며 황 씨 일가는 연길역에 당도했다. 땡전 한 푼 없는 처지에 인력거를 부를 엄두도 못 내고 기진맥진한 몸으로 거의 반은 기다시피 하며 시가지 쪽으로 향했다.

그 당시 연길역에서부터 하남다리까지는 지금의 신문청사 로타리 부근이 제정 때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운수공사 자리였는데 황 씨 일가는 그 곳 길 위에서 풀썩 쓰러졌다. 누구 하나 일어날 생각을 못했다.

마침 그 곳을 지나던 청년이 이게 무슨 짓거리들이냐며 호통을 치며 일어나라고 난리를 피웠다. 그 청년은 훗날 조선을 건저가 청진시 시장을 지낸 ‘리희일’이었다.

그는 황 씨 일가에게 자신은 청년동맹 동맹원이라고 소개하며 청년동맹은 공산당이 이끄는 조직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보살필 의무가 있다고 소개했다. 일가 중 그래도 의지력이 강한 황화순이 정신을 차리고 사정 얘기를 하자 그는 자신을 따라오라고 하며 길을 안내했다.

그의 뒤를 따라가 도착한 곳이 바로 지금의 연변대학 정문 옆 접수실 부근에 위치한 일본인 난민수용소였다.

이미 그 곳엔 수백 명에 달하는 일본인 난민들이 모여 있었다. 대다수가 아낙네 아니면 아이들, 일부는 부상자들과 노약자들도 있었다. 전쟁의 폐허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그 곳에서 황 씨 일가는 그저 지친 몸을 그 인파에 맡겨 눈꺼풀을 감았다. 주위를 살필 겨를도 없이 몇 시간 내내 숙면을 취하고 나서야 다들 겨우 눈을 떴다.

눈을 뜨고 나니 수용소에서 고량죽을 준다고 해 밖에 나가 줄을 서 그 멀건 죽을 나뭇가지 꺾어 만든 젓가락으로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그렇게 황 씨 일가는 엉덩이를 들여놓을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 당시 중국 공산당에서는 중일전쟁(항일전쟁)의 승리의 여파에 이어 풍요로운 자원을 가진 동북을 차지하기 위해 소련과 미국 등의 세력과 ‘누가 먼저 동북을 차지하는가’로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로써 중국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갈림길이 놓이게 되었는데 첫 번째 갈림길은 장제스(장개석)를 수장으로 한 국민장은 대지주와 대자산계급이 통치하는 독재정권을 수립하는 길을 따르는 것이었고 두 번째 갈림길은 새로운 인민주의 국가를 세우려는 민주 연합정부의 설립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운명의 갈림길 중 어디를 선택해야 하는지는 중국인뿐만 아니라 조선인들 역시 선택해야만 하는 과제였다.

본격적인 기회를 노리다…교도대 입대 지원

여기서 중요한 건 황 씨 일가에게 도움을 준 ‘리희일’ 청년의 소속이 청년동맹이라는 것이고 이 청년동맹이 민주동맹의 입장이라는 것이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어느 정권이 좋고 나쁘고 판단하고 가늠할 겨를조차 없이 황 씨 일가는 두 번째 갈림길에 설 수 밖에 없었다.

민주동맹 산하에는 저격산처리위원회가 설립되어 일제와 그 주구들의 재물을 걷어 인민대중들에게 나눠주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황 씨 일가 중 어린 나이임에도 약삭빠르던 황신애의 동생 ‘황범송’은 리희일의 소개로 청년동맹에 들어가게 되면서 위원회의 심부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황범송이 공원 안에 세워진 일제 앞잡이 김동산의 동상을 넘어뜨려 저격산위원회 변소에 처넣고 도흥은행과 길동은행 장부를 봉쇄하라는 임무를 맡아 실행하던 중 보험공사 건물 안에서 멋진 양복차림에 선글라스를 낀 청년 ‘문정일’을 만나게 되었다.

문정일은 늘 멋진 차림에 사진기를 휴대하고 다녔는데 그게 끈이 되어 금강사진관 학도로 있는 황범송과 만나는 기회가 잦아졌다. 문정일이 찍은 사진을 황범송이 인화해주었기에 두 사람은 본의 아니게 꽤나 친하게 지냈다.

그는 황 씨 일가가 연길역에 온 시기와 거의 비슷하게 조선의용군 연변판사처를 설립했다. 뒤이어 조양천에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교도대를 설립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면서 황신애는 드디어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그녀는 무작정 거리로 뛰어나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가서 동정을 살피고 현 시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면밀히 파악하면서 자신의 출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1945년 당시 국자가(연길역)는 꼭 조선인들 세상이었다. 역사적인 한 해였던 만큼 집회도 행사도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건 바로 ‘토지 개혁’이었다. ‘밭갈이하는 자에게 땅을 준다’는 공산당의 토지정책이 하달되면서 신애는 이거야말로 살맛나는 세상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어느 날 공원다리를 지나다 사람들이 몰려있어 호기심에 뛰어가보니 팔로군과 조선의용군은 피를 나눈 한 집안이라고 하면서 일면 팔로군이 백성을 사랑하는 ‘3대 규율 8항주의’에 대해서도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었다.

우리말을 하는 지역에서 우리의 군대가 자기들의 조직을 만들어놓고 서민들을 보호해주고 그들과 한 마음 한 뜻임을 피부로 느끼자 신애는 여하불문 그 조직에 가담하고 싶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곧장 교도대 입대 지원을 위해 책임자를 찾아갔고 마침 대원확충사업을 추진중에 있어 신애는 간단한 면접을 본 뒤 바로 등기부를 받았다.

‘황신애’가 ‘황정자’로… 새 이름 새 출발

신애는 그 전까지 학교 문도 넘어보지 못했던지라 난생 처음으로 등기부에 자신의 이름자를 적게 되었다. 그러나 ‘황신애’라는 애명을 적어 넣을 수는 없고 그렇다고 호적에 등록되어 있는 남자 같은 이름 ‘황신학’도 적고 싶지 않았다.

지긋지긋했던 지난 날의 삶을 지워 버리고 새 이름으로 새 출발을 하고 싶었다. 그렇게 입대 등록부에는 황신애도 황신학도 아닌 ‘황정자’가 적혔다. 그 때부터 황정자가 새롭게 나타났다.

격변의 시대에 입대한 황정자의 가슴은 혁명에 대한 열정으로 한껏 부풀어 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연변판사처 주임 문정일과 조선의용군 5지대의 정위와 사령원 등이 시도 때도 없이 교도대에 찾아와 신입들에게 격정에 넘치는 형세 보고를 하였다. 오로지 공산당을 따르는 길만이 조선민족을 구하고 나라의 독립을 이루어내는 광명한 길이라고 말이다.

황정자는 교도대 산하에 있던 선전대 산하 연극조에 편입이 되어 의무선전원을 하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 전선원호사업을 하는 한편 전사들의 사기를 북돋는 선동 역할을 수행했다. 연극조는 짬만 있으면 토지개혁에 대한 선전도 함께 했던 지라 그들을 보고 ‘토지개혁선전대’라고 부르는 이도 있을 정도였다.

연변은 항일전쟁시기 항일유격대가 비교적 활발히 활동했던 곳이고 조선족군중속에 공산당조직이 지속적으로 존속해있었기에 군중토대가 좋았다. 이러한 믿음직한 군중조직과 당 조직이 뒷받침되어 조선의용군의 병력은 나날이 확충되었다.

뜨겁게 불타던 격정의 시대와 군중 속에 그저 부엌데기 삶을 살던 18세 소녀 황정자가 끼게 되었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혁명 열정으로 불타올랐을지 가히 짐작이 간다. 세상을 다 얻은 기분으로 매 하루하루를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