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느질 하나로 서민갑부된 유별난 엄마의 골 때리는 이야기
제2장 국자가에서의 재도약(2)

야무진 바느질 실력으로 방직노동자 대표까지
모임을 통해 사람을, 세상을 넓혀가는 ‘황정자’
황 씨 일가 전원…각자의 능력으로 개척한 삶

바느질로 넓혀간 입지 그리고 인연

예로부터 세간에 우리 민족 여성들은 손끝이 야무지기로 알려져 있었다. 특히나 어떤 걸 먹었는지는 티가 나지 않지만 어떤 옷을 걸쳤는지는 보다보면 그 바느질 솜씨가 금방 티가 나기에 입보다 의복의 중요성을 더 강조하는 경우도 있었다.

‘황정자’는 이러한 바느질 솜씨에 가히 으뜸인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손끝이 워낙 야무지기로 소문난 그녀의 어머니 슬하에서 바느질을 배우다 보니 그 기질을 그대로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께서 일찍 돌아가신 상황이라 황 씨 집안을 먹여 살리기 위해 어린 나이부터 작은 손을 부지런히 움직여 살림을 떠안았다.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교도대 시절의 황정자(앞줄 맨 왼쪽, 1946년)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교도대 시절의 황정자(앞줄 맨 왼쪽, 1946년)

온 집안 식구들의 해진 옷은 물론 양말이며 속옷까지 빨고 꿰메는 일을 밥 먹듯 하며 살았기 때문인지 대충 하는 거 같아 보여도 신통방통한 바느질 솜씨를 뽐냈다.

그녀가 국자가 입적 후 일 년도 채 안 되는 1946년 5월 길림성위, 성정부, 성군구가 길림에서 연길로 이전해오면서 길동군구 후근부에서 주관하는 피복공장도 연길로 이전해 왔다. 그 찰나 교도대 산하의 선전대가 길동군구에 편입이 되면서 그녀는 군구 산하 피복공장에 들어가게 되면서 의무선전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녀는 군복을 입고 총을 쏘는 군인은 아니었지만 재봉틀에 마주 앉아 조국을 지키는 군인들에게 옷을 지어주는 일을 한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가졌다.

게다가 뛰어난 바느질 솜씨를 물려받아서인지 바느질에 남다른 애착도 같이 갖고 있던 그녀는 군인이 되어 나라를 위해 좋아하는 봉제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에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을 느꼈고 야무진 솜씨로 소문까지 나면서 입사한 그 해 모범으로 당선되었다.

황정자는 피복공장에서 새롭게 군복을 짓는 봉제기술을 익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긍정적이고 노력하는 모습과 재봉침을 능란하게 다루는 기능공의 실력을 인정받게 되면서 계속해서 선진사업자, 노동모범으로 뽑혔고, 공장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차간 주임으로 승진까지 하게 되었다.

승진하고 나서도 황정자는 길동군구 방직노동자 대표의 신분으로 1947년 1월 25일에 처음으로 열린 노동자대표대회에 참석하는 등 남다른 행보를 보였고 이러한 모습이 모범이 되어 표창을 받게 되었다.

표창 모임을 통해 황정자는 노동자업계의 수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총공회의 박주석, 연길시 자동차수리공장의 지공장 등 여러 사람을 만났다. 그 중에서도 당시 도문시자동차공회의 모범으로 회의에 참석한 남영철이라는 자는 훗날 그녀의 남편이 된다.

같은 해 3월 방직운동을 호소하는 방직동원대회가 연길에서 열렸는데 방직노동자업계의 모범이었던 황정자는 이번에도 대표로 회의에 참석하였다. 이렇게 황정자를 포함한 연변의 부녀들은 보이지 않는 후방에서 땀 배인 노력을 기울였고, 이러한 노력이 동북해방전쟁에 기꺼이 한 몫을 차지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두어야 한다.

다시 잡은 바느질…새로 배운 기술

그렇게 바느질로 계속해서 길을 만들어 갈 줄 알았던 황정자에게 갈림길이 찾아오게 된다. 방직일이 아닌 간호사로 발령을 받게 된 것이다.

1948년 3월에 길림성위와 성정부 및 길동군구가 다시 길림으로 옮겨가면서 피복공장이 잠시 해체됨과 동시에 심양군구 산하 223병원이 연길에 오게 되면서 그녀는 본의 아니게 그 병원 간호사로 들어가게 되었다.

간호사로는 아무 경력이 없었던지라 앞으로의 길에 대해 망설였지만 다시 연변군분구 산하에 피복공장이 들어오게 되면서 다시 바느질과의 연을 이어가게 되었다. 거기서 그녀는 중국옷을 만드는 기술을 익혔는데 군인들이 입는 군복은 물론 중산복과 개량양복을 만드는 기술도 익혔다.

일반 양복은 자산 계급의 물건이기에 선호되는 분위기가 아니었지만 개량양복은 기존 양복과 다른, 새롭고 혁명적인 느낌을 준다는 점에서 그 느낌이 달랐다. 황정자는 흔히 ‘레닌복’이라고 불린 개량복을 잘 지어 주변에 소문이 나기도 했다.

국자가에서의 삶…물 만난 황 씨 일가

황 씨 일가는 국자가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며 물 만난 물고기처럼 각자 자신에게 맞는 일터를 찾아나갔다. 살맛나는 세상이 찾아온 것이다.

앞서 소개했듯이 딸 황정자는 길동군구 산하 토지개혁 선전대원에 이어 피복공장 봉제일군으로 실력을 뽐냈고 집안 꼬맹이 취급이던 황범송은 청년동맹 소속원이 되어 저격산처리위원회로 활약했다.

그렇다면 황 씨 가문의 모험가 ‘황화순’은 어떻게 자신의 앞길을 찾아갔을까?

어느 날 그는 사진에 애착이 큰 황범송의 장래를 두고 걱정하다 당시 국자가에서 금강사진관을 운영하는 김몽훈 선생을 찾아갔다.

김몽훈(1908~1974). 조선 함경남도 함흥 태생. 일본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연길에 돌아와 "금강사진관"과 "유림상사"를 경영하면서 많은 학도들을 양성. 훗날 공사합영사진관과 국영사진관에서 조선족촬영예술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마멸할 수 없는 기여를 함.
김몽훈(1908~1974). 조선 함경남도 함흥 태생. 일본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연길에 돌아와 "금강사진관"과 "유림상사"를 경영하면서 많은 학도들을 양성. 훗날 공사합영사진관과 국영사진관에서 조선족촬영예술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마멸할 수 없는 기여를 함.

워낙 불같았던 성격의 황화순은 김 선생을 만나 아들이 가진 사진에 대한 애착부터 시작해 본의 아니게 자신의 지나 온 경력까지도 구구절절 소개를 이어갔는데 김몽훈은 아들보다는 아버지의 경력에 호감을 내비쳤다. 이를 계기로 아들을 학도로 받아주기로 하고 대신 황화순에게 ‘유림상사’ 운영에 대한 얘기를 건넸다. 유림상사는 금강 사진관의 무역 실체였다.

김몽훈은 황화순에게 연변에서 생산되는 화건종담배를 걷어 들여 할빈담배공장에 보내주는 소일거리를 제안했는데 당시 비상시기였던 만큼 연길엔 담배 공장이 없었고 할빈에만 담배공장이 가동외어 있는 상황이었기에 수입이 쏠쏠한 아이템이었다.

황화순은 쪽지게에 화건종담배를 한가득 지고 역에 나가서는 할빈담배공장에 보내곤 하였는데 나중엔 밀린 잔금도 받을 겸 아예 기차를 타고 할빈을 오가면서 장사품목을 넓혀나갔다.

한 번 나갈 땐 말린 잎담배를 한 가득 지고 떠났는데 나가서는 밀린 돈까지 받아가지고 오다보니 항상 주머니가 두둑했다.

워낙 활동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던지라 그 돈을 그대로 고이 들고 오지 않고 돈을 굴릴 생각을 하던 그는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사가지고 연길에 와서 팔아보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당시 광복 초기였던지라 모든 물자가 부족했기에 할빈에선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의복들이 사방에서 헐값으로 팔리고 있었는데 황화순은 그걸 떠리로 사다가 국자가에서 괜찮은 가격으로 팔기 시작했다. 물자가 많이 부족했던 그 세월 수입은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황화순은 서시장 부근에 잡화점도 차리고 살림집도 장만하게 되었다.

이렇게 황 씨 일가는 각자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해 국자가에서 생활의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계속)

국자가의 전설
국자가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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