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느질 하나로 서민갑부된 유별난 엄마의 골 때리는 이야기
제6장 개혁개방의 봄바람 타고(1)

풍진 세상과 맞서 싸운 어머니 ‘황정자’…꿈을 이룬 ‘승자’
한국에 두고온 가족과 상봉한 아버지 ‘남영철’

기회는 ‘오는 게’ 아니라 ‘잡아오는 것’

70년대 말에 접어들면서 황정자의 집 앞 거리가 보행로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워낙 비즈니스에 촉이 있던 그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가정집을 영업집으로 개조해 고가로 세를 주었다.

가정집이 영업용으로 용도가 바뀌다보니 집값도 껑충 뛰어올랐다. 그녀는 높은 가격대로 집을 팔아버리고 그 돈으로 다시 그 부근에 있는 더 쾌적한 아파트 한 채를 사들였다. 거기에 확장 공사까지 진행해 남씨 형제들은 ‘독집’ 같은 공간에서 활보하며 살게 되었다.

남 씨 형제들은 그 집에서 대학에 붙어 장성 안팎으로 뻗어나갔다. 큰 아들은 안상강철대학에, 둘째는 강서대학, 셋째는 1980년에 중산대학 일본어학부, 막내는 연변대학 의학원에 붙었다. 그 당시 연길시내 인구가 30만 명을 웃돌았는데 한 가문에서 네 아들이 다 대학에 붙어갔다는 건 희한하리만치 이슈가 되는 특종뉴스였다.

의젓한 대학생이 된 남씨네 4형제
의젓한 대학생이 된 남씨네 4형제

돌아보면 그녀는 참으로 원견성이 있는 여장부였다. 1958년도 도문에서 세 자식을 거느리고 새끼들을 대학에 보내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이사를 강행한 용기와 추진력, 온갖 노동에도 굴하지 않는 정신력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었다.

그녀는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겠다는 꿈 하나만을 위해 바느질과 연을 맺어 바늘로 세상 풍파와 격변의 시대에 맞섰고, 자신의 모든 걸 걸고 싸웠다. 그리고 승리했다. 그렇게 자신의 소망을 이룬 내 어머니 황정자 여사는 승자의 기분으로 만년을 즐기셨다.

50년 만에 접한 서울 따님 소식

중국의 대외개방이 가시화되면서 중한관계의 물고가 서서히 트이기 시작했다. 그 즈음 황정자의 남편이자 내 아버지였던 남영철은 서울에 두고 온 혈육 생각에 밤마다 뒤척거리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살벌했던 문화대혁명을 경험한 공산당원으로서 정치적 이념이 갈린지 오래된 상황속에 가족을 찾아나설 용기가 선뜻 나지 않아 계속해서 망설이고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한 셋째 남용이 KBS(한국방송공사)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에 아버지의 사연을 적어 보냈다.

동족상잔의 아픔이 빚어낸 가슴 쓰린 사연을 접한 KBS는 그 후 의령 남씨 가족의 가슴 아픈 사연을 여러 번 방송해 주었다. 방송이 전파를 타며 연이 닿아 한국에 있는 가족들로부터 편지가 날아들어왔다.

편지엔 문안인사에 이어 가족들이 혈혈단신으로 중국으로 건너 간 아버님을 얼마나 그리워하면서 지냈다는 가슴 쓰린 사연이 적혀 있었다. 아버지의 여러 조카들이 방송을 듣고 이제는 하루 속히 만나서 그간의 그리움을 빨리 나누고 싶다는 구구절절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렇게 한국에 사는 아버지의 친척들을 찾게 되면서부터 다년간 베일에 가려져있던 우리 가족의 뿌리를 하나하나 파헤쳐 보게 되면서 중국으로 올 때 이미 결혼한 몸이었으며, 슬하에 따님이 있었고, 남북 이념이 갈리면서 연락이 두절되었다는 사연까지 다 알게 되었다.

장장 5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에야 아버지는 그때 한국에 두고 온 가족의 행방을 알게 되었고 그 때 태어난 따님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노 씨’가 된 딸과 극적 상봉...김포공항 울음바다

1988년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는 그해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서울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아버지로 말하면 반세기만에 지척에 두고 온 고향 땅을 다시 밟게된 것이다. 그렇게 김포국제공항에서 아버지와 서울누님의 운명적인 상봉이 이루어졌고 아버지와 딸은 인산인해를 이룬 인파 속에서 난생 보지도 못한 혈육을 몇 십 미터 밖에서 알아봤다고 한다.

서울누님은 아버지를 알아본 순간 아무 거리낌이 없이 뛰어가 품에 안겼다고 한다. 아버지도 마찬가지로 먼발치에서 뛰어오는 중년여인이 따님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봤다고 한다. 두 사람은 반세기만에 만나 서로 부둥켜 안았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이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삽시간에 김포공항 출구가 울음바다로 변해 버렸다. 만 50년만이었다. 아버지는 시종 남쪽에 두고 온 고향을 그리워했고, 이름도 모르는 딸을 사무치게 그리워했다. 이제야 알게 된 서울 누님의 이름은 노경선(卢敬善)으로 아버지가 남 씨 였지만 노 씨가 된 사연에 대해 얘기했다.

당시 한국은 법적으로 아버지 없는 자식은 출생신고가 불가능해 호적에 올리지 못했기에 젊은 나이에 ‘청상과부’가 된 서울어머니는 오매불망 중국으로 간 남편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셨다고 한다.

그러다 남과 북이 분단되며 모든 것이 두절되었고 그 와중에 우연히 같은 촌에 살다가 병으로 명을 달리한 계집아이가 있어서 그 아이의 이름으로 늦게나마 호적에 이름을 올리게 되면서 남 씨가 아닌 노 씨로 호적에 오르게 되었다고 한다.

반백살이 되어 처음으로 친아버지를 만난 서울누님의 응석을 어색하게 받아주는 아버지
반백살이 되어 처음으로 친아버지를 만난 서울누님의 응석을 어색하게 받아주는 아버지

"아버지 찾아 함께 뛰라" 쪽지...설움에 엉엉 울어

언젠가 서울누님께서 자신의 지나 온 동년의 추억을 터놓으면서 이런 얘기를 들려 준 적이 있다.

“국민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학교 운동회가 있었어요. 달리기선수로 출전하게 되었는데 체육선생님이 그 번 달리기 종목 규칙에 대해 설명하는데 울지도 웃지도 못할 일이 생긴 거지요. 호르래기 소리와 함께 30메터 앞으로 뛰어가서 제비꼬리 형으로 접은 종이쪽지를 펼쳐보고 그 쪽지에 씌어진 요구사항대로 종착점에 도착하면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뛰어가서 잡은 쪽지에 뭔 내용이 적혀있었는지 아세요? 하필이면 그 찰나에 객석에서 ‘아버지를 찾아 함께 뛰세요.’라는 글발이 적혀있었지 뭐예요. 맙소사! 순간 아찔해나면서 눈앞이 캄캄해졌어요. 뒤이어 설음이 욱 하고 북받치면서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지요. 이 순간 어디 가서 아버지를 찾아온단 말이지? 저는 그저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었어요. 영문을 모르는 선생님들이 달려와 달래주었어요. 그들도 나의 손에 쥐어진 쪽지를 들여다보고서야 사실의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지요.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살아 온 저에게, 그것도 아버지 성씨조차 사용할 수 없었던 저에게 하필이면 이 난감한 숙제를 주어 풀어보라고 하니 이 얼마나 코 막고 답답한 일이였겠어요. 아무리 눈물을 참으려 애써도 도무지 참아지지가 않았어요. 그날 저는 얼마나 울었는지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두 눈이 퉁퉁 부어있었어요…”

분단이 죄없는 소녀 마음에 고통과 슬픔 안겨

환갑잔치에 온 서울누님과 기쁨에 겨워 향수에 젖은 노래를 부르는 아버지
환갑잔치에 온 서울누님과 기쁨에 겨워 향수에 젖은 노래를 부르는 아버지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서울누님은 거의 웃음을 잃고 살아왔다고 한다. 분단의 아픔과 민족의 분열이 죄 없는 한 소녀의 마음에, 무고한 가정에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안겨주었다는 것은 우리 모두 반드시 기억해야 할 아픔이다.

국자가의 전설
국자가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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