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느질 하나로 서민갑부된 유별난 엄마의 골 때리는 이야기
제1장 남원 황 씨 풍운사(2)

(고급 촬영기사 황범송 선생이 전하는 눈문겨운 가족사)

송눈평원으로 가다

지난 세월이야 어찌 되었든 이제 황화순은 부득이 식구들을 거느리고 그 곳을 떠나야만 했다. 울며 겨자 먹기이긴 하나 이미 빈털터리가 된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도 없었고 동정하는 사람은 더구나 없었다. 그저 어리석은 놈이 싱거운 짓거리를 하다가 어정쩡하게 당했다고 뒤에서 쉬쉬거릴 뿐이었다.

그러던 차 일제 치하의 만몽회사가 치치할의 태래현 쪽으로 조선인 집단이민을 강행하게 되었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이 가시화되면서 강압적인 흡수통합정책인 창씨개명, 강제징병, 공출제 실시, 집단이민 등 강압정책을 실시하였다. 태래현 집단이민 역시 이런 맥락에서 실시되었다. 

태래현 하면 동북평원의 막 끝인 송눈평원 지역이다. 황화순은 애초에 영안지역을 벗어나려고 작심했던 터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가솔들을 거느리고 그 이민행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당시 200여 호 되는 집단이민군단이 조직되어 1, 2, 3, 4반으로 편성이 되었는데 황 씨 가족은 4반에 편성이 되었다.

영안 일대에서 떠난 이민행열은 목단강지역을 지나 할빈을 거쳐 치치할 지역에 이르는 사이 트럭도 타고 마차도 타고 기차도 갈아 타고 하면서 별의별 고생을 다 하였다. 

추운 겨울날 길가에서 풍찬노숙하면서 밤에 낮을 이어 장광재령을 넘어, 송화강, 마익강을 지나 아득히 펼쳐진 말로만 들어오던 동북평원의 한 끝, 송눈평원에 이르는 길은 말이 아니게 지루하고 고달팠다.  그때가 1941년 겨울이었으니 황신애 나이가 고작 13살이다. 

일제의 집단이민행렬에 끼여 태래현 오묘자촌에 정착한 황화순, 김수남 부부(사진은 훗날 50년대에 국자가에서 맹활약 하던 때의 모습)
일제의 집단이민행렬에 끼여 태래현 오묘자촌에 정착한 황화순, 김수남 부부(사진은 훗날 50년대에 국자가에서 맹활약 하던 때의 모습)

황씨네가 당도해 보짐을 푼 태래현 하면 흑룡강성 서남부에 위치한 (지금은 치치할시 관할권에 있음) 작은 현성으로 흑룡강성과 내몽골, 길림성 세 지역 교차점에 놓여있는 사득판 같은 평원이다. 이곳은 예전부터 땅이 비옥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일제는 대동아 공영권의 미몽을 현실화하기 위하여 일찍부터 이곳 4리5향(四里五乡)지역에 수전개척을 목적으로 조선인집단이민을 대거 끌어들였다. 그러다보니 이곳이 일찍부터 흑룡강성에서 입쌀산지로 유명세를 타게 되었고 후에는 그 지역을 ‘어미지향’이라고까지 불렀다. 

토성을 두른 집단부락은 아니었지만 열십자로 뻗은 동서남북의 길이가 4~5리 되는 어마어마하게 큰 마을이었다. 그 십자로를 경계선으로 제1구, 제2구, 제3구, 제4구로 편성이 되어 마을이 들어 앉았는데 황 씨 일가는 제4구에 편입이 되어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지역은 땅이 흔해 빠진 곳이라 써레도 놓지 않고 그냥 물을 듬뿍 대어놓았다가 씨만 대충 뿌려 놓아도 농사만은 잘 되었다. 산이라는 게 보이지 않는 무연한 벌판이었는데 지도에서 보면 동북평원이 뻗어져 나간 흑룡강성의 서북지역 눈강평원 한 귀퉁이다. 황씨네는 거기에 정착하여 첫 보습을 박고 신풀이를 시작하게 되었다. 

시실 동북지역은 땅은 기름지고 비옥하나 동토대지역이어서 옛날에는 벼농사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했었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서면서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조선인들이 이곳 저온지대에서 벼농사 기술을 갖고 들어와 동북의 광활한 대지에 수전개척의 역사를 이루어 낸 것이다. 

워낙에 수완이 좋았던 황화순은 그 와중에도 조선인 농부 셋을 머슴으로 두고 여느 집들보다는 통이 큰 규모 형 벼농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집도 없이 꼬지깨떼를 쌓아 바람막이를 한 오두막에서 반년 남짓이 지내다가 후에는 집도 장만했다. 

이렇게 몇 년간 농사는 잘 되었다. 그런데 늦가을에 만몽회사와의 ‘출하계약’에 따라 그놈들이 싹쓸이 하듯이 다 걷어가고 나면 살림은 종시 펴이지 못했다. 황 씨 일가는 뼈 빠지게 벼농사를 하면서도 여름이 되기 바쁘게 잡곡을 꿔서 먹어야 하는 처지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작은 할아버지 댁에 얹혀살던 나의 외삼촌 황범송이 15살 어린 나이에 사진공부를 하려는 꿈을 안고 목단강, 할빈, 장춘을 전전하다가 치치할에까지 왔다. 어찌 보면 아버지를 찾아 태래현으로 왔다는 게 더 적중한 표현일 것이다. 오랜만에 일가족이 한자리에 모이긴 했으나 살림은 영 말이 아니었다.

1945년 8월 중순...광복

그러던 1945년 8월 중순에 접어 든 어느 날, 갑자기 태극기를 든 젊은이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북을 두드리고 ‘만세’를 부르면서 떠들어대는 모습에 황 씨 일가는 크게 놀랐다. 

대동아공영권의 미몽을 꿈꾸던 일제가 투항하면서 드디어 조선인들이 광복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제 살만한 세상이 온 거라고 다들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너무도 갑작스레 들이 닥친 일이라 황 씨 일가는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여하튼 다들 만세를 부르니 그들도 덩달아 만세를 불렀다. 이제 또 어떤 시련이 들이 닥칠 지에 대한 파악은 아예 없었다. 남의 나라, 남의 땅에서 살아가는 실향민이었으니 그 심정이 가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 순간 적어도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니 만세를 부르고 싶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이따금 만세를 부르면서도 이제 우리 조선인들 앞에 어떤 운명의 시련이 도래할 지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구경 누가 이 땅의 주인이 되고 어떠한 정당이 나타나 어떠한 정부를 세울 것인지? 가진 것 하나 없는 조선인들은 구경 누구를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기쁨은 그 한 순간,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무장을 한 지방토비들이 마을에 들이닥쳤다. 토비들은 “일본 놈이건 조선인이건 다 마찬가지이니 이참에 아예 족쳐야 한다.”고 하면서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쳐 가택수사를 하고 난동을 부렸다. 토비들은 마을에 덮쳐들어 불을 지르고 쌀 마대를 메어가고 소나 돼지, 닭과 같은 가축을 약탈해갔다. 

황 씨 일가는 물론 온 마을 사람들이 죄다 마을에서 쫓겨나 새밭에서 여러 날 째 밤을 새면서 집에 들어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밖에서 여러 날 째 가족들을 거느리고 오돌오돌 떨던 황화순은 어느 날 하도 추워서 오밤중에 이불이라도 꺼내오려고 마을로 내려왔다가 들통이 나 하마터면 더 큰 변을 당할 번했다. 

그 당시가 이미 벼이삭이 돋아 나기 바로 직전이었는데 그 황금나락 설레게 될 논을 버리고 차마 떠날 수 없어 일가족은 새밭에 숨어서 한숨만 풀풀 내쉬었다. 하지만 그때가 이미 무서리가 내리기 시작한 때인지라 이제 곧 들이 닥칠 한겨울을 그냥 새밭에서 버티어 낸다는 게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그 곳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눈물겨운 피난길

돌이켜 보면 그 피난길이 참으로 눈물겨운 한부의 드라마였다. 황화순은 암암리에 황 씨 일가와 함께 피난을 떠나게 될 난민들을 모아놓고 귀향계획을 세워나갔다. 일행이 저그만치 300명을 웃돌았다. 난민들은 황화순을 내세워 당지 홍군사령부에 찾아가 사정이야기를 하고 아무쪼록 두만강유역에까지 갈 수 있게끔 차를 배정해달라고 통사정했다. 

그렇게 요행 배정된 차가 치치할―장춘 행 화물차였는데 일행 모두가 오묘자 역에서 탑승하게 되었다. 마침 소련으로 소를 싫어 나르고 돌아오는 화물차여서 비집고 앉을만한 공간은 있었다. 아이들은 짐짝과 함께 시렁위에 얹혀지고 젊은이들은 자리가 부족한지라 위험을 무릅쓰고 달리는 차 위로 기어 올라가 자리를 차지했다. 아낙네들은 두셋이 앉을 자리에 네다섯 명이 비집고 앉아 비비닥거리면서 길을 떠났다. 바닥에도 사람, 홈에도 사람, 금새 차 바곤이 터질 지경이다. 

그런데 그 차가 백성자에 와서 멈춰서더니 웬일인지 떠날 염을 하지 않는다. 포로병이었던 일본인 기관사가 도망을 간 모양이다. 다시 기관사가 나타나야 차가 떠나게 되어 있는데 그 난리에 어데 가서 기관사를 모셔온단 말인가? 

그 와중에 쩍하면 마우재들까지 들이 닥쳐 부녀자들을 간음하고 보함직한 물건을 빼앗아 가니 이거야말로 안절부절이다. 황화순은 당시 갓 18살 꽃나이에 접어든 신애가 걱정되어 맨날 주위에서 맴돌다보니 배고픈 고생인들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난민들은 하는 수 없이 또 다시 당지 홍군사령부를 찾아가서 사정이야기를 했다. 한밤중에 트럭이 배정되어 백성자 교외(5리 상거한 곳)에 있는 어느 량식창고 앞마당으로 실려갔다. 거기서 꼬박 보름 넘게 묵으면서 소련홍군 군량미를 운반하는 일을 하면서 입에 풀칠이나마 하게 되었다.

거기서 조선으로 나가게 될 대부분 난민들은 몇 패로 나뉘어 사평 쪽으로 해서 두만강이나 압록강가로 나갔고 황 씨 일행 몇 세대만은 사정이 있어 우선 연변 쪽으로 갔다가 다시 귀향계획을 세워보기로 했다.   

그러던 중 뒤늦게 기차가 배정되어 요행 백성자에서 고생고생하면서 장춘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 당시 장춘에는 벌써 조선인을 관리하는 지방민족사무위원회라는 조직이 있었다. 황 씨 일가는 그 지방민족사무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장춘시 제36중(괴뢰만주국시기 지질학원)에 들어가 봇짐을 풀게 되었다. 황 씨 일가 외에도 숱한 난민들이 꾸역꾸역 그곳으로 밀려들었다. 동북의 여러 지역에서 떼 지어 온 수백 명을 헤아리는 난민들이 그곳에 집결되어 홍군사령부의 지령에 따라 한패가 떠나기 바쁘게 또 한패가 들이닥치는 통에 매일과 같이 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황화순한테는 괴뢰만주국 수도였던 장춘이 낯 선 고장이었지만 열여섯살내기 범송한테는 그다지 생소하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사진공부를 하려고 ‘도적기차’를 타고 수차 장춘에 와서 떠돌이 인생을 살았던 그였으니 말이다. 

황범송은 ‘쏠새미’처럼 빠져나와 난민소와 기차역부근 사이를 뛰어다니면서 신바람이 났다. 기차역광장에서 대나무꼬챙이에 정교하게 붙여 만든 미니태극기를 팔고 있었다. 하나 사고 싶었는데 수중에 돈이 없어 그저 만지작거리기만 하다가 그냥 포기하고 돌아섰다. 

태극기를 팔던 아주머니가 “너 이거 갖고 싶은 게로구나? 에라, 해방이 나서 다들 기뻐하는데 내가 선심 쓰지. 하나 줄 테니 골라 보거라. 대신 이걸 가지고 거리에 나가 ‘만세’나 많이 불러다우!”라고 하였다. 범송이는 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하나 골라가지고 시가지를 뛰어다니면서 신바람이 나서 ‘만세’를 불렀다. 

그 번 이민행열에 끼어 있던 그 십대소년(황범송)이 현재 90대를 넘긴 로인이 되었다. 

눈물겨운 가족사를 얘기하는 90고령의 외삼촌 황범송(2020년)황범송(黄范松 1930~2022.3.9 ). 고급촬영기자.1946년 1월부터 1952년 7월까지 연길시 금강사진관, 렬군속사진관에서 학도촬영사로 근무. 1952년 7월부터 퇴직할 때까지《동북조선인민보》,《연변일보》, 연변박물관, 연변주당위 촬영기자로 근무. 이 기간 주은래, 등소평, 강택민 등 국가 고위지도자들 연변시찰 현장을 사진으로 기록. [회고] 황범송,카메라와 더불어 칠십성상 (남용해)
눈물겨운 가족사를 얘기하는 90고령의 외삼촌 황범송(2020년)황범송(黄范松 1930~2022.3.9 ). 고급촬영기자.1946년 1월부터 1952년 7월까지 연길시 금강사진관, 렬군속사진관에서 학도촬영사로 근무. 1952년 7월부터 퇴직할 때까지《동북조선인민보》,《연변일보》, 연변박물관, 연변주당위 촬영기자로 근무. 이 기간 주은래, 등소평, 강택민 등 국가 고위지도자들 연변시찰 현장을 사진으로 기록. [회고] 황범송,카메라와 더불어 칠십성상 (남용해)

훗날 의젓한 사진작가로 성장해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지나 온 력사를 사진기록으로 남긴 어르신, 더 준확히 말하면 지금은 나의 외삼촌이 된 황범송, 그이한테서 당시 그 눈물겨운 난민얘기를 듣는 순간 서울의 명동극장에서 공연되었다는 연극「1945년」의 대본을 읽었던 기억이 떠올라 다시 찾아 적어본다.

"…때는 1945년 해방 직후, 만주 땅을 떠돌던 조선인들이 장춘의 ‘전재민(戰災民) 구제소’에 몰려든다. 구제소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갈 기차를 기다린다. 그 황량하고 지저분한 곳에서 인간군상의 풍경이 펼쳐진다. 지식인 구원창은 그 와중에도 학교를 세우려하고 그의 안해 김순남은 생계를 위해 떡 장사에 나선다.

오인호는 좌익활동을 하던 형 때문에 부모를 잃은 채 동생을 데리고 만주로 도망쳤으나 그 동생마저 구제소에서 죽고 만다. 장 씨와 박 씨는 오갈 데 없는 밑바닥 인생의 동류의식을 함께 느낀다. 둘은 물러설 데 없는 벼랑 끝에서 마치 짐승처럼 정을 나눈다. ‘아편쟁이’ 박 씨는 장질부사로 죽어가는 장 씨 앞에서 목 놓아 운다. 해방이 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부평초처럼 떠도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조선인난민들의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드라마…"

'국가자의 전설'; 저자 남용해 선생.
'국가자의 전설'; 저자 남용해 선생.

 

당시 황 씨 일가도 그 난민행열에 끼어 장춘에서 한 달간이나 머물면서 이제나 저제나 사령부에서 배정한 차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조선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작은 아버지가 계시는 하마탕으로 갈 것인가? 선택의 귀로에서 황 씨 일가는 고민했다. 대부분 난민들이 조선이나 한국으로 가는데 황 씨 일가는 그 길을 선뜻 택할 수 없었다.

당시 황명도 어르신이 하마탕에 계셨기에 일단은 그리로 가서 합류한 다음 다시 귀향계획을 세워보기로 한 것이다. 연변 쪽으로 나오는 난민이 십여호(안 씨네 정 씨네…) 잘 되었는데 거개가 비슷한 사연을 가진 처지의 사람들이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다가 요행 장춘에서 연변으로 나오는 기차를 잡아 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엎어지면 코 닿을 곳으로 오는데 또 여러날 걸렸다. 역시 기관사가 도망을 갔거나 아니면 차가 고장이 나서 중도에서 보수를 해야 했다. 언제든 차가 멈춰서면 내려서는 자비량을 하면서 차가 다시 떠나기만을 기다렸다. 

날씨가 추워오는데 홑옷바람으로 떠난 길이라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배고픈 고생에 추운 고생, 하여간 벼라별 고생을 다 했다. 제때에 먹지도 못하고 걸친 옷 또한 변변치 못하니 다들 퉁퉁 부어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렇게 고생고생해서 찾아 온 곳이 조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국자가였다. 이와 같이 황신애는 꽃다운 십대에 풍류인 아버지를 따라 동북산천을 전전하며 고생을 밥 먹 듯하면서 부평초 같은 삶을 경험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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