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느질 하나로 서민갑부가 된 유별난 엄마의 골 때리는 이야기

황 씨 가문의 '모험가'와 소녀가장
제1장 남원 황 씨 풍운사(1)

나의 어머니 황정자는 1927년 12월 28일, 조선 함경북도에 사는 남원 황 씨 가문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 이름은 황화순이고 외할머니 이름은 장 씨였다고만 전해지고 있다.

황정자가 태어나자 동네에서 의원을 지내셨던 증조외할아버지께서 옥편을 뒤져가면서 황신학(黄新学)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동네 아줌마들이 계집애 이름을 너무 촌스럽게 지었다고 하면서 신학이보다는 신애가 부르기 더 편하니 그리 불러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호적에 올린 이름과는 달리 황신애라는 ‘애명’으로 그냥 불리워져 본인도 신애가 진짜 이름인 줄로 알았다고 한다.

황신애가 태어난 시기는 조선반도가 일제 치하의 무단통치의 시대를 넘어 문화통치시대에 들어선 치욕의 연대였다. 일제의 문화통치 목적은 회유정책을 바탕으로 조선인들의 사회문화적 기반을 일본으로 돌리게 하고 나아가서는 조선사람들을 황국식민화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맞서 도처에서 반일항일을 목적으로 한 의병운동이 쇄도하면서 잇따라 마르크스주의가 중국에 전파되기 시작하면서 공산당 조직이 처처에 생겨나던 그런 격변의 시기였다. 1931년에 있은 9.18사변을 계기로 일본 군국주의 야망이 극대화되면서 이듬해에 괴뢰만주국이 세워지고 1937년 7월에는 노구교사변이 일어나면서 전면적인 중일전쟁이 발발하였다. 황정자는 이와 같은 경술치국의 연대에 남원 황 씨 가문의 장녀로 태어났다.

당시 왕청 하마탕 광흥툰에 살았던 어머니의 작은 할아버지 홍명도(1953년)
당시 왕청 하마탕 광흥툰에 살았던 어머니의 작은 할아버지 홍명도(1953년)

조선반도에서 황 씨의 시조를 보면 중국 후한(後漢)의 유신(儒臣)을 지냈던 황락(黃洛)으로 전해지고 있다. 황락은 광무제(光武帝) 건무 4년에 구대림(丘大林) 장군과 함께 교지국(交趾國)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가던 길에 동해에서 풍랑을 만나 평해(平海)에 표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도 가도 못하게 된 황락은 그곳에 정착하여 살면서 ‘황장군’이라 불렸었는데 그 황락 장군이 조선반도에서 황 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황장군의 후손으로 맏이 갑고(甲古)는 평해 황 씨, 둘째 을고(乙古)는 장수 황 씨, 셋째 병고(丙古)가 창원 황 씨로 봉해져서 훗날 평해, 장수, 창원 3개 관향으로 황 씨들이 조선반도에서 번성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황씨 20여 본도 이 세 관향에서 갈린 분파라고 하는데 황신애네 남원 황 씨는 장수 황 씨에서 분적(分籍)이 되어 내려 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황신애가 3살 나던 해인 1929년 한겨울에 황 씨 가문의 연장자이신 할아버지 내외, 그리고 아버지 내외를 비롯해 다섯 식구가 두만강을 건너 중국의 북간도(그때는 그렇게 불렀음) 팔과수(八棵树)라는 곳으로 이민을 왔다고 한다.

황 씨 가문의 ‘모험가’

팔과수 하면 왕청에서 서남쪽으로 15㎞ 떨어진 가야하 중부지역의 충적평원에 위치한 마을인데 그 당시에는 춘융촌(春融村) 소속이었다고 한다. 희한한 것은 그 마을 동구 밖에 여덟 그루의 고목이 꼭 마치도 의좋은 형제처럼 사이 좋게 마주하고 있어 마을 이름이 ‘팔과수’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황 씨 일가는 그곳에 봇짐을 풀고 할아버지는 계속해서 동네 의원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병을 봐주고 아버지를 비롯해서 남은 식솔들은 농사에 전념하면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개척해 나갔다고 한다.

그렇게 중국으로 건너와 팔과수에 정착한 남원 황 씨 가문에 아주 유별난 ‘모험가’ 한 분이 계셨는데 그가 바로 황신애의 아버지 황화순이다. 더 준확하게 표현한다면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에게는 외조부님이시다.

필자의 외할아버지 황화순.
필자의 외할아버지 황화순.

한때 외조부님은 왕청 하마탕 천교령 일대에서 꽤나 활약했던 인물로 평판이 나 있다. 힘꼴도 세고 활동력도 이만저만이 아니고 거기에 수완도 좋아서 주위에 아는 사람도 많은 풍류였다고 한다.

거기에 비해 안해 장 씨는 아주 조용하고 바느질에 애착이 있는 전형적인 가정부녀였다고 하는데 중국에 건너 온 이듬해 7월에 황신애 손아래로 오랍동생 범송이를 낳고 27살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젊은 나이에 부인을 잃은 황화순은 젖물림도 아니 한 갓난 아들과 4살 난 딸 신애를 왕청 하마탕에 계시는 작은 아버지(황명도) 댁에 맡겨놓고 자기는 돈이나 왕창 벌어보려는 심사로 천교령 목재판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다행이도 작은 할아버지네가 무자식이다 보니 두 남매를 친자식처럼 잘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작은 할아버지 황명도하면 그 지역에서 꽤나 평판이 나 있는 목수이다 보니 살림은 그나마 여느 집 보다는 넉넉한 편이었다고 한다.

당시 왕청 하마탕 광흥툰에 살았던 어머니의 작은 할아버지 홍명도(1953년)

그 당시 가진 게 없는 사람이 돈 좀 만지려 거든 농사 열심히 하면서 겨울철에 목재판으로 들어가는 것 외 별다른 부업거리가 없었다. 황화순은 목재판에 들어가 떼목운반공으로 있으면서 열심히 일해 죽기 내기로 돈을 모았다. 누구 보다 열심히 일하니 차츰 돈이 모아지기 시작했다.

종자돈이 어느 정도 모아지자 그는 다시 좀 더 큰 그림을 그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 동경성 일대에 논농사가 잘 되어 논만 부쳐도 배를 곯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에라, 그렇다면 뭐니 뭐니 해도 그곳으로 가는 게 상책이라고 혼자 생각을 한 것이다. 그 당시로 말하면 뭐니 뭐니 해도 배불리 먹고 사는 게 우선이었으니 말이다.

황화순은 목재판에서 번 돈을 가지고 혈혈단신으로 동경성 일대 하마허재라는 곳으로 갔다. 하마허재하면 석두역에서 30여 리 떨어진 중소국경지대인데 와룡구 산하의 마을로 항일유격구로도 꽤 이름이 있었다.

일제는 그 지역이 조선인들이 소련으로 넘나드는 길목의 역할을 하는 요새인지라 일찍부터 눈독을 들이고 일본인개척단을 들여보내 집단부락을 조성하였다. 그러다 후에는 조선인 인부들도 대거 모집해 들여 조선인부락도 앉혔다.

이렇게 되어 하마허재 일대는 한시기 일본인과 조선인은 물론 빨치산부대가 공존하면서 기 싸움을 하는 총성이 그칠 사이 없는 고장으로 되었다. 부근에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빨치산부대가 있었고 맞은편에 일본군집중영도 있었다.

황화순은 그곳에서 정미소를 운영해 보기로 작심했다. 후에는 정미소 바로 옆에 소매점까지 하나 차려놓았다. 당시 그가 운영하는 소매점에 일본군인들이 뻔질나게 드나들었다고 한다. 생필품도 사고 또 소매점에서 선술도 마시면서 취흥이 도도하면 젓가락장단에 노래도 불러대곤 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구멍가게지만 수입이 꽤나 짭잘했다고 한다.

소녀가장

주머니가 두둑해지자 황화순은 그곳에서 새 장가를 가게 되었다. 색시도 정미소를 운영하면서 눈도장을 찍어 두었던 영안에 사는 거래호집 열아홉 살 처녀였다.

소매점을 운영할라니 적미소를 돌볼라니 황화순은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삐 돌아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궁리하던 끝에 하마탕에 돌아와 딸 신애만을 데려다 집안 살림을 맡아하게 했다. 본의 아니게 아버지를 따라 나서게 된 황신애는 그때부터 부평초 같은 삶을 살게 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가 고작 11살이었다.

어린 나이에 낯설은 고장에 가서 의붓어머니 수하에서 집안 일을 도맡아 할라니, 거기에 상가도 봐주면서 아버지의 뒷바라지도 해야 했다. 고생문이 열린 것이다. 그런데 그나마 고생한 만치 돈이 들어오는 재미가 있어서 지루하다는 느낌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모험’을 좋아하는 아버지가 또 사달을 내고야 만 것이다. 워낙에 활동적인데다가 손에 돈이 있으니 그 지역 ‘날치기’들이 아예 작정하고 그한테 접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몇몇이 짜고 들어 처음에는 내기를 미끼로 크게 져주는 척 하면서 그의 심기를 자극했다.

워낙에 모험하기를 좋아하는 황화순이 그들이 쳐놓은 그물망에 걸려들 수밖에 없었다. 전에 아편밀수에 손을 댔다가 옥고를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작정하고 덤벼드는 도박꾼들에게 혼이 나가 세월 가는 줄도 모르고 놀음판에 빨려 들어갔다. 상가며 적미소가 내내 문이 닫겨져 있어도 심쭉해 하지 않았다. 도박으로 떼운 돈을 도박으로 벌어보려는 심산으로 일확천금을 거머쥘 그날만을 고대한 것이다.

꿈은 야무졌지만 결과적으로 황화순은 가산을 다 말아먹고 빈털터리가 되었다. 정미소며 상가가 다 놀음판으로 들어갔다. 이제 더는 하마허재에서 살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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