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느질 하나로 서민갑부된 유별난 엄마의 골 때리는 이야기
제4장 못 말리는 엄마의 유별난 이야기(1)

"배워야 성공한다" 망설이지 않고 대학 있는 연길로
숭고한 희생과 근면성실한 노동으로 복장점 대박

맏아들을 안고 도문 거리에 나온 황정자, 남영철 부부(1954년)
맏아들을 안고 도문 거리에 나온 황정자, 남영철 부부(1954년)

삼력(三力)의 어머니, 황정자

황정자는 삼력(三力)이라 불리는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는데 그 세 가지 힘은 바로 ‘판단력’, ‘결단력’, ‘추진력’이다.

그녀는 자식들을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시키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연길로 이사를 가야 한다고 밀어붙였다. 정말 기가 막힌 판단력이라 볼 수 있다.

거기에 어느 길로 갈지 빠르게 결정하는 ‘결단력’과 어떤 벽이 가로막아도 밀어붙이는 ‘추진력’까지 겸비했다. 우유부단이라는 말은 아예 통하지 않았다.

맏아들 남용운이 태어나자 황정자는 남편 남영철에게 아이들 대학 공부를 위해서라도 연길로 이사를 가야 하지 않겠냐고 넌지시 물었다. 하지만 그는 확실한 태도 표시를 하지 않았다. 3년 뒤 둘째 남용해가 태어난 뒤에도 그는 그저 묵묵부답이었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황정자(1955년)
두 아이의 엄마가 된 황정자(1955년)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남영철은 타이어 보수를 업으로 한 개체공상업자로 있었다. 또 후엔 도문기계공장에서 구입원(공장이나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원자재 및 각종 물품을 조달하는 사람)으로 근무하며 출장을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고 보니 한 달에 두세 번 정도만 집에 들렀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3년이 지나 셋째 남용까지 태어나 세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서 연길로 이사를 결심했다. 당시 남영철은 아예 집을 떠나 개산툰에 있는 탄광으로 내려가 있는 상황이었다. 이제나 저제나 연길로 이사를 가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황정자는 떠돌이 인생을 사는 남편을 믿다 애들이 나이를 먹어 어른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신을 벌떡 차리고 이사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한다.

세 아이들과 황정자, 남영철 부부(1958년)
세 아이들과 황정자, 남영철 부부(1958년)

그녀는 그렇게 곧장 도문의 집부터 경매에 내놓았다. 당시 그 집은 도문진 중산가 16조 23번지였는데 일제 때 지은 일식양철기와집으로 도문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근사한 단독 주택이었다. 마당엔 남영철이 몰고 다니는 소련제 카스차도 있었다. 그 자동차는 동북해방전쟁이 결속되면서 정부에서 그에게 공로상으로 준 것과 다름이 없었던 차였다.

또, 단독주택 정원엔 황정자가 자녀들 건강을 염려해 염소도 두 마리 키우고 있었다. 그 덕에 세 형제는 배도 곯지 않고 염소젖을 많이 먹고 자랄 수 있었다. 그렇게나 정이 가득 든 집이었지만 그녀는 자녀들 공부를 위해 그 쾌적한 환경을 포기하기로 결심을 굳힌 것이다. 다행히 집은 경매에 내놓자마자 임자가 나타났다.

그 당시 이사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라만 해도 대약진을 하느라 야단법석이었을 뿐만 아니라 시골로 이사를 간다 해도 이사를 가려는 동네에 찾아가 이사 동기를 밝히고 그 지역 파출소의 동의서를 받은 다음 낙호증(落户正) 정도는 끊어 와야 이사가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오직 아이들을 위해 혼란한 세상과 껄끄러운 각종 절차 따위는 따지지 않고 삼력의 정신으로 이사를 강행한 것이었다.

익숙한 도문에서 낯선 연길로

도문을 떠나기 전 친분이 있던 친구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황정자(1958년)
도문을 떠나기 전 친분이 있던 친구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황정자(1958년)

그녀는 아담한 키와는 달리 크게 생각하는 스케일이며 두둑한 배짱이 웬만한 사내 못지 않았다. 당장 거대한 폭풍이 불어친다 해도 끄덕 하지 않을 배포와 여유를 가진 그녀는 30대 초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머리에는 요긴하게 써야 할 생필품 보따리를 이고 앞에는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을 앞세우고, 등에는 젖먹이 막내 남용을 업고는 연길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기차가 연길역에 들어서자 개찰구를 빠져나온 네 식구는 대합실에서 마차 한 대를 세 내어 시가지 쪽으로 향했다. 달리던 마차가 목적지에 당도하자 웬 사람들이 마중 나와 오느라 고생했다고 그들을 반겨주었다. 그들은 예전에 그녀가 근무한 길동군구피복공장 이공장장 집이었다.

이공장장은 그녀와 남영철을 맺어준 오작교이기도 한 사이이자 그녀에게는 한 때 상사이기도 했으니 보통 인연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런 이공장장 집에서 잠시 머무르며 연길에 안주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렇게 그녀는 연길에서 홀로 동분서주하며 내 집 마련을 위해 매일 국자가 골목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다섯 식구 중 유일한 여자였지만 세 아들을 둔 여인이었던 그녀는 이미 억척스러운 여자이자 누구보다 강한 ‘왕’이었다.

그녀는 평생을 립스틱 한 번을 짙게 바르지 않고 그저 일 년에 두세 번 싸구려 파마를 하며 살았다. 예쁘게, 곱게 여인으로 살기 보단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을 불태워가며 가족을 위해,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가정집 재산목록 1호 '재봉침' 구입

자녀들과 함께 살아가야 할 보금자리를 찾아 동분서주하던 황정자는 어느 날 신화서점 부근에서 안성맞춤의 집을 만나게 되었다. 도문에서 살던 집하고는 비교가 안 될 수준이었고 더 근사한 집을 사고 싶었지만 재봉침을 마련할 계획이 있었기에 적당한 평수를 골랐다.

국자가-해방로-광명가가 'ㄷ'자로 교차된 옛 신화서점 뒷골목
국자가-해방로-광명가가 'ㄷ'자로 교차된 옛 신화서점 뒷골목

집을 구하고 남은 돈으로 나비표 재봉침 한 대를 샀다. 텔레비전이 보급되지 않았던 그 시절 재봉침은 가정집에서 가장 선호하는 보물 1호였다. 그녀는 재봉침만 있으면 최소한 식구들을 헐벗게 하지는 않게 할 자신이 있었다.

황정자의 손 때 묻은 나비표 재봉틀
황정자의 손 때 묻은 나비표 재봉틀

황정자는 성급하게 창업을 하지 않고 재봉틀을 가지고 어느 한 개체복장점에 들어가 바느질을 시작했다. 워낙 바느질로는 으뜸이었던지라 찾아오는 손님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자연스레 단골손님이 늘었다. 오는 손님마다 그녀에게 옷감을 맡기려고 하니 일감 중 반 이상이 그녀 몫일 정도였다.

이러다보니 자연스레 직접 복장점을 개업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특히 막내아이를 낳으면서 가장으로서의 부담과 책임감이 막중해지자 창업을 현실에 옮길 계획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서시장에 넓은 집 마련...바느질 작업공간 확보

그녀는 살던 집을 팔고 모아두었던 돈을 합쳐 널찍한 집 한 채를 사들였다. 서시장 번화가에 위치한 집이었다. 주거도, 영업도 가능했던 그 집에서 그녀는 드디어 복장점을 시작했다.

낮에는 복장점으로 변했던 집안이기에 낮에는 늘 시끌벅적한 공간이었다. 그녀는 손님 여부와 관계없이 늘 바삐 일했다. 네 자식들 끼니 챙기랴, 밀린 바느질하랴, 집안일 하랴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녀의 야무진 솜씨는 점점 입소문을 타 세간에 많이 알려지고 차츰 찾아오는 손님들이 더욱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루가 멀다하게 일감이 들어오면서 그녀는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재봉틀에 마주 앉아 저녁 6시까지 거의 숨 돌릴 겨를 없이 일을 했다. 거기에 자식들 아침, 점심 도시락 챙겨주고 해가 기울면 저녁 끼니 챙기고, 손님들이 몰려오는 저녁 7~8시에는 손님도 맞이해야 했다.

그 복잡다단한 하루 일과를 그녀는 특별한 메모 없이 어림짐작으로 그때그때 잘 풀어나갔다. 연길에서의 일상은 늘 이런 식으로 반복되었다.

한 번은 6.1절 행사에서 성대한 운동대회가 있었는데 애들에게 색다른 옷을 지어 입히려 하나 보니 복장점을 찾는 손님들이 평소보다 훨씬 많아 하루 2시간 남짓 나며 꼬박 밤을 지새우며 일을 하고 있는데 새벽녘부터 학부모들이 찾아와 기다리고 있었다.

급한 불부터 꺼야 했기에 그녀는 밤새 옷을 만들었다. 그러다 자녀들 아침을 잊어버리게 되었는데 부랴부랴 네 자식들의 점심 도시락을 챙겨가지고 문 앞에 나와 아이들을 찾아내 아침을 챙겨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에 계란과 빵을 넣은 점심 도시락과 용돈을 건네주고 다시 일을 하러 간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의령 남 씨 사형제(1964년)
의령 남 씨 사형제(1964년)

밤새 옷수선 작업...피곤에 찌든 고된 나날

밤새 눈 한번 제대로 붙이지 못하고 충혈된 두 눈에 피곤함이 꽉 차있는 걸 당시 어린 아이들도 알았을 정도라고 하니 그녀가 얼마나 힘들고 고된 하루를 보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하루하루 엄청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그녀의 사전에 결코 대충이란 없었다. 간혹 가다 불만을 토로하는 손님을 만날 경우에도 최선을 다해 몸에 맞는 옷을 지어 결국엔 다들 만족의 미소를 보냈고 이러한 손님들이 다시 친척이나 친구들까지 데려와 옷을 맞추러 오곤 했다.

훗날 조금 큰 첫째와 둘째가 집안일을 거들며 그녀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녀는 그럼에도 쉬지 않고 늘 재봉틀을 마주하고 있었다.

당시 서민들의 생활수준이 그닥 높지 못하다 보니 명절 때나 외어야 새 옷을 맞춰 입곤 했던지라 결혼식이나 잔치를 앞두고 옷을 주문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럴 경우엔 무조건 제 시간에 맞춰야만 했다.

재봉틀에 손가락 빨려 들어기 다친 적도 수십번 

한 번은 시간을 맞추기 위해 졸음을 버텨가며 미싱을 하다 그만 오른손 중지가 재봉틀에 빨려 들어가 박혀버렸는데 그녀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아픈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옆에 있는 솜으로 대충 지혈만 하고 다시 일에 몰두했다. 그런 손으로 밤늦게까지 작업을 했을 정도로 그녀는 고객과의 약속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경영철학을 갖고 있었다.

어떻게든 경영철학을 고수하려 하다 보니 그녀의 중지는 수십 번 재봉침에 빨려 들어가 바늘에 찔렸고 제일 길어야 할 중지가 새끼손가락 길이와 비슷할 정도로 짧아졌다.

봉제바늘에 박혀 짧아진 황정자의 중지 손가락
봉제바늘에 박혀 짧아진 황정자의 중지 손가락

그녀의 오른손 중지는 한 평생을 바느질로 살아온 그녀의 삶의 흔적이자 가족을 위해 헌신한 ‘감탄표’이자 ‘공로패’이기도 하다. 바쁜 노동에 쫓기다 보니 아이들에게 따뜻한 삼시 세 끼는 챙겨주지 못했지만 밤낮없이 일하며 돈을 벌었던지라 돈이 없어 아이들 헤진 옷 입으며 학교를 다니게 하지는 않았으니 정말이지 대단한 여장부였다 할 수 있다.

복장점 유명세 타던 시점 ‘문화대혁명’ 시작...개체공상업 제한

'황정자 복장점'도 '신흥복장점'이란 집체기업에 귀속 

황정자가 운영하는 복장점이 꽤나 유명세를 타던 그 시점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 문화대혁명은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를 잡아내며 개체공상업을 제한하였다.

어느 날 신흥가두에서 주변의 복장점들을 규합하여 ‘신흥복장점’이라는 집체기업을 만들었는데 그녀의 복장점도 거기에 먹혀들게 되었다. 이에 대해 그녀는 침울해 있기 보단 솔선수범하여 변화에 부응해 가도사업에 열정적으로 나섰다. 이를 계기로 그녀는 신흥복장점 일원(점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개인 복장점 운영에서 벗어나자 그녀는 밤을 새우며 일하는 과한 노동에서 벗어나 식구들에게 세 끼 따뜻한 밥을 지어줄 수 있게 되었고 맨날 시끌벅적하던 집은 살림집같은 아늑함을 되찾았다.

복장점으로 사용하던 집의 작업공간이 거실로 바뀌자 자녀들이 단독으로 방을 하나씩 차지하게 되었는데 이는 훗날 형제들이 대학입시공부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배경이 되어주었다.

솜옷을 박을 때의 시범을 보여주고 있는 황정자 (오른쪽. 1979년)
솜옷을 박을 때의 시범을 보여주고 있는 황정자 (오른쪽. 1979년)

집안 작업공간 큼직한 거실 공간으로 변신

자녀들 개인 공부방 만들어 학업에 열중케

당시 신흥복장점에는 열대여섯 명 기능공들이 있었다. ‘장영순’이란 재단사도 있었는데 일본에 가서 제대로 재단을 배우고 왔음에도 조직의 견제 대상이 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정치 분위기가 해외에 다녀온 경험이 있으면 알게 모르게 편견의 모자가 씌어지게 돼 있었던지라 장영순 재단사도 그런 억울함을 이겨내지 못해 얼굴에 웃음기 없이 상당히 침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황정자는 복장점 리더가 되려면 재단기술을 장악해야만 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해서 평소에 장 재단사를 자주 찾아가 ‘언니’라고 부르며 진심을 보였고 그녀의 진심에 직장에선 누구하고도 말을 섞지 않는 장 재단사는 그녀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곤경에 처한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고 살갑게 대해주는 자체가 고마웠던 것이다.

그렇게 둘은 더욱 깊은 신뢰 관계를 쌓아갔고 그녀는 장 재단사의 곁에서 심오한 재단기술을 눈대중으로 배워나갔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신흥복장점이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점장 겸 재단사로 승진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장 재단사한테서 재단기법을 배우고 나서는 도본도 없이 자와 분필을 가지고 재단해 옷을 만들었는데 복장점에 들어서는 손님을 힐끗 보고 기본적인 치수만 재 보고는 옷을 지었을 정도로 솜씨가 대단했다.

신흥복장점 멤버들(1980년)
신흥복장점 멤버들(1980년)

특히 그녀의 눈썰미는 가히 오차 없는 표준잣대 수준일 정도로 뛰어난 수준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기계가 들어오고 기계화 작업으로 복장업계가 운영됨에 따라 많은 개체복장점들이 문을 닫게 되었다.

사회적 변화와 함께 정년을 넘긴 나이라는 현실적 제약이 다가오자 그녀는 서서히 마음을 정리하고 한 평생 잡았던 바느질을 손에서 놓고 물러나게 되었다. (계속)

국자가의 전설
국자가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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