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리대로 한국인공지능학회 회장

리대로 대표
리대로 대표

요즘 영화 ‘나라말싸미’에서 한글을 신미대사가 만들었다는 식으로 말해서 말썽이다. 옛날에 한글은 창살을 보고 만들었다느니, 일본 신대문자를 보고 만들었다느니 말들이 많았는데 요즘엔 한글은 세종대왕이 처음 새로 만든 것이 아니고 고조선 때 있던 글자를 본 따서 만들었다는 이들까지 나왔다.

그런데 거기다가 이번에는 신미대사가 한글을 만들었다고 한다. 지난날 한글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불교인들이 이제 한글이 떠오르니 뚜렷한 근거도 없는데 소설을 쓰듯이 꾸며 대며 그런다. 왜 신미대사가 한글을 만들었으면 만들었을 때에도 그 다음 400여 년 동안 그런 말을 안 하고, 또 지난날 한글을 쓰지도 않고 업신여기다가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하니 답답하다!

그런데 한글에 불교 냄새가 많이 나니 이런 말이 나온 거로 보이는데 나는 신미대사가 만들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세종이 승려 못지않게 불교를 잘 알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조선을 세울 때 정도전은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삼았지만 태조 이성계는 불교를 믿었고 그 집안 내력이 불교 분위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양을 도읍지로 정할 때에 태조가 무학대사와 많이 의논한 것도 그렇고 임금이 된 뒤에도 신하들 반대에도 불교와 승려들을 가까이 한 것이 그렇게 보인다. 그런데 세종은 처음에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폈지만 할아버지 태조 못지않게 불교를 잘 알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한글에 불교 냄새가 나고 한글을 만들고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이란 책도 낸 것으로 보인다.

이제 불교인들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근거도 없는 소리에 힘과 시간을 빼앗기지 말고 어떻게 이 훌륭한 우리 글자를 잘 이용해서 더 잘 사는 나라를 만들 것인가 고민하고 실천하는데 힘쓰기를 바라면서 조선왕조실록에 세종이 손수 한글을 만들었다는 기록을 살펴보련다. 조선왕조실록은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으로 선정된 믿을만한 자료이고 한글이 태어났을 때 쓴 것이기에 뚜렷한 증거이지만 그 뒤 개인이 제멋대로 한 말이나 쓴 글은 소설이거나 짜깁기한 것이기에 믿을 수 없다. 아니 믿어서도 안 된다.

사진=나랏말싸미 영화 포스터
사진=나랏말싸미 영화 포스터

1. 세종실록 102권, 세종 25년 12월 30일 경술 2번째 기사. “1443년 명 정통(正統) 8년 훈민정음을 창제하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고 쓰고 있다. 이 글에서도 세종대왕이 손수 만들었다고 밝혔다.

2. 세종실록 113권, 세종 28년 9월 29일 갑오 4번째 기사. “1446년 명 정통(正統) 11년 《훈민정음》이 이루어지다. 어제와 예조 판서 정인지의 서문 국역원문 “이달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이루어졌다. 어제(御製)에,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漢字)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우매한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28자(字)를 만들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쉬 익히어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할 뿐이다.“라는 글에서 ”내(세종)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28자(字)를 만들었으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 또한 세종이 이 글자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3. 세종실록 113권 세종 28년 29일 갑오 네 번째 기사에서 “또한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殿下)께서 정음(正音) 28자(字)를 처음으로 만들어 예의(例義)를 간략하게 들어 보이고 명칭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하였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우리 전하(殿下)께서는 하늘에서 낳으신 성인(聖人)으로써 제도와 시설(施設)이 백대(百代)의 제왕보다 뛰어나시어, 정음(正音)의 제작은 전대의 것을 본받은 바도 없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졌으니“라는 글에서 세종대왕이 옛날 것을 본받은 것이 아니고 손수 깨달아 만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4. 세조실록 20권, 세조 6년 5월 28일 계묘 2번째 기사. “1460년 명 천순(天順) 4년 예조에서 《훈민정음》·《동국정운》·《홍무정운》을 문과 초장에서 강할 것 들을 아뢰어 따르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훈민정음(訓民正音)》은 선왕(先王)께서 손수 지으신 책이요, 《동국정운(東國正韻)》·《홍무정운(洪武正韻)》도 모두 선왕께서 찬정(撰定)하신 책이요, 이문(吏文)도 또 사대(事大)에 절실히 필요하니, 청컨대 지금부터 문과 초장(文科初場)에서 세 책을 강(講)하고 사서(四書)·오경(五經)의 예에 의하여 분수(分數)를 주며, 종장(終場)에서 아울러 이문(吏文)도 시험하고 대책(對策)395) 의 예(例)에 의하여 분수를 주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라고 밝힌다.

5. 이 밖에 세종실록, 문종실록, 세조실록들이 세종이 순수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많이 있으나 줄이고 “훈민정음해례본 정인지 서문”에 세종이 손수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기록을 살펴보련다. 이 훈민정음해례본도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으로 선정된 책이다.

“昔新羅薛聰 始作吏讀(석신라설총 시작이독) 옛날에 신라의 설총이 이두를 처음으로 만들어서,官府民間 至今行之然皆假字而用 或澁或窒(관부민간 지금행지연개가자이용 혹삽혹질) 관부와 민간이 오늘에까지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대개 한자를 빌려 씀으로 혹은 꺽꺽하고 혹은 막히어서, 非但鄙陋無稽而已 至於言語之間 則不能達其萬一焉(비단비누무계이기 지어언어지간 즉불능달기만일언) 비단 비루하고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언어를 적는 데에 이르러서는 능히 그 만분의 일도 통달하지 못하였다. 癸亥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曰訓民正音. (계해동 아전하창세정음이십팔자 악게예의이시지 명왈훈민정음)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스물여덟 자를 창제하시고 대략 보기와 뜻을 들어 보이시고는 이를 훈민정음이라 부르셨다.”라고 세종이 직접 한글을 만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한글이 매우 신비로운 글자인데 그 만든 과정을 자세히 기록하지 않아서 저마다 소설을 쓰고 있지만 위에 살펴 본 기록이 뚜렷한 것이니 모두 믿고 한글을 어떻게 잘 이용해서 더 좋은 나라를 만들까 연구하고 힘을 모아 실천해야 할 것이다.

사진=훈민정음
왼쪽은 세종이 직접 한글로 지은 월인천강지곡, 오른쪽은 수양대군이 한글로 쓴 월인석보.

6. 이제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는 신미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고 신미가 한글을 만든 것이 아님을 알아보자. 세종실록에 ‘신미’리는 사람이 처음 나오는 것은 세종 28년 훈민정음이 태어나던 해이며 그것도 훈민정음과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고 불교 이야기 속에서다. 또한 세종 30년에도 ‘신미’라는 이름이 나오지만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고 불교와 관련된 이야기이고 문종실록에도 나오는 데 신미의 아우인 김수온과 관련된 이야기다. 신미가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면 조선왕조실록에 한마디라도 그런 말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미루어 짐작되는 것은 세종이 불교를 믿기에 신미를 좋아했던 것은 사실인 거 같다.

7. 마지막으로 조선이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세운 나라지만 태조와 세종이 불교를 좋아하고 믿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자.

정종실록 4권, 정종 2년 4월 18일 계축 5번째 기사: 1400년 명 건문(建文) 2년 태상왕(태조)이 정릉사 탑전에서 7일 동안 불사를 베풀다. 사리(舍利) 4매(枚)가 분신(分身)046) 하니, 태상왕이 유동(楡洞)에 불당을 짓고서 사리를 안치하였다.

태종실록 2권, 태종 1년 9월 14일 경자 2번째기사 1401년 명 건문(建文) 3년 태상왕이 궁실을 짓다. 임금이 태상전(太上殿)에 조회하였다. 태상왕이 궁실(宮室)을 짓고 누(樓) 북쪽에 못을 파고, 또 전(殿) 서쪽에 별궁을 짓고, 궁 서쪽 봉우리의 허리에다 작은 불당을 지었다.

이렇게 세종은 할아버지 태조가 불심이 깊었고 세종도 유학을 신봉하는 신하들 반대에도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 일을 한 자료가 있으며, 둘째 아들 효령대군이 불교를 믿고 불사를 행하는 것을 탓하지 않은 것, 1446년 한글로 아들 수양대군에게 석보상절이란 불교 책을 짓게 한 것, 1447년 불교 책인 월인천강지곡을 직접 한글로 지은 것, 소헌왕후가 세상을 뜬 뒤에 신하들의 반대를 무릎 쓰고 내불당을 지은 것, 언문청에서 불경 언해사업을 하게 한 것들을 보면 세종이 본래 책을 많은 읽는 사람으로서 불교 책도 많이 읽고 승려 못지않게 불교를 잘 알고 있었으며 부처에게 새 글자를 만들게 해달라고 빌고 다짐했을 거로 보인다.

여기서 석보상절도 신미가 한글을 만들었다면 아들 수양대군이 아닌 신미에게 쓰게 했을 것이지만 아들에게 짓게 한 것을 볼 때에 오히려 수양대군이 한글을 만드는 데 더 관여한 것으로 짐작이 된다. 다만 아버지 세종이 한글을 만들 때에 도와준 수양대군이 월인석보를 쓸 때에 승려 신미나 그 동생 김수온의 자문을 받았을지는 모른다. 이렇게 세종이 개인은 불교를 믿기에 한글에서 불교 냄새가 나는 것이지 승려 신미가 한글을 만들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나도 불교인으로서 40여 년 전에 불교가 한글을 천대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불교계가 불교를 믿는 세종이 만든 한글을 천대하지 말고 잘 이용해야 한다는 글을 쓴 일이 있다. 이제라도 불교계는 지난날 기독교보다도 한글을 업신여긴 것을 뉘우치고 한글을 빛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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