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강조의 원리

강조(emphasis)의 원리란 글의 주제 또는 소주제에 대한 서술을 두드러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독자가 그 글의 요점을 인상 깊게 받아 들이고 충분히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도록 주제나 소주제를 강도 높게 드러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말을 할 때에도 어떤 중요한 점에 대해서는 어조를 높인다든지, 되풀이해서 말한다든지 해서 강조하듯이, 글의 경우에도 그러한 강조의 서술이 필요하게 된다. 만일 글의 모든 부분이 평탄하게 서술되면 필자가 나타내고자 하는 글의 핵심이 잘 드러나지 않을 뿐 아니라, 글의 전체 흐름이 단조로워질 수가 있다. 주제 또는 소주제는 통일성과 연결성을 가지고 서술한다 할지라도 독자가 그 내용을 확고히 파악하고 그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다면 글의 목적을 제대로 이루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글짓기에서 적절한 강조 효과를 내도록 하는 것은 필수 요건 가운데 하나이다.

강조의 효과를 내는 방식은 대개 3가지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1) 서술 내용에 의한 강조, (2) 위치에 의한 강조, 그리고 (3) 표현 기교에 의한 강조가 그것이다. 이 방식들은 글 전체와 단락의 경우에 다 적용되나 여기서는 단락의 경우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 그 요령을 익히도록 한다.

1) 서술 내용에 의한 강조법

서술 내용에 의한 강조란 소주제 또는 그것과 관련된 사항에 대해서는 그 중요도에 따라 되도록 상세하고 알차게 뒷받침하는 것을 말한다.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되도록 충분한 서술을 해서 독자의 관심을 오래 붙잡아 두고 납득을 시키는 강조법이다. 이런 충분한 뒷받침의 필요성에 관해서는 앞에서 여러 번 지적한 바 있지만, 이것이 가장 중요한 강조법이다. 주제 또는 소주제에 대하여 충분한 설명을 한다든지, 타당성 있는 이유나 증거를 알맞게 보여 주어서 독자가 잘 납득할 수 있게 해야만 한다.

다음 글은 첫문장에 나타난 소주제문의 뒷받침 내용이 상당한 강조성을 드러낸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고 자세한 설명을 해서 독자를 납득시키는 강조 효과가 엿보인다.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보기 6.14]

우리 가정에서는 사고력을 기르기보다는 억누르는 일이 많다. 아이들의 사고력을 기르는 일을 의식적으로 시도하는 부모는 커녕 사고력의 싹을 오히려 짓밟아 버리는 일이 흔히 있다. 가령, 어린이들이 어떤 문제를 생각하다가 모르는 일이 있어서 물어 왔을 때 그런 사고력을 북돋아 주고자 친절히 대답하고 격려하는 부모는 매우 드물다. "엄아, 이건 왜 그래?" "왜 우리는 잘 못 사는거야?" 따위 질문을 하는 어린이가 있다 할 적에 과연 그것을 성의껏 대답하고 납득시키는 부모가 몇이나 될까? 오히려 "그건 너는 몰라도 돼." "어서 공부나 해." 하는 식으로 윽박지르는 일이 더 많은 실정이다. 우리는 서양 영화나 TV 화면 등에서 어린이가 어른들의 대화에 끼어드는 것을 가끔 본다. 그런 경우에 아무리 그 아이가 어릴지라도 어른의 의견과 마찬가지로 대꾸해 주고 사소한 물음도 대견스럽게 여기고 응답하며 대화에 한 몫을 하게 한다. 이는 우리의 경우와 퍽 대조되는 면이 아닌가 한다. 우리의 전통적 가정에서는 어린이의 말참견은 용인되지 않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또 꼬치꼬치 묻는 아이들을 곱게 보지 않는 풍조조차 있었던 것이다. 이런 우리의 전통적 가정 분위기 속에서는 어린이들의 사고력이 꽃피기는커녕 오히려 시들어 버리고 말 것이 뻔하다.

이렇게 독자를 납득시킬 수 있는 뒷받침 내용을 되도록 자세히 제시하는 것이 분량에 따른 강조법이다. 위의 보기를 다음과 같이 간략히 서술하고 넘어 간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 견주어 보자.

[보기 6.14']

우리 가정에서는 사고력을 기르기보다는 억누르는 일이 많다. 어린이들의 물음에 대하여 친절히 대답하고 그것을 장려하는 부모는 매우 드물다. "엄아, 이건 왜 그래?" "왜 우리는 잘 못 사는거야?" 따위 질문을 하는 어린이가 있다 할 적에 과연 그것을 성의껏 대답하고 납득시키는 부모가 몇이나 될까? 오히려 "그건 너는 몰라도 돼." "어서 공부나 해." 하는 식으로 윽박지르는 일이 더 많은 실정이다.

아무래도 이런 정도의 뒷받침 서술만 가지고는 소주제문이 충분히 납득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위 [보기 6.13]와 같이 더 많은 서술 뒷받침이 있어야 설득력이 강한 단락이 될 것이다.

다음 단락은 학생의 글이지만 충분한 뒷받침을 함으로써 강조 효과를 드러낸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충분한 자료를 가지고 자상하게 서술하는 것임을 실감할 수 있다.

[보기 6.15]

영수는 남을 잘 이끌어 가는 지도력이 뛰어나다. 영수는 우리 반 아이들이 다 좋아하고 따라 가는 반장이다. 다른 힘 센 아이들의 말도 잘 안 듣는 귀석이만 해도 반장의 말이라면 두 말없이 따라 온다. 그것은 그가 선생의 신임을 받는 반장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선생의 총애를 받는 애들을 반 아이들이 오히려 미워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가 이렇게 학생들 간에 영향력이 큰 것은 무엇보다도 모든 아이에게 골고루 관심을 가지고 돌봐 주는 자세 때문이다. 그는 공부를 잘 못하고 힘이 약한 아이들이라도 공부 잘하고 힘센 아이들과 똑같이 대해 주는 고운 성품이 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무슨 일을 결정할 때나 여러 사람의 의견을 골고루 들으며, 반대자가 있으면 그 의견을 무시하지 않고 끝까지 설득시켜서 이끌고 가는 태도를 지니고 있다. 그러니 그는 동료들로 부터 핀잔을 받는 일이라곤 거의 없다. 남의 앞장을 서서 일을 많이 하는 이는 대개 욕을 먹게 마련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따지고 보면 지도력이 뛰어나지 못한 데서 나온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영수가 일을 많이 하면서도 핀잔을 받기는녕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그 지도력이 유다름을 말해 준다. --다듬은 학생의 글

소주제("뛰어난 지도력")에 대하여 입증하는 여러 사실 재료 들이 배열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소주제를 떠받드는 데 다각도로 수집한 사항들이 서술되고 있어서 상당한 설득력을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충분한 서술 또는 입증 재료를 한 소주제의 전개에 집중시키는 일이 무엇보다도 강력한 강조 수단 이다.

다음 보기는 뒷받침문장들이 맨 앞의 소주제를 여러 면에서 확대하여 풀이할 뿐 아니라 맨끝에 가서 다시 한 번 그것을 다짐하고 있다. 이런 되풀이 서술은 독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강조법의 한 가지이다.

[보기 6.16]

우리말을 고스란히 적을 수 있는 글자를 어느 때에 갑자기 만들어 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다. 단순하고 불완전한 어떤 기호에서 몇십 년 또는 몇백년을 두고 조금씩 고치고 다듬어 오는 사이에 차차로 완전하게 이루어진 글자가 아니라 한 임금의 이끄심 밑에서 몇 사람의 학자들이 20년도 못 걸려 그처럼 훌륭한 글자를 만들어 낸 것은 하늘 아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것도 뜻이나 겨우 나타내고 의미나 전달하는 불완전하고 불편한 것이 아니라 말(뜻과 느낌과 소리를 완전히 갖춘 살아 있는 말)을 고스란히 적을 수 있는 '쉽고도 알뜰한'(簡而要) 글자를 한때에 몇 사람의 지혜로 만들어 냈다는 것은 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수업, "배달 문학의 길잡이".--

한글에 관한 글이라도 다음과 같이 쓴 것은 강조 효과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 가지에 집중된 서술이 아니고 여러 가지 문제에 분산된 서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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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6.17]

한글은 우수한 소리글자 가운데 하나이다. 세계에는 여러 가지 글자가 있는데 크게 소리글자와 뜻글자로 나누어진다. 뜻글자는 중국의 한자가 대표적인 것이며 글자 하나 하나에 뜻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이 뜻글자는 뜻을 나타내는데는 잇점이 있다. 그러나 이 글자는 낱자로 나누어서 조합되는 소리 글자가 아니기 때문에 적을 수 있는 소리가 매우 한정 되어 있으며, 글자마다 일일히 뜻과 소리를 외워 두어야 하는 불편이 있다. 더구나 그 글자수가 수만개나 되고 글자 모양이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외워 쓰기가 극히 어렵다. 한글은 적은 수의 낱자(자음, 모음)를 서로 어울려서 숱한 소리를 적을 수가 있는 소리 글자다. 곧 한글은 사람의 소리 뿐 아니라 닭우는 소리는 짐승의 울부짖는 소리까지 적어 낼 수 있는 소리 글자다.

이 단락에서는 한글이 "우수한 소리 글자"라는 점이 충분히 서술되지 않았다. 뜻글자에 관한 설명이 너무 긴 반면에 한글이 어떤 점에서 우수한 소리 글자인지에 대해서는 독자가 납득할 만큼 설명하지 못하였다. 그 소주제에 대하여 독자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충실히 떠받들어야만 강조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강조성은 앞에서 말한 통일성과도 관련이 있다. 집중력있는 서술은 통일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강조 효과도 크기 때문이다.

다음 보기는 "자연의 미"라는 소주제를 여러 면에서 충분히 떠받들어 펼치고 있는 알찬 단락 전개의 본보기이다.

[보기 6.18]

한국의 미를 한 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자연의 미"라고 할 것이다. 자연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것은 한국적 자연으로, 한국에서의 미술 활동의 배경이 되고 무대가 된 바로 그 한국의 자연이다. 한국의 산수에는 깊은 협곡이 패어지고 칼날 같은 바위가 용립하는 그런 요란스러운 곳은 적다. 산은 둥글고 물은 잔잔하며, 산 줄기는 멀리 남북으로 중첩하지만, 시베리아의 산맥처럼 사람이 안 사는 광야로 사 라지는 그런 산맥은 없다. 둥근 산 뒤에 초가집 마을이 있고, 산봉이 높은 것 같아도 초동이 다니는 길 끝에는 조그만 산사가 있다. 차창에서 내다보면, 높은 산 위에 서 있는 촌동 2, 3인의 키가 상상 이외로 커보이는 곳은 우리 나라밖에 없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산은 부드럽고, 사람을 위압하지 않는다. 봄이 오면 여기에 진달래가 피고, 가을이 오면 맑은 하늘 아래 단풍이 든다. 단풍은 세계 도처에서 볼 수 있으나 미국이나 캐나다처럼 길을 뒤덮고 산을 감추어 버리는 그러한 거대하고 위압적인 단풍은 아니다. 자기 자신을 인식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주장하지 않는 겸손 그대로의 단풍이다. 아니, 겸손하다기보다는 아주 자기의 존재도차 무시하는 천의무봉(天衣無縫), 해탈성불(解脫成佛)한 것같은 단풍이다, 단풍 든 시절의 한국의 산은, 보고 있으면 동심으로 돌아가, 산 꼭대기서부터 옆으로 누워 데구데굴 굴러 보고 싶은 그러한 산이다. 이것이 한국의 자연이다. 한국의 산에는 땅을 가르고 불을 내뿜는 그 무서운 화산도 없다. 또한, 한국의 하늘에도 구름이 뜨지만 태풍을 휘몰아 오는 그런 암운은 없다. 여름에는 때때로 하늘을 덮고, 우뢰소리로 사람을 놀라게 하지만, 추석이 되면, 동산에 떠오르는 중추명월에 자리를 비켜 주는 그런 구름이다. 세상 또 어디에 흰구름 날아간 뒤의 맑은 한국 하늘의 어여쁨이 있을까! 이 맑은 하늘 밑, 부드러운 산수 속에 그 동심 같은 한국의 백성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의 미의 세계요, 이 자연의 미가 바로 한국의 미다. 여기에서 어떻게 사색을 요구하는 괴이한 미가 나타나고, 인공의 냄새 피우는 추상과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 되풀이하지만, 한국의 미를 한 마디로 말 하면, 그것은 바로 "자연의 미"라 할 것이다.

--김원룡, "한국의 미"

위 글은 얼마나 자세히 소주제문(맨 첫문장)을 뒷받침하고 있는가. 이런 단락을 읽고 나면 그 단락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내용을 환히 알게 되고 이해와 공감을 가지게 된다. 각 단락이 이만큼 풍부한 자료를 가지고 뒷받침되어야만 글의 무게와 깊이가 유다르게 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이 뒷받침이 없이 고립시켜 내세우는 문장은 강조 효과를 낼 수가 없다. 여러 문장을 한데 어울려 단락을 심도있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걸핏하면 한 문장을 따로 내세워 독자의 시선을 끌려 하고 있다. 이것을 어떤 이는 강조 단락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강조법이다. 가령,

[보기 6.19]

그날 이후, 나는 못생김에 대한 참가치를 인식하게 되었다.

따라서 기찬 미인이 못될 바엔 기찬 박색이 오히려 매력적 이라는 소신(?)을 갖게 되었고. 생각이 이렇듯 확고해지니, 돼지 눈엔 돼지만 보인다고 못생긴 얼굴을 예찬할 수 있는 증거자료도 발견되지 않는가. 아니 전에는 무심히 듣고 본 자료가 내 소신의 증거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 중 두 가지만 들면, 곧 신라의 시조(始祖)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 북부여왕 금와(金蛙)이다. --유안진, " 차라리 태어나지 말 것을" 중에서

이런 글은 내용적인 강조법을 무시하고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면만을 지나치게 쓰고 있는 것이다. 단락의 조직을 내용적으로 강화하지 않고 거의 각 문장을 따로 내세워 독자의 시선 만을 끌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눈에 잘 띄게 딴 줄로 써 놓아도 독자가 그것을 이해 납득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따라서 자세한 설명이나 뒷받침은 하지 않고 독자의 시각에만 호소하려는 글은 내용도 깊지 못한 얄팍한 글이 되기 십상이고 강조 효과도 없다. 일반으로 부질없는 줄바꾸기는 강조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 온다. 다음 보기에서처럼 단락을 충실히 발전시키지 않고 새 단락을 만들다보니 어느 단락도 소주제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보기 6.20]

방 안에 햇발이 쫙 퍼졌을 때 뻐꾹이 우는 소리에 옅은 잠이 깨었다. 가슴이 후들후들 떨렸다. "뻐꾸우욱" "뻐꾸우욱" 하는 소리도 나고 "뻑꾹" "뻑끅" 마디마디를 뚝뚝 끊어서 우는 소리도 들렸다.

어느 것이나 내겐 다아 서글픈 소리였다. 그 중에도 "뻐꾸우욱" 하는 마디 없는 소리가 더 마음을 흔들었다. 뻐꾹이도 세상에 무슨 원통한 일이 있고 슬픈 일이 있는가봐. 그렇지 않으면 어째서 저리 섧게 울랴.

문을 열고 뻐꾹이 우는 방향을 찾아 보았다. 앞산 푸른 숲 그득히 서 있는 데서 우는데 그 숲 속엔 안개도 끼어 있어서 바람이 숲을 지날 때면 안개가 푸른 숲 위에 물결같이 넘실 거렸다. 그런 데서 뻐꾹은 자꾸만 울고 있었다. 울어라. 울어라.

-- 최정희, "정적기(靜寂記)" 중에서

위 글은 모두 한 소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3단락의 형식으로 나뉘어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어느 것도 강조 효과를 볼 수가 없고 소주제의 통일적인 부각에도 모자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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