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철의 '이순신 오해와 진실'(7)]

뼛속까지 존명사대에 사로잡힌 선조의 애걸복걸
명-일본, 평양과 한성에서 강화협상, 외교-군사권 없는 조선은 구경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화의 7조
협상결렬과 일본의 보복전
명황제 칙사에게 대든 이순신 장군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는 변화무쌍한 시대... 외교력 실종, 망조!

7. 존재감 없는 조선 건너뛰기(passing)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역사를 잊은 민족은 재생(再生)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오늘의 우리의 딱한 처지를 보면 역사는 반복된다는 생각이 들고, 역사에 가정(Historical If)은 없지만 오늘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의 ‘오래된 미래’처럼 느껴진다.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선봉군이 부산포에 상륙한 뒤 파죽지세로 북상하자 선조는 4월 30일 한성을 떠나 몽진(蒙塵 임금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피난감) 길에 올랐다. 천신만고 끝에 5월 8일 평양성에 도착했다. 그러나 6월 2일 고니시의 제1군과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제3군이 선조의 뒤를 바싹 쫓아오자 다시 평양성에서 7월 3일 의주까지 밀렸다. 선조는 입버릇처럼 말했듯이, 여차하면 압록강 건너 명나라로 내부(內附 망명)할 참이었다. 그해 7월 10일 명나라 조승훈(祖承訓)은 5천여 명의 선발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와 17일 평양성을 공격했으나 패하고 요동으로 건너갔다. ‘왜적 따위’를 우습게 본 ‘대국의 천군(天軍)’이 가진 오만하고도 안하무인적인 자세 때문이었다. ‘부지피부지기 매전필태(不知彼不知己 每戰必殆)’, 즉 적을 모르고 아군조차도 모르는 싸움에서는 반드시 위태롭다는 것은 손자병법에 나와 있다.

임진왜란 조선군과 의병의 활동지.
임진왜란 조선군과 의병의 활동지.

한편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의 제2군은 7월 24일 함경도 산악 험지를 거쳐 여진족이 살고 있는 두만강 언저리 회령까지 올라갔다. 강 건너 여진마을을 습격했으나 만만치 않은 응전을 받고는 이내 철수했다. 그 즈음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가 왜군에 투항한 순왜(順倭)인 국경인(鞠景仁)의 밀고로 가토 군에게 사로잡혔다. 조선의 운명은 언제 꺼질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풍전등화(風前燈火) 형세였다.

뼛속까지 존명사대에 사로잡힌 선조의 애걸복걸

이런 상황에서 선조는 명나라 조정에 애걸복걸한 결과, 1593년 1월 7일 명 제독 이여송(李如松)은 본진 5만여 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왔다. 그리고 패장 조승훈과 ‘전시재상’ 류성룡(柳成龍) 등 조선군과의 연합작전으로 평양성을 공격, 마침내 함락시켰다. 명군은 불랑기포(佛狼機砲), 멸로포(滅虜砲), 호준포(虎砲) 등 화포를 발사하여 기선을 제압했다. 승기(勝機)를 잡은 이여송은 그 여세를 몰아 개성을 거쳐 벽제까지 남하했다. 그러나 1월 27일 경기도 고양의 여석령(礪石嶺 숯돌고개)에 매복해 있던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벽제관(碧蹄館) 전투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이여송의 명군은 개성으로 물러났다가 멀찌감치 평양으로 후퇴했다. 이때 류성룡은 이여송에게 후퇴해서는 안 되며 전열을 정비한 후 한양의 왜군 총본부를 쳐부숴야 한다고 애원하며 간청했다. 그러나 소귀에 경 읽기였다.

명-일본, 평양과 한성에서 강화협상, 외교-군사권 없는 조선은 구경꾼

조승훈의 1차 평양성 패배로 일본군 세력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음을 간파한 명나라 병부상서(국방장관) 석성(石星)과 경략 송응창(宋應昌)은 유격 심유경(沈惟敬)을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보내 평양 강복산에서 강화협상을 시작하였다. 밀고 당기는 우여곡절 끝에 1592년 9월 1일부터 50일 동안 휴전협정을 맺기로 결정했다. 그 후 이여송이 벽제관 전투에서 또 패배하자 1593년 4월 8일 용산에서 두 번째 강화회담이 열렸다. 그런데 이 두 회담에서 심유경과 고니시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조선 조정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다만 류성룡 등 몇몇 대신은 조선강토를 가지고 찧고 까불며 ‘밀거래’를 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

명나라를 어버이의 나라로 존경하는 존명사대(尊明事大) 정신이 뼛속까지 박힌 선조는 왜란 초, 항왜원조(抗倭援朝 왜군을 물리치고 조선을 도움)의 기치를 내건 명나라 장군에게 조선의 외교권(外交權)과 군통수권(軍統帥權)을 모두 넘겨주었다. 그랬기에 명과 일본 사이의 강화협상에서 조선의 존재감은 없었다.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와 명나라 심유경의 강화회담. 출처=드라마 징비록.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와 명나라 심유경의 강화회담. 출처=드라마 징비록.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화의 7조

1593년 6월 28일 진주성 2차 공방전이 한창일 때 명나라 사신 사용재(謝用梓)와 서일관(徐一貫)은 고니시 유키나가를 따라 규슈 나고야성(名護屋城)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났다. 히데요시는 명나라 사신에게 화건 7조(和件 7條)를 제시했다.

첫째, 명황제의 왕녀를 일본 천황에게 시집보낸다.

둘째, 감합(勘合)무역(조공형식 제한무역)을 부활한다.

셋째, 일, 명 양국의 대신은 우호의 서사(誓詞)를 교환한다.

넷째, 조선 8도 가운데 북쪽 4도와 한성(서울)은 조선에게 돌려주고 남쪽 4도(경기, 충청, 전 라, 경상)는 일본에 할양한다.

다섯째, 북쪽 4도를 돌려주는 대신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일본에 인질로 보낸다.

여섯째, 포로로 잡은 두 조선 왕자(임해군, 순화군)는 돌려보낸다.

일곱째, 조선의 대신은 일본을 배반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목적은 명군은 싸우지 않고 서둘러 전쟁을 끝내는 것이고 일본은 전쟁을 확대하지 않고 조선 남부 4도를 할양받아 조선 지배를 위한 전초기지를 확실하게 보장받는 것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화건 7조는 명황제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임을 알고 명 사신 심유경(沈惟敬)과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 군승 겐쇼(玄蘇)는 화건 7조 대신에 일본의 항복문서를 위작(僞作)하여 명황제(神宗)에게 바쳤다.

협상결렬과 일본의 보복전

그러나 이억만리 떨어진 곳의 사정을 잘 모르는 명황제 신종(神宗)은 ‘항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를 일본왕(日本王)으로 임명한다고 하자 1596년 9월 2일 히데요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올라 강화교섭을 결렬시켰다. 그리고 조선 남부 4도를 점령하기 위하여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히데요시는 명나라에 대한 보복조치로 조선 땅, 특히 전라도(赤國 적국으로 표현) 지방에 대한 보복 살육전을 벌여 피의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남원성이 함락되었고 수백차례 분탕질과 노략질이 자행되었다. 특히 백성들의 수급(首級 머리) 대신 코와 귀를 잘라 전과(戰果)로 보고했다. 왜병 1인당 3개 이상씩 할당을 했는데 조선 관군과 명군은 물론이고 수훈을 세우기 위해 일반 백성들의 코와 귀까지 무자비하게 잘라갔다.

이 역시 교토(京都)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위패가 안치되어 있는 도요쿠니진쟈(豊國神社) 건너편에 귀무덤, 이총(耳塚)으로 남아있다. 1597년 7월 5일 강화협상에서 심유경(沈惟敬)과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기연출이 들통나자 심유경은 경남 의령에서 명나라 장수 양원(楊元)에게 체포되어 목이 잘렸다.

명 황제 칙사에게 대든 이순신 장군

1594년 3월 명나라 황제 특사인 선유도사(宣諭都司) 담종인(譚宗仁)은 “왜군을 절대 토벌하지 말고 조선군을 모두 해체해 고향으로 돌려보내라”는 금토패문(禁討牌文)을 이순신 장군 앞으로 보내왔다. 왜적이 남해안 곳곳에 성을 쌓고 진을 치고 있는 마당에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당시 명나라는 조선을 빼놓은 채 왜와 강화교섭중이었다. 그런데 감히 번방(藩邦)의 일개 조선 수군 장군가 명 황제의 사신에게 항의답서를 올린다는 것은 목숨을 내 놓은 거나 다름없는 처사였다. 장군은 ‘단 한 척의 적선도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편범불반(片帆不返)’의 정신으로 이런 과감한 일을 결행했다.

에도시대 말기인 1853년 출간된 '회본 조선정벌기'에 나오는 이순신 장군(왼쪽). 삽화 해설에 "용맹함이 조선 제일"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에도시대 말기인 1853년 출간된 '회본 조선정벌기'에 나오는 이순신 장군(왼쪽). 삽화 해설에 "용맹함이 조선 제일"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장군은 이후 9월 29일 장문포의 왜군을 공격하기 위해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김덕령(金德齡) 등과 함께 수륙 합공작전을 펼쳤지만 일본군이 성안에서 웅크리고 나오지 않아 이렇다 할 전과(戰果)를 올리지 못했다. 그렇지만 장군은 10월 1일에는 영등포 해전, 10월 4일에는 제2차 장문포 해전을 계속해서 벌여나갔다. 세치 혀로 말하는 외교와 달리, 군인은 무력으로 적을 토벌해야 하는 법이다.

1594년(선조 27) 조선 대표 의승장(義僧將) 유정(惟政, 四溟大師)은 단신으로 서생포왜성에 가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4차례 걸쳐 휴전을 위한 강화회담을 벌였다. 그러나 가토는 조선 남부 4도 할양 등 무리한 요구를 했으므로 결렬되었다. 1594년 명과 화의가 어느 정도 진척되자 1595년 6월 28일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부산포, 죽도, 가덕도 왜성 등 몇 개를 남겨두고 나머지는 불태우고 일본군은 본국으로 철수했다.

1595년(선조 28) 2월 10일 선조실록이다.

“명의 유격장군 진린(陳璘)이 1월 12일 죽도(김해)왜성에 도착한 뒤 이곳에서 하루 숙식한 후 13일 아침에 출발하여 오후 1시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있는 웅천왜성(진해)에 도착했다. 여기서 명의 대표인 진린, 담종인, 유대무와 고니시 유키나가, 현소, 죽계 등 일본대표는 상호 철군을 위한 화의(和議)를 시작했다.”

이 때 시종수행원인 접반사(接伴使)로 따라 간 이시발(李時發)이 쓴 당시의 상황 기록을 보면 죽도왜성 및 웅천왜성의 모습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정월 12일 죽도의 진영에 있는 소장이 배 위에 와서 보고 식사를 청하여 그대로 그곳에서 잠을 잤다. 그 진영의 넓이가 평양성 정도나 되었고 삼면이 강에 임해 있었으며 목채과 토성으로 둘러싸였고 그 안에 석성을 쌓았다. 웅장한 누각은 현란할 정도로 화려하고 크고 작은 토우(土偶)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1만여 명의 병사를 수용할 만한 크기였다. 성 밑에는 크고 작은 선박들이 줄지어 있었고 그들에게 붙어사는 우리 백성들은 성 밖에 막을 치고 곳곳에서 둔전(屯田)을 일구거나 물고기를 잡아 생활하였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 되는 변화무쌍한 시대...외교력 실종, 망조!

왕은 피난갔다 한성으로 돌아왔고 백성은 버려져 왜군들에 의지해 먹고살고 있는 모습이다. 외교권과 군사작전권이 모두 없는 선조의 조정은 그저 제3의 관찰자로서 명과 왜의 강화협상을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꿍꿍이속을 가졌는지 귀동냥하는 형편이었으니 참으로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구한말 상황. '장님' 조선인을 밟고 있는 일본군과 청군 너머의 러시아군. (위)러시아와 한판 붙는 일본군, 뜯어말리는 영국인, 뒤에서 상황주시하는 미국인. (아래)
구한말 상황. 조선의 '장님'을 밟고 있는 일본군과 청군 너머, 호시탐탐 노리는 러시아군. (위) 러시아와 한판 붙는 일본군, 말리는 영국인, 상황주시하는 미국인. (아래)

나라의 운명이 타인에 의해서 찧고 까불어지는 형국! 이 장면은 오늘날에 기시감으로 또렷이 떠오른다. 구한말에는 청, 일, 러시아, 미국, 영국, 독일 등 열강들의 먹잇감이었고 한국전쟁 때는 휴전회담의 당사자(미국, 중공, 북한)도 아니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고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는 변화무쌍한 시대다. 안미일(安美日), 안보는 미국과 일본으로 공식화되어 왔지만, 그마저 깨지고 있다. 오호! 어쩌면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이처럼 딱 맞아 떨어지고 있는가. 섬뜩하다. <7회 연재끝>

 

                                           <김동철 박사 약력>

▲교육학박사

▲이순신 인성리더십포럼 대표

▲이순신리더십 국제센터 운영자문위원장

▲성결대 교양학부 객원교수

▲전 중앙일보 기자-월간중앙 기획위원

▲경복고-한국외국어대학교-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명지대 대학원 졸

▲저서: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우리가 꼭 한번 만나야 하는 이순신(이순신 리더십 특강)’ ‘이순신 유적 답사기1’

▲논문: ‘이순신의 청렴 인성 리더십’ ‘나라사랑 충, 부모사랑 효, 백성사랑 애민, 부하사랑 소통, 거북선 창제의 창의력’ ‘충무공 이순신 시조에 나타난 인성’ ‘이순신과 원균의 리더십’ 

 

저작권자 © 자연치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