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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철의 ‘이순신, 오해와 진실’(1)] 청소년 뇌리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이순신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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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철의 ‘이순신, 오해와 진실’(1)] 청소년 뇌리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이순신 장군
  • 김동철 박사
  • 승인 2019.05.0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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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4년 전 서울 건천동서 탄생...청소년들 관심 적어 안타까워
선공후사, 신상필벌, 임전무퇴, 유비무환, 살신성인 정신 본받아야

김동철 박사.
김동철 박사.

양력 4월 28일은 474년 전 이순신 장군(1545~1598)이 서울 건천동(마른내골, 충무로 인현동 부근)에서 태어난 날이다. 이날 언론보도를 보니 이순신 장군 탄신 기념행사가 아산 현충사 일원에서 열렸다는 소식밖에 없다. 이렇게 가다가는 청소년들의 뇌리에서조차 점점 사라져가는 게 아닌가 하는 조바심에 입술이 바싹 타들어간다.

이순신(李舜臣) 장군은 젊은 시절 함경도에서 여진족을 방어했고 40대 중반에 정읍현감(종6품) 재임 때 우의정 겸 병조판서인 류성룡의 추천으로 무려 7단계를 뛰어올라 1591년 2월 전라좌도수군절도사(정3품)로 임명되었다. 오늘날 여수의 진남관(鎭南館 국보 제304호)은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해 1599년 4대 통제사 겸 전라좌수사인 이시언이 정유재란 때 불탄 진해루 자리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자마자 관할 5관 5포의 전투준비태세를 점검했다. 5관은 지금의 5개 지방자치단체인 여수, 순천, 광양, 고흥, 보성이고 5포는 수군진으로 여수 방답진과 고흥 사도진, 여도진, 녹도진, 발포진이다. 이곳 수장들은 임진왜란-정유재란 7년 내내 이순신 장군과 함께 동고동락해 나는 ‘독수리 5형제’라고 이름 지었다. 전라좌수영은 그래서 구국(救國)의 성지(聖地)로 불린다.

광화문의 이순신장군 동상
광화문의 이순신장군 동상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바로 하루 전인 1592년 4월 12일 난중일기에는 “거북선에서 지자, 현자총통발사를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사 부임 직후부터 5관 5포의 군사훈련, 군기, 군량, 군선 점검 및 실전에 대비한 훈련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4월 13일 왜수군 1군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1만 8천여명이 부산포에 상륙하자, 경상좌수사 박홍과 경상우수사 원균은 각 진의 병선과 무기를 모두 바다에 침몰시키고 식량을 태워버린 뒤 도주했다. 이른바 청야(淸野) 작전을 실시한 뒤 왜군에게 쫓기는 ‘패잔병’ 신세가 됐다. 원균은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에게 긴급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여수 진해루에서 이순신 장군과 휘하 장수들이 모여서 경상도 부원(赴援), 즉 경상도로 진출해 도와주는 문제로 설왕설래했다.

그때 녹도 만호 정운과 군관 송희립이 “적을 토벌하는데 우리 도와 남의 도가 따로 있느냐. 당장 나아가자”고 역설하자, 이순신 장군은 조정의 출전명령을 받은 뒤 5월 7일 거제도로 진출, 옥포에서 첫 해전을 벌여 승리했다. 이순신 함대는 본영인 여수 앞바다에서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어선) 46척 등 모두 85척의 군단으로 출전했다. 고성군 당포 앞바다에서 원균의 판옥선 4척, 협선 2척과 합세해 거제도 송미포를 거쳐 5월 7일 마침내 옥포 근해에 이르자 척후장인 사도첨사 김완이 적을 발견했다는 신기전을 쏘아 올렸다.

물령망동(勿令妄動) 정중여산(靜重如山)! 이순신 장군은 휘하 장졸들에게 “허튼 행동을 일체 하지 말고 산처럼 무겁게 신중히 처신하라”고 명령했다.

이 때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가 지휘하던 왜선 30여 척은 홍백기를 달고 해안에 흩어져 있었고, 왜적들은 상륙해 민가의 재물을 노략질하고 있었다. 조선 수군은 적선에 총통을 맹렬하게 발사해서 왜선 26척을 분멸시켰다. 임진왜란 첫 승리였다.

아군은 달아나는 왜적을 추격해 거제시 장목면 영등포를 거쳐 창원시 합포에서 5척, 다음 날 통영 적진포에서 11척을 불태우거나 박살내고 9일 본영인 여수로 돌아왔다. 이순신 장군은 이 전공으로 가선대부(종2품)의 품계를 받았다. 이순신 장군은 5월 29일 거북선을 사천해전에 처음으로 출격시켰으나 그만 조총을 맞아 부상했다. 이어 당포, 당항포, 율포해전에서 연승행진을 했고 7월 8일 한산대첩에서는 학익진(鶴翼陣) 전술로 왜수군을 격파했다. 이순신 장군은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전선 48척으로 전라 좌우수군 연합함대를 만들었고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선 7척과 합세하여 전선 55척의 조선 수군연합함대를 갖췄다. 7일 당포에 머물 때 목동 김천손으로부터 일본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가 이끄는 함대 73척(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거제 견내량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정보를 접했다.

통영의 이순신 장군 동상
통영의 이순신 장군 동상

견내량은 거제도와 통영만 사이에 있는 긴 협수로로 길이가 약 4km에 폭은 500m 내외이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 앞바다로 적의 함대를 유인하기 위해 먼저 방답첨사인 이순신(李純信)이 이끄는 판옥선 5~6척을 보냈다. 그리고 도망가는 척 뒤로 물러서자 적의 함대는 맹렬히 추격을 해왔다. 이때 부근 작은 섬에 매복해있던 조선 판옥선이 나와 학의 날개를 펼친 모양새로 학익진의 포위작전을 펼쳤다. 거북선이 돌격의 선봉에 섰고 판옥선에서 지자, 현자총통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왜수군함대는 아연실색, 당황하며 우왕좌왕했다. 조선수군은 중위장 권준이 일본 층각대선인 아다케부네 한 척을 나포한 것을 비롯해 왜선 47척을 부수거나 불사르고 12척을 나포하였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뒤에서 독전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패잔선 14척을 이끌고 김해 쪽으로 도주했다. 왜병 400여 명은 당황하여 한산섬으로 상륙했다가 먹을 것이 없자 땟목을 만들어 뒷날 겨우 탈출하였다. 이때 마나베 사마노조(眞鍋左馬允)는 자신의 배가 소각되자 섬에서 할복하였다. 이 한산대첩은 도원수 권율의 행주대첩, 진주목사 김시민의 진주성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때의 3대 대첩의 하나로 꼽힌다. 이순신 장군은 그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 정2품), 이억기와 원균은 가의대부(嘉義大夫 종2품 상계)로 각각 승서(陞敍)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연전연승의 여세를 몰아 9월 1일 부산포의 왜군 본진을 공격해 120여척의 적선을 분멸한 뒤 다음해인 1593년 7월 15일 한산도로 수군진을 전진배치했다. 그리고 8월 15일 선조로부터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종2품)로 임명되는 영광을 안았다. 이때 한산도 진영에 객사인 운주당(運籌堂)이 지어졌는데 이순신 장군은 그 안에서 왜병(倭兵)을 깨뜨리는 전략을 짜고 군사에 관한한 상하의 의견을 모두 듣는 소통의 장소로 만들었다. 운주당은 오늘날 제승당 자리이다.

여수의 이순신 장군 동상
여수의 이순신 장군 동상

현재 통영의 세병관(洗兵館 국보 제305호)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1605년 6대 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이경준이 지은 것이다. 그러니 이순신 장군의 발길은 닿지는 않았다.

필자는 400여 년 전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가진 임진왜란의 현장과 이순신 장군의 23전 23승의 전적지를 찾아나서 탐방 및 촬영을 한 지가 벌써 10년째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의 혼이 밴 유허지를 답사를 하면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여수와 통영은 왜 이순신 장군을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 가두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것은 비단 여수와 통영뿐만 아니었다. 이순신 장군과 뗄레야 뗄 수 없는 명량대첩의 해남과 진도군, 최후의 노량해전 현장인 남해군 관음포, 부산, 진해, 사천, 고성, 완도, 고흥, 장흥 등지를 답사하면서도 이 의문점은 여전히 명쾌하게 풀리지 않았다.

‘여수의 이순신’과 ‘통영의 이순신’ ‘아산의 이순신’ ‘○○의 이순신’이 따로 있다는 말인가?

정조대왕은 “우리 열조(여러 임금들)로 하여금 중흥의 공을 이룰 수 있게 뒷받침한 것은 오직 충무공 한 사람의 힘이다”라고 말했다. 정조는 이순신이 임진왜란 때에 조선의 꺼져가는 운명을 구한 은인이라고 생각하였지만, 그가 거기에 합당한 대우를 받고 있지 못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정조는 아산 이순신 묘에 신도비를 세워주고, 영의정으로 추증하였다. 그리고 “이순신이 중국에 태어났다면 제갈공명과 누가 우세할지 자웅을 겨루기 어려웠을 것이다”고 말하고 왕의 금고인 내탕금(內帑金)을 내서 흩어져 있던 이순신의 자료를 모아 이충무공전서를 발간했다. 왕이 신하의 책을 내주는 일은 법도에 없다는 대소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말이다.

또 한 사람이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이순신 유적지를 찾아다니다 보면 박 전 대통령의 흔적을 발견하기 어렵지 않다.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1970년대 현충사 성역화작업, 한산도 한산대첩비 글씨, 노량해전 후 시신이 안치됐던 남해 관음포 이락사(李落祠) 현판과 대성운해(大星隕海 큰 별이 바다로 떨어지다) 휘호, 충렬사 현판과 ‘보천욕일(補天浴日)’이란 글씨도 박 전 대통령의 친필 휘호다. 보천욕일은 ‘찢어진 하늘을 수리하고 해의 먼지를 목욕시킨다’는 뜻으로 ‘위대한 업적’을 뜻한다. 게다가 충렬사 뒤 가묘터의 식수(植樹)도 발견할 수 있다.

공직생활 22년 동안 3번의 파직과 2번의 백의종군으로 롤러코스터를 탄 파란만장한 삶의 주인공이 보여주었던 선공후사, 신상필벌, 임전무퇴, 유비무환, 살신성인의 정신은 바로 오늘날 내우외환에 처한 대한민국에서 본받아야할 가치가 아닐 수 없다. 이순신 장군의 이타적 애국심의 발현을 현양하는 행위를 어찌 정권(정조와 박정희) 유지의 수단이라고 치부할 것인가? 그것은 엄연한 역사 부정이며 외눈박이의 편향된 시각일 것이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가진 위대한 정신적 유산을 스스로 깨트리고 쪼개서 파편화하고 지역화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동북아의 지정학적 요인은 달라지지 않고 있다. ‘고립된 섬’에 사는 우리로서는 제일 급선무가 나라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일이다. 이순신 장군의 필사즉생(必死則生)의 유비무환(有備無患) 정신과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롭다는 류성룡의 망전필위(忘戰必危) 정신! 이 위국헌신의 징비(懲毖) 정신을 국민정신으로 승화시키는 데 좌우를 돌아보면서 눈치를 봐야 한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오호 통재라!

                                      <김동철 박사 약력>

▲교육학박사

▲이순신 인성리더십포럼 대표

▲이순신리더십 국제센터 운영자문위원장

▲성결대 교양학부 객원교수

▲전 중앙일보 기자-월간중앙 기획위원

▲경복고-한국외국어대학교-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명지대 대학원 졸

▲저서: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우리가 꼭 한번 만나야 하는 이순신(이순신 리더십 특강)’

‘이순신 유적 답사기1’

▲논문:

‘이순신의 청렴 인성 리더십’

‘나라사랑 충, 부모사랑 효, 백성사랑 애민, 부하사랑 소통, 거북선 창제의 창의력’

‘충무공 이순신 시조에 나타난 인성’

‘이순신과 원균의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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