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김갑수 선생]
- 다산은 우리 역사에 기여한 인물일까 -

김갑수 선생.
김갑수 선생.

“나는 국력 쇠퇴의 책임을 일부 실학파에서부터 찾을 수 있었다. 다산을 비롯해서.”

“정약용 말씀입니까?”

“그렇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삼촌. 그러나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지요.”

“나중에 내 글을 읽으면 안다.”

“알겠습니다.”

“다산이 천주교 신자였던 것은 알고 있지?”

“압니다.”

“그의 역사관이 조선적이었을까?”

“아니라는 근거도 되겠군요.”

“청에서 조선에 파견하는 사신을 칙사라 불렀다.”

칙사들은 대포, 시계, 망원경, 천체학, 기하학을 조선에 전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전해 준 것이 가톨릭이었다. 종교와 문화는 상보적으로 작용한다. 다산이 서양 문물을 먼저 섭취하여 천주교 신자가 된 건지 아니면 천주교 신자가 되고 나서 서양 문물에 관심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다산은 서양 과학에 가장 흥미와 소질을 보인 소장 관료였다. 그가 천주교를 만난 것은 벼슬길에 오르는 시점과 거의 같았다.

“나는 다산이 개화· 계몽주의자의 시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에 대한 평가를 달리 해야 한다.”

“계속 말씀하시지요.”

정약용 관련 삽화.(출처=김갑수 선생 페북)
정약용 관련 삽화.(출처=김갑수 선생 페북)

김영세는 다산은 서양 과학 기술의 합리성에 도취되면서 문명진화론으로 빠져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그는 조선의 사회 제도나 역사, 풍습, 풍속 등에 강한 반감을 갖게 되었다. 그는 풍습과 풍속 같은 것도 개혁을 통해 혁신될 수 있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런 그를 가상하게 본 것은 당대의 왕 정조였다. 20대의 다산보다 열 살 많았던 정조는 다산 이상의 교양과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정조는 과학 기술의 유용성에 대한 인식도 다산에 뒤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다산에게 수원성 축조를 맡긴 것이었다. 다산은 정조의 기대에 부응하였다. 과학 기술을 응용한 건축술은 2년 7개월 만에 아름답고 단단한 수원성을 완성하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다산은 더욱 서양 과학을 신봉하게 되었고 그것을 응용하는 데 성공한 자기 자신에게 자족감을 느꼈다. 그런데 그는 놓치고 있는 것이 있었다. 국왕이 직접 관장한 공사치고 공기가 단축되지 않은 것은 거의 없었으며 정작 그 수원성이 지리상 쓸모가 별로 없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의욕적으로 일했던 그가, 나중에 유배 가서는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분야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가 곧 망한다.’고 하며 조선을 총체적으로 부인했다. 유배 중 역저라고 알려져 있는 <경세유표>의 집필 동기를 보면, ‘묵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라고 되어 있다.

“이런 주장은 우리 것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본다. 그는 중국 고전과 경학과 경세학 분야는 많은 독서를 했겠지만 정작 조선의 것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천주교 신자인 그는 황사영 백서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비판하지 않았다. 신유박해 당시 충청도 산중에 숨어 있던 천주교 신자 황사영은 하얀 비단에 비밀 편지를 썼다. 그 편지는 북경에 머물고 있는 천주교 실력자인 포르투칼 구베어에게 보내려 한 것이었다. 그는 조선의 천주교 부흥을 위해 재정 원조를 요구하면서, 조선을 개교(改敎)시키려면 대포와 선박 1,000척, 병사 5, 6만을 가지고 위협하면 된다고 했다.

“자고로 매국노라는 자들은 꼭 외국에 돈을 비밀로 요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날카로운 발견이십니다.”

“그런 말 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그래도 다산은 선의의 계몽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는 ‘나쁜 우리 것이 좋은 서양 것보다는 그래도 우리에게는 덜 나쁘다’는 역사의식이 없었을 뿐이다. 그러나 어떻든 그는 작금에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는 민족개조론의 시조 같은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과는 시차가 너무 크지 않습니까? 그 사이에 순조와 철종 시대가 있었잖습니까?”

“아니다. 중간에 김옥균이라는 사람이 있다.”

영세는 내친 김에 김옥균 이야기를 문수에게 들려주었다.

“나는 정약용에서 김옥균으로 이어지는 개화· 계몽 지식인들 때문에 이 나라가 결딴났다고 본다. 부부간에는 이혼이란 게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부부 사이를 깨지 않으려면 잘 났든 못 났든 감싸 안고 살아야 한다. 제 남편 제 마누라는 못났다고 하면서 남의 남편, 남의 마누라는 멋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든지, 아니면 제 남편, 제 마누라에게 너는 인격을 개조해야 한다고 윽박지른다면 그 가정은 파탄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냐? 섣부른 개화· 계몽은 이 나라, 이 민족의 파탄을 조장하게 된다. 나라와 민족은 이혼할 수도 없는 것 아니냐?”

그날 김영세가 조카 앞에서 내린 결론은, ‘무모한 개화주의는 사악한 계몽주의의 어머니’라는 것이었다.

- 이상 2013년 발간, 지금 품절 상태인 김갑수 졸작 소설 <중경의 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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