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민용 ‘우리 말글 산책’(21)]

[편집자 주] ‘글쓰기’ 신문은 ‘엄민용 기자의 우리 말글 산책’을 주 1회 연재합니다. 경향신문의 엄민용 기자(부국장)는 정확한 우리 말글 사용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전문가입니다. 대학과 기업체, 관공서 등에서 글쓰기 바로쓰기 특강 강사로 명성을 얻고 있습니다.

 

“극중 이신영은 일에서는 엄청난 승부욕을 보이는 반면 사랑 앞에서는 쑥맥도 이런 쑥맥이 없다는 점이 무척 재미있어요.”

“예능에서 가수로 돌아온 김종국 ‘발라드 잘 불러도 연애는 쑥맥’”

최근 일간지들에 실린 표현입니다. 언뜻 봐서는 아무 문제가 없는 듯합니다. 하지만 이들 문장 중의 ‘쑥맥’은 바른말이 아닙니다.

“사리 분별을 못 하는 어리석은 사람을 일컫는 말”은 ‘숙맥’으로 써야 합니다. ‘숙맥’은 ‘숙맥불변(菽麥不辨)’에서 온 말인데요. 숙맥불변은 글자 그대로 “콩[菽]과 보리[麥]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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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인지 보리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과 ‘숙맥’을 ‘쑥맥’으로 쓰는 사람 중 누가 더 어리석을까요? 이럴 때 흔히 쓰는 말이 ‘도찐 개찐’입니다.

하지만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와 비슷한 뜻으로 쓰이는 ‘도찐 개찐’이나 ‘도낀 개낀’ 역시 바른말이 아니랍니다. ‘도 긴 개 긴’으로 써야 하는 말이죠. 여기서 ‘긴’은 “윷놀이에서 자기 말로 남의 말을 쫓아 잡을 수 있는 길의 거리”를 뜻하는 말입니다.

‘숙맥불변’을 ‘숙맥’으로 쓰는 예에서 보듯이, 넉 자의 한자성어를 두 자로 줄여 쓰는 말이 더러 있습니다. “어떤 일의 가능성이 매우 높음을 이르는 말”인 ‘십상’도 그중 하나입니다. “그렇게 놀다가는 시험에 떨어지기 십상이다”라고 할 때의 ‘십상’ 말입니다.

이 ‘십상(十常)’은 십중팔구(十中八九)와 같은 뜻의 말 ‘십상팔구(十常八九)’의 준말입니다. 그런데 이 십상을 ‘쉽상’으로 쓰는 사람이 더러 있더군요. 아마 우리말 ‘쉽다’에서 온 말로 잘못 알고 그리 쓰는 듯합니다. 그러나 ‘십상’은 한자말입니다.

우리말 중에서 순우리말은 3할 정도밖에 안 됩니다. 7할은 한자말입니다. 따라서 한자를 모르면 우리말도 잘못 쓰기 쉽습니다. 은근히 화가 나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언어 현실입니다.

‘삼수갑산’도 한자를 몰라 열에 아홉은 틀리는 말입니다. “어떤 결심을 단단히 하는 문맥에서, 무릅쓰거나 각오해야 할 최악의 상황을 강조하며 이르는 말”로 흔히들 ‘산수갑산’을 씁니다.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산수갑산’이 널리 쓰이는 것은 우리의 생활과 관련이 있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거나 ‘산 넘고 물 건너 죽을 고생하며 이곳에 왔다’ 등의 표현에서처럼 우리 생활에서 산(山)과 물[水]은 고생을 나타내는 의미로 쓰이곤 합니다. ‘산과 물=고생’이 뇌리에 박힌 까닭에 ‘산수갑산’을 별 의심 없이 바른말로 여기고, 그리 쓰는 것이죠.

그러나 ‘산수갑산’은 ‘삼수갑산(三水甲山)’으로 써야 합니다. 여기서 ‘삼수’와 ‘갑산’은 함경남도의 땅이름입니다. 이들 두 지방은 조선시대 귀양지 중 하나로, 사람이 살기에 아주 척박한 곳이라고 합니다. 길이 험해 사람이 드나들기 어렵고, 풍토병이 극성을 부리는 곳이라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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