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글쓰기’ 신문은 ‘엄민용 기자의 우리 말글 산책’을 주 1회 연재합니다. 경향신문의 엄민용 기자(부국장)는 정확한 우리 말글 사용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전문가입니다. 대학과 기업체, 관공서 등에서 글쓰기 바로쓰기 특강 강사로 명성을 얻고 있습니다.

 

“서희야, 이리 와. 엄마가 머리 빗어 줄게.”

“싫어. 내가 빗을 거야.”

“엄마가 예쁘게 빗어 준다니까.”

(필자가 아내를 째려봄)

“왜? 내가 또 잘못 말했어?”

“그래!”

“뭐가?”

“빗어 준다는 게 말이 돼!”

“왜 말이 안 돼. 빗어 주는 게 빗어 주는 거지, 그럼 뭐라고 해!”

“빗겨 줘야지, 어떻게 빗어 주나!”

“…… ? ? ? ? ……”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우리 집의 어느 날 아침 풍경입니다. 제 아내도 그러지만, ‘빗어 주다’ 따위의 말이 꽤 널리 쓰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남의 머리를 빗어 줄 수는 없습니다. 자기 머리를 빗을 때는 ‘빗다’를 쓸 수 있지만, 남의 머리에 빗질을 할 때는 ‘빗다’의 사역형인 ‘빗기다’를 써서 ‘빗겨 주다’라고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래 예문을 꼼꼼히 읽어 보세요.

①“나는 철수의 옷을 벗어 주었다” ㉠“나는 철수의 옷을 벗겨 주었다.”

②“나는 철수에게 옷을 입어 주었다” ㉡“나는 철수에게 옷을 입혀 주었다.”

③“나는 철수에게 밥을 먹어 주었다” ㉢“나는 철수에게 밥을 먹여 주었다.”

㉠㉡㉢은 말이 되지만 ①②③은 말이 안 됩니다. 또 아래를 보세요.

“옷을 벗었다” “옷을 벗겼다”

“옷을 입었다” “옷을 입혔다”

“밥을 먹었다” “밥을 먹였다”

왼쪽의 말은 나에게 내가 하는 동작입니다. 반면 오른쪽은 내가 남에게나 남이 나에게 하는 동작입니다. 이런 원리로 내 머리는 내가 빗을 수 있지만, 남의 머리는 빗을 수 없고 빗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좀 감이 잡히십니까?

그러면 여기서 퀴즈 하나. 방금 배운 것을 참고해서, “돈 따위를 나중에 받기로 하고 빌려 주다”를 뜻하는 말은 ‘꿔주다’가 맞을까요? 아니면 ‘뀌어주다’가 맞을까요?

이유가 뭔지는 모르지만, 눈치가 있으신 분들은 답을 알아채셨을 듯합니다. 만약 ‘꿔주다’가 바른말이라면, 퀴즈를 낼 일이 없겠지요. 맞습니다. 바른말은 ‘뀌어주다’입니다.

‘꾸다’는 “뒤에 도로 갚기로 하고 남의 것을 얼마 동안 (내가) 빌려 쓰다”라는 뜻의 말입니다. 반면 ‘뀌다(꾸이다)’는 “다음에 받기로 하고 남에게 돈이나 물건 따위를 빌려 주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그러니까 ‘꾸다’는 빌리는 사람이 ‘나’지만, ‘꾸이다’는 빌리는 사람이 ‘남’입니다. 따라서 ‘꿔주다’라고 하면 “내가 남에게서 꿔다가 (거저) 주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결론적으로 “나, 만 원만 꾸자”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꿔준 돈이나 갚아”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때는 “뀐 돈이나 갚아”라고 해야 합니다. 아니면 “꿔 간 돈이나 갚아”라고 하든가요.

끝으로 독자 여러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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