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은 부역자인가?
요시라 간계에 따른 선조의 부산포 공격 명령 불복종!
조정 당리당략 물리치고 병법 소신에 따라
원균, 뒤늦게 이순신 전법 알았으나... 등떠밀려 칠천량에서 패전
정탁, 경각에 달린 이순신 구명 신구차 올려 가까스로 목숨 구해
선조 뒤늦게 후회, 백의종군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용

5. 이순신의 항명과 신구차

이순신은 부역자인가?

이순신은 부역자(附逆者)였는가? 부역자는 적에게 달라붙어 아부하고 사리사욕을 챙기는 자를 말한다.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의 부산포 상륙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연인원 15만 8천여 명의 대군은 20일 만에 한성에 무혈입성을 했다. 서울-부산 간 거리를 400km라고 본다면, 하루에 20km를 달리는 파죽지세였음을 알 수 있다. 일본군은 무인지경으로 조선 강토의 산과 들을 갈랐다. 상주에서 이일과 충주에서 신립의 저항이 있었지만 전투기술에 숙달된 일본군의 조총 앞에서는 추풍낙엽에 불과했다. 선조는 가장 믿었던 ‘조선 최고의 장수’ 신립의 충주 패전 소식을 듣자마자 4월 30일 피난 보따리를 싸서 한양 도성을 나왔다. 무악재, 홍제천, 연신내, 삼송, 파주를 지나 임진나루를 건너 개성, 평양, 의주로 줄행랑치고 있었다. 후일을 도모하기 위한 작전상 후퇴였다. 백성을 버리고 임금이 도망갔다는 소리에 분노한 상민과 노비, 종 등 하층민들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 3개의 궁궐과 재판을 담당하던 형조와 노비문서가 보관되어 있던 장례원(掌隷院)을 불태웠다. 중요한 국보급 사료 또한 잿더미가 되었음은 물어보나 마나이다.

여수의 이순신 장군(사진=김동철 박사)
여수의 이순신 장군(사진=김동철 박사)

일본군이 20일 만에 폭풍처럼 한성에 들이닥칠 수 있었던 것은 천둥 같은 조총 소리에 도망치는 조선군의 유약함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백성들 가운데 스스로 왜군의 앞잡이가 되어 길을 안내하는 향도(嚮導)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백성을 버리고 도망친 나라님과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고 백성의 재물을 억지로 빼앗는 가렴주구(苛斂誅求)의 썩어빠진 탐관오리(貪官汚吏)에 대한 복수극이었다.

2군 대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남대문으로, 1군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동대문으로 입성하자, 백성들은 거리로 나아가 “우리 새로운 왕이 오셨다”고 만세를 불렀다. 백성들 가운데 자발적인 부역자(附逆者)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은 선조 임금에 대한 명령불복종, 그로 인해 왜군이 재침했다는 낭설에 따라 부역자로 치부해야 하는가?

요시라 간계에 따른 선조의 부산포 공격 명령 불복종!

1597년 2월 6일 선조의 체포령에 따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2월 26일 한산도 진영에서 한성으로 압송되었다. 3년 7개월 동안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었던 한산도 진영을 뒤로 하고 죄인이 되어서 떠나는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리고 3월 4일 의금부 감옥에 갇혔다. 사헌부가 지목한 죄명은 기망조정(欺罔朝廷) 무군지죄(無君之罪), 종적불토(縱賊不討) 부국지죄(負國之罪), 탈인지공(奪人之功) 함인어죄(陷人於罪), 무비종자(無非縱恣) 무기탄지죄(無忌憚之罪)였다. 즉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업신여긴 죄, 적을 쫓아가 치지 아니하여 나라를 등진 죄, 남의 공을 가로채고 모함한 죄, 한없이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다는 죄목이었다.

이렇듯 지엄한 왕의 명령을 감히 헌신짝 버리듯 차버렸으니 최소한 자신의 목을 내놓아야 하는 참수형 이상을 당할 처지였다. 그는 왜 스스로 이런 어마 무시한 죄인이 되었을까? 고니시의 휘하에 있던 이중간첩 요시라(要矢羅)의 반간계(反奸計) 전략에 휘말릴 수 없다는 게 이순신의 소신이었다. 그러나 선조와 조정에서는 요시라가 전해준 고급정보(가토가 며칠 날 부산포로 들어오니 이순신 수군이 먼저 나가 물리치면 조선이 안전할 것이다)에 따라 이순신에게 출동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일본군의 계략에 말리는 것이라면서 스스로 죄인임을 자처했다. 만약 부산포로 출동한다면 왜성이 즐비한 곳(거제, 진해 안골포, 김해, 가덕도)을 통과해서 부산으로 향해야 하는데 출동상황이 적나라하게 노출될 것이다. 부산 본진에서는 이미 방어를 철저하게 할 것이다. 따라서 이순신 전략상 손익계산을 두드려봤는데, 답은 육군과 수군이 합동작전을 펼치면 해볼만하다고 판단했다.

또 하나. 만약 총력전에서 패한다면, 조선의 안위는 보장되지 못할 것이다. 전투 와중에서 마지막 보루인 수군이 패퇴한다면 남해안 제해권을 상실하고 일본 수군은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접수하고 곧바로 서해로 진출, 금강-한강-임진강-대동강-청천강-압록강으로 진출할 것이다. 조선은 지도에서 영영 없어지고 선조는 다시 압록강 너머 명나라 땅 요동으로 가서 망명 정부를 세워야할 판이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이순신은 감히 왕의 명령을 거부했던 것이다. 더욱이 천리나 떨어진 조정에서 동인, 서인, 북인, 남인으로 나뉘어진 대신들의 당리당략과 설왕설래가 정답이 아니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조정 당리당략 물리치고 병법 소신에 따라

이순신은 군주가 명령해도 현장 지휘관은 출전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한 병법에 따랐다. 진나라 때 병법의 달인 황석공(黃石公)은 “출정하고 군대를 동원할 때는 장수가 단독으로 행해야 한다. 진퇴에 조정이 견제하면 공을 이루기 어렵다(出軍行師, 將在自專, 進退內御, 則功難成)”고 했다. 손자병법의 손무(孫武)도 비슷한 말을 했다. “전쟁의 형세가 이길 수 없으면 임금이 반드시 싸우라고 해도 싸우지 않는 것이 옳다.(戰道不勝 主曰必戰 無戰可也).”

요시라의 첩보를 처음 접한 경사우병사 김응서와 도원수 권율과 조정 대신들은 이순신 탄핵에 열을 올렸다. 특히 서인 윤근수는 이순신을 탓했고 대신 원균을 그 자리에 보내야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마침내 선조는 성균관 사성인 남이신을 한산도로 내려 보내 진상을 파악하라고 했다. 남이신이 전라도에 도차하자, 이순신이 모함을 받고 있다면서 하소연을 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나 서인 남이신은 조정에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다. 선묘중흥지(宣廟中興誌)의 나온 기록이다.

“가등청정이 해도(海島)에서 7일 동안이나 머물러 있었는데 만일 우리 군사가 쳐들어갔더라면 청정을 잡아올 수 있었을 것인데 순신이 머뭇거려 그만 호기를 놓쳤다.”

이와 관련 류성룡의 징비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요시라는 다시 김응서를 찾아가 ‘청정이 벌써 상륙했는데 조선에선 왜 막아서 잡지 않았는지 매우 안타까웠다’고 하고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잡아와서 국문하기를 청했다. 좌의정 김응남도 ‘원균이 먼저 싸우러 나갔는데 순신이 구하지 않았다.’ 급기야 1월 27일 이순신을 잡아오게 하고 대신 원균을 통제사로 삼았다.”

다음은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자 기록이다.

“서인 윤두수는 이순신이 조정의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고 싸움에 나가기 싫어 한산도로 물러가 지키고 있는 바람에 큰 계책이 실현될 수 없었던 것이니 이에 대하여 신하들로서 누가 통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순신은 조용한 것 같지만 거짓이 많고 앞으로 나서지 않는 사람이다.”

선조실록 1597년 2월 4일자 기록.

"사헌부에서 이순신은 나라에 막대한 은혜를 입어 순서를 뛰어넘어 한껏 높은 자리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온 힘을 다하여 싸우지 않고 바다 가운데서 군사를 끼고 앉아 이미 다섯 해를 보냈다. 마침내 적이 바다를 덮고 밀려와도 길목을 지켰다거나 선봉을 막아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은혜를 배반하고 나라를 져버린 죄가 크다. 붙잡아다가 신문하고 법대로 국문하여 벌을 내려야 한다.”

전쟁 상황 판단을 할 때 ‘왜군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조정 대신들의 탁상공론과 현지 지휘관의 상황판단은 훨씬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이래저래 장군은 닭이 울 때까지 잠을 못 이루는 나날이 많았다.

선조는 조급했다.

“어서 빨리 가서 왜장을 잡아오란 말이야!”

저간의 사정을 읽고 있던 전라도 병마사 원균이 1597년 1월 22일 선조에게 “부산 앞바다에서 일거에 왜선을 제압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서장(書狀)을 올렸다. 선조는 5일 후 1월 27일 원균을 경상 우수사로 임명했다.

절체절명의 군사작전을 기획할 때 군최고통수권자의 의중을 파악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조선 전체의 안위(安危)를 생각해서 심사숙고해야하는 것인가?

왜란 초기 동인으로서 이순신을 두호했던 이산해는 북인의 영수가 되고 류성룡과 갈라섰다. 그런 이산해가 서인 윤두수, 윤근수 형제와 함께 원균을 엄호했다.

“나는 이순신의 사람됨을 자세히 모르지만 성품이 지혜가 적은 듯하다. 임진년 이후 한 번도 거사를 하지 않았고, 이번 일도 하늘이 준 기회를 취하지 않았으니 법을 범한 사람을 어찌 매번 용서할 것인가. (삼도수군통제사를) 원균으로 대신해야겠다.”

원균, 뒤늦게 이순신 전법 알았으나... 등떠밀려 칠천량에서 패전

선조는 원균의 소원대로 그를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했다. 그런데 자신만만해 하던 원균은 막상 부산포를 공격하려니 육군과 수륙합동작전을 펼쳐야 한다는 이순신의 논리가 맞았음을 뒤늦게 인정하고 차일피일 공격을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 선조의 명을 받은 권율에게 불려가 곤장을 맞고서 술에 만취한 상태에서 ‘그냥’ 출전했다. 원균은 그해 7월 16일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수군이 거의 다 궤멸되는 수모를 겪고 뭍에 올랐다가 일본군에게 참살당했다. 화(anger)가 위험(danger)을 부른 것이다.

이에 앞서 선조는 우부승지 김홍미에게 비망기(왕명)를 내려 이순신을 사형에 처할 것이니, 절차를 밟으라고 했다. 다음은 선조실록 1597년 3월 13일자.

“이순신은 이렇게 허다한 죄상이 있고서는 법에 있어서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니 율(律)을 상고하여 죽여야 마땅하다.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을 것이므로 지금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여 실정을 캐어내려 하는데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대신들에게 허문(許文 허락함을 증명하는 문서)하라.” “이제는 가토(加藤淸正)의 목을 가져온다 해도 용서할 수 없다”며 대로(大怒)했다.

이때 도체찰사(전시 군정과 민정 총괄) 이원익은 “왜적들이 꺼리는 수군이니, 이순신을 체차(遞差 직위를 바꿈)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원균을 대리로 파견해선 안 된다”고 이순신을 적극 방어했지만 역부족이었다.

1596년 8월 8일 명나라 사신을 수행해 일본에 다녀온 황신은 선조에게 “규슈의 일기도(一崎島)에서부터 적관(赤關)까지 타고 돌아온 배가 이순신이 감독하여 만든 판옥선이다”라고 하였을 정도로 그 실력을 역설했지만 이순신의 목숨은 경각(頃刻)에 달려있었다.

정탁, 경각에 달린 이순신 구명 신구차 올려 가까스로 목숨 구해  

고립무원의 이순신! 이때 판중추부사 약포 정탁(鄭琢 1526~1605)이 선조에게 구명탄원서인 신구차(伸救箚)를 올린다. 70세가 넘은 정탁은 선조에게 “군기(軍機)는 멀리 앉아서 헤아릴 수 없는 법이므로 이순신이 진격하지 않은 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뒷날에 다시 한번 공을 세울 수 있게 하소서”라고 간청했다. 노신(老臣)의 간청에 마음이 움직인 선조는 이순신에게 합천의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할 것을 명령했다. 3도 수군통제사(해군참모총장)에서 하루 아침에 계급장을 떼인 ‘무등병’ 신세가 된 이순신은 요시라의 간계를 믿지 않음으로써 이런 어처구니없는 수모를 당하게 됐다.

절체절명의 상황에 놓인 이순신의 목숨을 살려준 은인 정탁은 조선 최고의 변호사였다. 이충무공 전서(권 12)에 수록된 그의 명문장인 신구차 전문(1298자)의 일부를 소개한다.

“우의정 정탁은 엎드려 아룁니다. 이모(李某 이순신)는 몸소 큰 죄를 지어 죄명조차 무겁건마는 성상(聖上)께서는 얼른 극형을 내리시지 않으시고 두남두어(두둔하여) 문초하시다가 그 뒤에야 엄격히 추궁하도록 허락하시니, 이는 다만 감옥 일을 다스리는 체모와 순서만으로 그러심이 아니라 실상은 성상께서 인(仁)을 베푸시는 한 가닥 생각으로 기어이 그 진상을 밝힘으로써 혹시나 살릴 수 있는 길을 찾으시고자 바라심에서 하심이라, 성상의 호생(好生 생명을 사랑함)하시는 뜻이 자못 죄를 짓고 죽을 자리에 놓인 자에게까지 미치시므로 신은 이에 감격함을 이길 길이 없습니다.

저 임진년에 왜적선이 바다를 덮어 적세가 하늘을 찌르던 그 날에 국토를 지키던 신하들로서 성(城)을 버린 자가 많고, 국방을 맡은 장수들도 군사를 그대로 보전한 자가 적었으며, 또 조정의 명령조차 사방에 거의 미치지 못할 적에 이모는 일어나 수군을 거느리고 원균과 더불어 적의 예봉(銳鋒 날카로운 기세)을 꺾음으로써 나라 안 민심이 겨우 얼마쯤 생기를 얻게 되고, 의사(義士)들도 기운을 돋우고 적에게 붙었던 자들도 마음을 돌렸으니, 그의 공로야말로 참으로 컸습니다. 조정에서는 이를 아름답게 여기고 높은 작위를 주면서 통제사의 이름까지 내렸던 것이 실로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군사를 이끌고 나가 적을 무찌르던 첫 무렵에 뛰쳐나가 앞장서는 용기로는 원균에게 미치지 못했으므로 사람들이 더러 의심하기도 한 바는 그렇다고 하겠으나, 원균이 거느린 배들은 마침 그 때에 조정의 지휘를 그릇 되이 받들어 많이 침몰된 것이니만큼, 만일 이모의 온전한 군사가 없었더라면 장한 형세를 갖추어 공로를 세울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모는 대장이라 나갈만함을 보고서야 비로소 시기를 잃지 않고 수군의 이름을 크게 떨쳤던 것입니다. 그러니 전쟁에 임하여 피하지 않은 용기는 원균이 가진 바라 하겠지만, 끝내 적세를 꺾어버린 공로로는 원균에게 양보할 것이 많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때에 원균에게도 그만한 큰 공로가 없지 않았는데, 조정의 은전은 온통 이모에게만 미치고 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만약에 난리가 일어났던 첫 무렵에 공로를 적어 올린 장계가 낱낱이 사실대로 쓰지 않고 남의 공로를 탐내서 제 공로로 만들어 속였기 때문에 그로써 죄를 다스린다 하면 이모인들 또한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에 완전무결한 사람을 빼고는 저와 남이 상대할 적에 남보다 높고자 하는 마음을 품지 않은 자가 적고, 어름어름하는 동안에 잘못되는 일이 많으므로, 윗사람이 그 저지른 일의 크고 작음을 자세히 살펴서 경중을 따져 처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개 장수된 자는 군사와 백성들의 운명을 맡은 이와, 국가의 안위에 관계된 사람이라, 그들의 소중함이 이와 같으므로 예로부터 제왕들이 국방 책임을 맡기고 은전과 성의를 특별히 보여 큰 무엇이 있지 않으면 간곡히 보호하고 안전케 하여 그 임무를 다하게 하니, 큰 뜻이 거기에 있습니다.

무릇 인재란 것은 나라의 보배이므로 비록 저 통역관이나 주판질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라도 재주와 기술이 있기만 하면 모두 다 마땅히 사랑하고 아껴야 합니다. 하물며 장수의 재질을 가진 자로서 적을 막아내는 것과 가장 관계가 깊은 사람을 오직 법률에만 맡기고 조금도 용서 못함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이모는 참으로 장수의 재질이 있으며, 수륙전에도 못하는 일이 없으므로 이런 인물은 과연 쉽게 얻지 못할 뿐더러, 이는 변방 백성들의 촉망하는 바요, 왜적들이 무서워하고 있는데, 만일 죄명이 엄중하다는 이유로 조금도 용서해 줄 수가 없다 하고, 공로와 죄를 비겨볼 것도 묻지도 않고, 또 능력이 있고 없음도 생각지 않고, 게다가 사리를 살펴 줄 겨를도 없이 끝내 큰 벌을 내리기까지 한다면 공이 있는 자도 스스로 더 내키지 않을 것이요, 능력이 있는 자도 스스로 더 애쓰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이모는 사형을 받을 중죄를 지었으므로 죄명조차 극히 엄중함은 진실로 성상의 말씀과 같습니다. 이모도 또한 공론이 지극히 엄중하고 형벌 또한 무서워 생명을 보전할 가망이 없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은혜로운 하명으로써 문초를 덜어주셔서 그로 하여금 공로를 세워 스스로 보람있게 하시면, 성상의 은혜를 천지부모와 같이 받들어 목숨을 걸고 갚으려는 마음이 반드시 저 명실 장군만 못지않을 것입니다. 성상 앞에서 나라를 다시 일으켜 공신각(貢臣閣)에 초상이 걸릴만한 일을 하는 신하들이 어찌 죄수 속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성상께서 장수를 거느리고 인재를 쓰는 길과 공로와 재능을 헤아려보는 법제와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로워지는 길을 열어 주심이 한꺼번에 이루어진다면, 성상의 난리를 평정하는 정치에 도움됨이 어찌 옅다고만 하겠습니까.”

참으로 논리정연하고 가슴에 깊이 아로새겨지는 명문이 아닐 수 없다. 그 명(名)변론문은 오늘날에 읽어도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을 정도의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이순신은 이렇게 정탁의 도움을 받아서 가까스로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다. 오호 통재(痛哉)라!

한양 압송 당시 이순신 장군은 권준, 배흥립, 김득광 등 여러 제장들과 논의하여 병선 40여 척을 건조하고 있었다. 또 전라도 전 지역을 돌면서 군사, 군량, 군기, 군선 등의 확보에 열중해 화약 4천근, 군량미 9천914석 등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전력자산은 그해 7월16일 원균이 일본수군에 의해 칠천량 해전에서 궤멸당하는 바람에 모두 바다 속으로 수장되었거나 일본군에게 수탈당했다.

선조 뒤늦게 후회, 백의종군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용 

선조는 급하게 이순신을 다시 찾았다.

“그대의 직함을 갈고 그대로 하여금 백의종군하도록 하였던 것은 역시 이 사람의 모책(謀策)이 어질지 못함에서 생긴 일이었거니와 그리하여 오늘 이 같이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라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尙何言哉 상하언재).”

선조는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한다는 기복수직교서(起復授職敎書 모친상을 당한 상태에서 임용됨)에서 미안감을 밝혔다. 이리 깨지고 저리 으깨진 이신의 몸과 마음은 형체만 남아있었다. ‘아! 영웅은 외롭고 어려운 이의 이름인가.’ <5회 연재 끝>

                                           <김동철 박사 약력>

▲교육학박사

▲이순신 인성리더십포럼 대표

▲이순신리더십 국제센터 운영자문위원장

▲성결대 교양학부 객원교수

▲전 중앙일보 기자-월간중앙 기획위원

▲경복고-한국외국어대학교-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명지대 대학원 졸

▲저서: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우리가 꼭 한번 만나야 하는 이순신(이순신 리더십 특강)’ ‘이순신 유적 답사기1’

▲논문: ‘이순신의 청렴 인성 리더십’ ‘나라사랑 충, 부모사랑 효, 백성사랑 애민, 부하사랑 소통, 거북선 창제의 창의력’ ‘충무공 이순신 시조에 나타난 인성’ ‘이순신과 원균의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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