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글 독립운동 발자취(5)] “이두 구결 향찰” 글쓰기

리대로 회장
리대로 회장

삼국시대 중국에서 한자가 들어왔고 썼으나 한자는 배우고 쓰기가 힘이든 데다가 한문이 중국말을 적은 문장이라 우리말과 달라서 매우 불편했다. 그래서 한자를 쓰더라도 우리 말투로 적는 방식을 만들었다. 바로 “이두, 구결, 향찰”이란 글쓰기다. 그걸 볼 때에 우리말이 중국말과 그 뿌리도 다르고 고구려, 백제, 신라는 말이 같았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세 글쓰기 방식이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가 우리말을 우리말답게 적으려고 처음 힘쓴 일이라 이 일을 첫 우리말 독립운동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두, 구결, 향찰”이란 글쓰기가 우리말투로 글을 쓰려고 애쓴 것이지만 그 방식이 조금 다르다. 셋 모두 한자로 글을 적더라도 우리말답게 만들어 적으려고 한자를 빌려서 소리와 뜻으로 우리말답게 읽는 같은 방식이지만 이두는 한자 정자를 빌려서 썼고 구결과 향찰은 주로 초서체나 약자체를 빌려서도 썼다. 이제 이 “이두, 구결, 향찰”이란 세 가지 글쓰기가 어떤 것이고 언제 누가 처음 만들었으며 쓰기 시작했는지를 좀 더 꼼꼼하게 살펴보자. 그래도 ‘이두’가 세 가지 글 가운데 가장 오래도록 많이 썼으니 먼저 이두를 알아보겠다.

1. 이두

‘이두’는 한자의 소리와 새김을 빌려 우리말을 적던 글쓰기다. “이서, 이도, 이토, 이찰, 이문”들로 불렸다. 그런데 ‘이두’란 말은 우리말을 적던 글쓰기 방식인 “구결, 향찰”까지도 포함해서 넓은 뜻으로도 쓰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두는 한자 정자체를 그대로 빌려다 썼지만 구결이나 향찰은 초서나 약자체를 빌려다 쓴 것이 다르다. 또한 ‘이두’는 쓰인 본보기가 더 많다.

‘이두’와 설총에 대한 이야기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들에 나오고 훈민정음 해례본에서는 설총이 이두를 만들었다는 말이 나오지만 설총시대보다 앞에서도 그런 글을 썼다는 말이 있고 고구려와 백제 때 빗돌이나 한문에도 이두와 같은 글이 있기 때문에 설총이 처음 만든 것이 아니라 설총이 그 글쓰기 체계를 잡고 설총이 이두로 글을 많이 썼으며 이두를 가르쳤기에 뒷날에 그렇게 설총이 이두를 만들었다는 말이 나온 거 같다. 또 고구려와 백제에서도 쓰였지만 신라에 의해 망했기 그 자료가 남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두는 신라 뒤인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썼으며, 쓰는 이에 따라 조금씩 쓰는 방식도 글자로 바뀌고 변화했다. 그래서 한자를 어떤 한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고 수천 년 동안 내려오면서 여러 사람이 만들고 그 모양을 바꾸었듯이 이두도 그렇게 된 측면이 있다. 또 이두는 한자를 읽는 소리와 그 새김(뜻)으로 읽는 것인데 “이름씨, 토씨, 씨끝 들들”에서 여러 가지로 쓰였다. 한자가 불편하기에 우리식으로 바꾸어 쓴 글쓰기 방식이고, 설총이 그 글을 많이 쓰고 알렸다는 뜻에서 설총을 가장 처음 우리말 독립운동을 한 분으로 꼽는다.

‘임신서기석’은 신라 때에 한문(壬申年六月十六日 二人幷誓記 天前誓 今自三年以後 忠道執持 過失无誓 若此事失 天大罪得誓 若國不安大亂世 可容行誓之 又別先辛末年 七月卄二日 大誓 詩尙書禮傳倫得誓三年)이지만 그대로 해석하면 우리 말투(임신년 6월 16일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고 기록한다. 지금부터 3년 이후에 충도를 지니고 지키며 과실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약 이를 어기면 하늘로부터 큰 벌을 얻을 것을 맹세한다. 만약 나라가 불안하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져도 모름지기 실행할 것을 맹세한다. 또 따로 지난 신미년 7월 22일에 크게 맹세하기를 시(詩)·상서·예·전(傳:춘추좌전)을 차례로 3년 동안 습득할 것을 맹세한다) 글로서 ‘이두’ 글 본보기이다.

사진=국립한글박물관에 이는 ‘이두’ 설명: 우리 말투로 쓴 임신서기석에 있는 이두 글.
사진=국립한글박물관에 이는 ‘이두’ 설명: 우리 말투로 쓴 임신서기석에 있는 이두 글.

2. 구결

구결은 중국 한문이 우리말과 말 순서가 다르고 우리말에 많은 토씨가 없어서 우리말식으로 편리하게 읽으려고 한문 낱말이나 구절 사이에 토를 달아서 쓴 글이다. 그 토는 주로 한자 초서체나 약자체를 본 따서 만든 글자였다. 구결은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한문을 중국에서 들여다 쓰면서 생긴 글쓰기 방식으로 '입겾' 또는 '입겿'이라는 순 우리말 명칭도 있었다. 또 구결은 ‘구결자’라고도 하고, '토'라는 말로도 쓰였다. 한문 원문은 그대로 두고 옆이나 글 사이에 쓴 자료가 오늘날에도 남아있다.

구결은 한자 뜻으로 읽는 석독(훈독)구결과 소리로 읽는 음독구결로 나뉘는데 처음에는 석독구결이 많이 쓰이다가 뒤에는 음독구결이 많이 쓰였다. 석독구결은 말 순서까지 우리말식으로 바꾸기도 했다. 불경을 읽은 때에 쓰인 그 본보기를 보자

《구역인왕경》 원문: 復 有 五道 一切衆生(부 유 오도 일체중생)

《구역인왕경》 구결문(약자): 復丷 有七㢱 五道七 一切衆生刂.(또한 있으며 오도의 일체중생이.

《구역인왕경》 구결문(정자): 復爲隱 有叱在旀 五道叱 一切衆生是.(또한 있으며 오도의 일체중생이.

원문 사이에 주로 약자체나 정자체를 써 넣어서 우리말식으로 글을 읽을 수 있게 했다.

아래는 논어를 음독구결 문장으로 바꾼 본보기인데 원문 사이에 있는 한자 ‘面(면)은 우리말 끝씨 “~면”을 소리로 나타낸 것이고, 한자 牙(아)는 그 소리 그대로 우리말 맺음씨끝을 나타낸 것이다.

《논어》 원문: 學而時習之 不亦悅乎(학이시습지 불역열호)

《논어》 구결문: 學而時習之面 不亦悅乎牙(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

사진=한글박물관에 있는 구결 설명 글: 구역인왕경이 우리말투로 쓴 글이라는 자료.이 구결자가 일본글자 ‘가나’와 너무 닮아서 그 일본글자가 구결을 보고 만들 거로 본다.
사진=한글박물관에 있는 구결 설명 글: 구역인왕경이 우리말투로 쓴 글이라는 자료.

이 구결자가 일본글자 ‘가나’와 너무 닮아서 그 일본글자가 구결을 보고 만들 거로 본다.

3. 향찰

향찰은 한자를 빌려서 우리말을 완벽하게 표기한 문장으로서 가장 발달한 우리말식 글쓰기로 보이는 데 그 쓴 본보기가 많지 않다. 오늘날 『삼국유사』에 신라 때 향가 14수, 고려 초 향가 11수가 실려 있고 고려 예종 때에 1수가 적혀 있다. 그 밖에서 13세기 중엽에 나온 향육구급방이란 책에도 있는데 『향약구급방』의 우리말은 단어의 표기가 주종을 이루지만 치초병(齒齼病)에 대한 “이가 솟고 시다(齒所叱史如.니솟다).”와 같은 설명은 순수한 국어문장을 향찰로 표기한 것이다.

향찰은 고유명사·이두문·구결의 표기가 합류되어 발달한 것임을 말하여 준다. 향찰의 표기구조는 어절(語節)을 단위로 하여 ‘독자(讀字)+가자(假字)’의 구조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향찰은 개념을 나타내는 부분은 한자의 본뜻을 살려서 표기하고, 조사나 어미와 같이 문법관계를 나타내는 부분과 단어의 어말음(語末音) 부분은 한자의 뜻을 버리고 표음문자로 이용하여 표기하였다. 이 점에 있어서는 이두나 구결의 표기구조와 글 틀 생김새가 같다.

그러나 향찰은 완전한 국어의 어순으로 배열하였고 토(吐)가 조사나 어미를 거의 완벽하게 우리말식으로 표기하고 있다. 또한 이두문은 한문 형식에 매인 말투라 조사나 어미가 소홀하게 표기되는 수가 많으나, 향찰은 조사나 어미의 표기가 정밀하여 자연스러운 국어문장을 표기하고 있다. 그러니 향찰은 차자표기법 가운데 가장 발달한 표기법이다. 관명과 같은 고유명사나 단편적인 단어의 표기에서 발생하기 시작하여 이두―구결―향찰의 순서로 발달된 것으로 보인다. 1000년 앞서 우리 한아비들은 우리 글자를 만들지는 못했더라도 이렇게 애쓴 일은 고마운 일이다. 이제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쓰기만 하면 좋은 우리 글자인 한글을 고마워하면서 잘 살려서 쓰고 빛내야겠다.[리대로 한국어인공지능학회 회장]

사진=한글박물관에 있는 향찰 설명 자료: 삼국유사에 있는 ‘서동요’가 향찰 표기 본보기다.
사진=한글박물관에 있는 향찰 설명 자료: 삼국유사에 있는 ‘서동요’가 향찰 표기 본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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