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절필동(萬折必東)은 존명사대의 대명사
청와대 비서실장(전 주중대사), 국회의장도 만절필동(萬折必東) 애용
오늘날 경제, 외교안보의 내우외환…임진-병자호란-구한말 때 데자뷔
충무공 이순신, 명 황제 금토패문에 항의
'갑질' 명수군 도독 진린, 이순신 장군 리더십 감동, 열혈 팬 되다
20대 초반 안하무인 위안스카이, 조선 왕 노릇
시험대 오른 화웨이, 사드, 일대일로…우리 외교력 감당할 수 있을까

만절필동(萬折必東)은 존명사대의 대명사

조선 14대 왕 선조(1567~1608)는 명나라, 일본, 여진 등 주변국과의 외교에서 오로지 명나라를 향한 존명사대(尊明事大)에만 집착했고 일본과 여진은 글과 예법도 모르는오랑캐로 치부했다. 그런 오랑캐 가운데 남쪽의 일본은 임진-정유재란을 일으켰고 북쪽의 여진족은 정묘-병자호란으로 왕(인조)의 항복을 받아냈다. 조선은 변화하는 주변국 정세(1543년 일본은 포르투갈 상인에게 조총 구입, 대량생산)에 둔감했고 조정과 백성의 안위가 담보되는 외교와 안보를 경시하는 폐쇄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로써 북로남왜(北虜南倭)‘오랑캐에 의한 처참한 병화(兵禍)가 필연적으로 발생했다. 선조는 뼛속까지 존명사대주의자로 말끝마다 만절필동(萬折必東)을 거론했다. 만절필동이란? ‘황하는 아무리 구비가 많아도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뜻으로 서고동저의 중국 지형상 물은 동쪽으로 흘러가게 마련이다. 이 말은 충신(조선)의 임(중국)을 향한 절개는 꺾을 수 없다는 말과도 통한다. 중화사상을 흠모했던소중화(小中華)’조선은 천자를 향한 제후로서 충성을 맹서했다는 것이다. 선조는 임진-정유재란 때 일본국을 물리친 명나라의 은혜를 기린다는 재조지은(再造之恩)도 입에 달고 살았다. 경기도 가평군 대금산 자락 조종암(朝宗巖)에는 선조의 친필인만절필동(萬折必東) 재조번방(再造藩邦)’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재조번방은천자국이 제후국인 번방을 지켜서 나라를 다시 만들어주었다는 감사의 극진한 메시지이다. 또 조종(朝宗)은 번방의 제후가 천자를 알현한다는 뜻이다.

가평 조종암에 새겨진 선조의 글씨 '만절필동 재조번방'
가평 조종암에 새겨진 선조의 글씨 '만절필동 재조번방'

그 후 1704(숙종 30) 충북 괴산 화양동에 노론 거두 송시열의 유언을 받은 제자 권상하가 신종(임진왜란 때 명나라 황제)과 의종(명나라 마지막 황제)을 모시는 만동묘(萬東廟)라는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이 사당은 대원군 때 서원철폐로 없어졌다가 고종이 다시 세웠다.

청와대 비서실장(전 주중대사), 국회의장도 만절필동(萬折必東) 애용

2017년 노영민 청와대 비서실장은 주중한국대사로 시진핑에게 신임장을 제청하는 자리에서 만절필동이라는 글씨를 남겼다. 그때 저자세 논란이 있었음에도 2019년 문희상 국회의장은 펠로시 미국하원의장에게만절필동이란 친필 족자를 선물했다. 정말 이들은 만절필동의 진의를 몰랐을까? 아니면그래 어쩔래? 나 친중파야!”라는 커밍아웃이었을까.

여튼 임진왜란 후 광해군의 줄타기 외교에 이어 인조 때 숭명배청(崇明排淸) 사상이 대두돼 이 눈치 저 눈치 보다가 급기야 정묘-병자호란을 맞았다. 인조 임금은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음)하는 치욕을 당했다. 외침으로 나라 땅은 결딴이 났고 백성은 어육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주변국 정세에 무지하고 힘이 약한 나라가 당해야 하는 시산혈해(屍山血海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바다 같이 흐름)의 참극이었다. 임진왜란으로 노동력이 있는 젊은 장정들은 일본으로 끌려가 일부는 인도, 멀리는 유럽까지 노예로 팔려갔다. 또 병자호란으로 수십만 명의 여인네들은 끌려가 되놈 남정네 품에 안겼다. 뇌물을 주고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은화냥년이라 지탄받았다. 화냥년이란?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라는 뜻의 환향녀(還鄕女)의 비속어이다. 여인네들이 데려온 아이는호로(胡虜) 자식’,‘호로새끼로 불렸다. 집 문턱에서 배척당한 여인들은 자결하거나 절로 들어가거나 연신내, 불광동, 홍제천 부근에서 들병이 또는 술장사로 먹고살았다.

! 백성을 지켜주지 못하는 조선은 나라였던가? 너무 통탄스러워 눈물이 흐른다. 아직도 백성의 눈물을 닦아주는 지도자를 만나지 못했으니 어찌 하랴, 어찌하랴...

오늘날 경제, 외교안보의 내우외환임진-병자호란-구한말 때 데자뷔

국민경제와 외교국방에서 여전히 갈 지() 자 행보를 보이는 작금의 상황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구한말 당시의머나먼 미래상이 아니었을까? 그 기시감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우리 민족 특유의 급망증! 금방 냄비처럼 들끓다가 이내 식어버리고 마는 고질병을 말함이다. 이순신 장군의 유비무환 정신과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롭다는전시재상류성룡의 피맺힌 망전필위(忘戰必危) 징비정신이 실종돼 버렸기 때문이다.

구한말 대한제국은 친청파, 친일파, 친러파로 나뉘어 꺼져가는 촛불의 나라 운명은 방치한 채 계파와 세도정치의 이해득실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서구 열강에 둘러싸인 한반도의 지정학적(geo political) 상황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대한민국이 이곳에서 다른 먼 곳으로 이사를 가기 않는 한, 우리의 숙명은 고립된 섬이다.

구한말 주일본 공사관의 참사관인 청나라 황준헌은 1880(고종17) 자신을 찾아온 조선 수신사 김홍집에게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이란 책을 건넸다. 그는 책에서러시아의 남하(南下)를 막기 위해 친중국(親中國), 결일본(結日本), 연미국(聯美國)하여 조선의 자강(自强)을 도모할 것을 주장하였다. 오늘날에도 부분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충무공 이순신, 명 황제 금토패문에 항의

이 대목에서 춤무공 이순신 장군의 일화를 소개한다. 1594년 갑오년 3월 명 황제의 특사인 선유도사 담종인(譚宗仁)왜군을 절대 토벌하지 말고 조선군을 모두 해체해 고향으로 돌려보내라는 금토패문(禁討牌文)을 이순신 장군 앞으로 보내왔다. 왜적이 남해안 곳곳에 성을 쌓고 진을 치고 있는 마당에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다음은 난중일기 내용이다.

맑다. 새벽에 망대에서 적선 40여 척이 거제 땅으로 건너온다고 전하였다. 당항포 왜선 21척을 모조리 불태운 일에 대한 긴급 보고가 들어왔다. 늦게 고성 땅에서 배를 출발하였다. 순풍에 돛을 달고 거제로 향하는데 역풍이 불어 닥쳤다. 간신히 흉도에 도착하였더니 남해 현령이 급히 보고를 보내왔다. 곧 명나라 군사 두 명과 왜놈 여덟 명이 명나라 담종인이 보낸 패문(牌文)을 가지고 들어왔다. 적을 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심기가 매우 괴로워서 앉고 눕기조차 불편하였다.”(15943월 초6)

맑다. 몸이 매우 괴로워 뒤척이는 것조차 어려웠다. 공문을 아래 사람을 시켜 만들도록 하였더니 글꼴이 말이 아니었다. 원 수사(원균)에게 손의갑을 시켜 지어 보내도록 하였으나 역시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병을 무릅쓰고 일어나 내가 글을 짓고 군관 정사립(鄭思立)에게 쓰게 하여 보냈다. 오후 2시쯤 출발하여 밤10시쯤 한산도 진중에 이르렀다.”(15943월 초7)

이순신 장군은 통분함을 감추지 못하고 36일 담종인에게 답담도사종인금토패문(答譚都司宗仁禁討牌文)이란 답서를 보냈다.

이순신 장군의 금토패문 반박문
이순신 장군의 금토패문 반박문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삼가 황제의 선유도사 앞에 답서를 올립니다. 왜적이 스스로 실마리를 일으켜 군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와 죄 없는 우리 백성들을 죽이고 또 한양으로 쳐들어가 흉악한 짓들을 저지른 것이 말할 수 없이 많으며, 온 나라 신하와 백성들의 통분함이 뼛속에 맺혀 이들 왜적과는 같은 하늘 아래서 살지 않기로 맹세하고 있습니다.

(중략) 수륙으로 합동공격해서 남아 있는 왜적들을 한 척의 배도 못 돌아가게 함으로써 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하여 이달 초사흗날 선봉선 2백여 척을 거느리고 바로 거제로 들어가 그들의 소굴을 무찔러 씨를 없애고자 하였던 바, 왜선 서른 여 척이 고성과 진해 쪽으로 들어와서 여염집들을 불태우고 우리 백성들을 죽이며 또 사로잡아 가고 기와를 나르며 대나무를 찍어 저희 배에 가득 실어갑니다. 그 모습을 생각한다면 통분하기 그지없습니다. (중략) 그런데 다만 패문의 말씀 가운데일본 장수들이 마음을 돌려 귀화하지 않는 자가 없고 모두 병기를 거두어 저희 나라로 돌아가려고 하니, 너희는 모든 병선들은 속히 각각 제 고장으로 돌아가고 일본 진영에 가까이 하여 트집을 일으키지 말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왜인들이 거제, 웅천, 김해, 동래 등지에 진을 치고 있는 바, 거기가 모두 우리 땅이거늘 우리더러 일본 진영에 가까이 가지 말라 하심은 무슨 말씀이며, 속히 제 고장으로 돌아가라고 하니, 제 고장이란 또한 어디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고 또 트집을 일으킨 자는 우리가 아닙니다. (중략) 이제 강화한다는 것은 실로 속임과 거짓밖에는 아닙니다. 그러나 대인의 뜻을 감히 어기기 어려워 잠깐 얼마쯤 두고 보려 하오며 또 그대로 우리 임금께 아뢰려 하오니, 대인은 이 뜻을 널리 타이르시어 놈들에게 하늘을 거스르는 도리와 하늘을 따르는 도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면 천만다행일 것입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답합니다.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원균(元均), 전라우도수군절도사 이억기(李億祺) 삼가 올림.”

당시 명나라는 조선을 빼놓은 채 일본과 강화교섭중이었다. 조선은 엉망진창의 전쟁터가 됐지만 외교교섭에서는 패싱당했다. 훗날 6.25 한국전쟁 휴전회담 때도 그랬다. 그런데 감히 번방의 일개 조선 수군장군가 명 황제의 사신에게 항의답서를 올린다는 것은 목숨을 내 놓은 거나 다름없는 처사였다. 나라와 백성 위해 한 목숨 바치겠다는 이순신 장군에게는 이런 결기가 있었다.

'갑질' 명수군 도독 진린, 이순신 장군 리더십 감동, 열혈 팬 되다

임진-정유재란 때 항왜원조(抗倭援朝 왜군을 막고 조선을 도움)라는 기치 아래 원군(援軍)으로 온 명군은 천군(天軍)입네 하면서 선조를 능멸했고전시재상류성룡의 무릎을 꿇렸으며 조명연합수군대장 진린(陳璘)은 이순신에게 온갖 갑질을 해댔다.

조명연합수군 대장 진린 도독
조명연합수군 대장 진린 도독

이충무공전서 권9의 기록이다.

“716일 진린이 고금도(완도)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접한 장군은 조선수군의 함대를 이끌고 먼 바다까지 나가서 진린의 명수군을 안내했다. 그리고 술과 안주를 성대히 마련하여 구원군에게 대한 감사의 표시를 했다. 호의를 받은 진린은이순신이 과연 훌륭한 장수로다라며 감탄했다.”

다음은 선조 수정실록 15988월의 기록이다.

진린이 고금도에 내려온지 3일만인 719일 절이도(折爾島 거금도) 해전이 벌어졌다. 18일 적 함대 100여 척이 금당도(고금도와 거금도 중간의 섬)로 침범해 온다는 급보에 접하고서 이순신은 전함대에 출동 태세를 갖추도록 한 다음 그날 밤에 길목인 금당도로 전진 결진하여 그곳에서 철야했다. 그러나 이때 명나라 수군은 합세하지 않고 안전해역에서 후행하면서 관전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719일 새벽에 일본함대가 절이도와 녹도(소록도 근처) 사이로 뚫고서 금당도로 나올 때 이순신 함대는 이를 요격하여 적선 50여 척을 분멸시켰다.”

이 전투에서 진린은 뒷전에서 구경만 하고 있다가 전과(戰果)에 욕심이 나서 이순신에게 협박을 함에 할 수 없이 적의 목 벤 것 40개를 진린에게 넘겨주었다. 당시천군(天軍)’이라는 자들이 소국의 장수들의 전과를 탈취하는 것은 비일비재했다. 더군다나 조선 백성의 목을 베서 자신들의 공적으로 삼기도 했다.

이충무공전서 권9의 기록이다.

“‘대감(진린)은 명나라 대장으로 이곳에 와서 왜적들을 무찌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곳의 모든 승첩은 바로 대감의 승첩인 것입니다. 하여 우리가 베어온 적의 머리를 대감에게 드리는 것이니 황제께 이 공을 아뢴다면 얼마나 좋아하시겠습니까.’하니 도독이 크게 기뻐하며 이순신의 손을 잡고내가 본국에서부터 장군의 이름을 많이 들었더니 과연 허명(虛名)이 아니었소하고 종일토록 취하며 즐거워했다.”

이순신 장군은 수급(首級)은 주돼 진린과 합동해서 일본군의 퇴로를 막을 심산이었다. 허나 명군은 적극적이지 않았다. 강 건너 불구경 하는 자세로 일관했다.

이순신 군영은 고금도 덕동에, 진린은 묘당도에 진을 치고 있었다. 지금은 고금도와 묘당도 사이의 좁은 해협이 연륙(聯陸)되어 걸어서 갈 수 있다. 명군이 주둔한 인근 조선수군 및 백성들은 명군의 약탈과 행패에 분통을 터뜨렸지만 갑()의 농간을 막을 재간이 없었다. 먹을 것을 빼앗는 것은 물론, 아녀자들이 겁탈당하고 은비녀, 은수저, 옷감 등 값나가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빼앗겼다. 민폐가 심해지자 장군은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역시 이충무공전서 기록이다.

명나라 군사들이 자못 약탈을 일삼기 때문에 우리 군사와 백성들이 몹시 고통스러워 한다. 참다못한 이순신은 부하 장졸들에게 모든 가옥을 한꺼번에 헐어버리라고 명령하고 자신의 옷과 이부자리도 배로 끌어내어 싣게 했다. 이상하게 생각한 진린이 부하를 시켜 그 연유를 물었다. 이순신이 답하기를우리 작은 나라 군사와 백성들은 명나라 장수가 온다는 말을 듣고 마치 부모를 기다리듯 하였는데 오히려 귀국의 군사들은 행패와 약탈을 일삼고 있으니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피해서 달아나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대장으로서 혼자 여기 남을 수 없어 같이 배를 타고 다른 곳으로 가려는 것이다.’고 했다

부하의 보고를 받은 진린은 깜짝 놀라 달려와서 이순신의 손을 잡고 만류를 청했다. 그러자 이순신 장군은대인이 내 말을 들어준다면 다시 생각해보겠습니다라고 하니 도독이 어찌 내가 안 들을 리가 있겠소라고 했다. 이에 이순신 장군은귀국의 군사들이 나를 속국의 장수라 하여 조금도 거리낌이 없소. 그러니 만일 내게 그들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허락해준다면 서로 보존할 도리가 있겠소이다하니 진린이 쾌히 승낙했다. 그 이후로부터 이순신은 명군의 처벌권을 가지게 됐고 범법자는 가차없이 처벌하니 명나라 군사들도 이순신을 도독보다 더 무섭게 알게 돼 백성들이 편해졌다. 애민정신의 발현이다.

이순신 장군은 명실상부한 연합작전의 수행을 위해서 진린의 마음을 살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술을 좋아하는 진린을 위해 술자리를 자주 베풀었다.

다음은 난중일기 내용이다.

명나라 도독 진린과 함께 일시에 군대를 움직여 나로도(고흥군 봉래면)에서 잤다.”(1598915)

나로도에 머물면서 도독과 함께 술을 마셨다.”(916)

왜적들의 배에서 여러 가지 물건들을 빼앗아 와서 즉시 도독 진린에게 바쳤다.”(921)

고금도 월송대.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후 이곳에 잠시 안치됐던 곳.
고금도 월송대.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후 이곳에 잠시 안치됐던 곳.

이순신의 뛰어난 전략과 인품에 반한 진린은 점차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나라를 위해 애쓰는 이순신의 우국충정에 감동을 한 것이다. 진린은 이후 이순신 장군을 부를 때도 존칭인이야(李爺)’라고 불렀다. ()는 남자의 존칭으로 아버지라는 뜻이다.“이야(李爺)같은 장수가 조선에 있는 게 아깝소. 명나라에 가서 장수를 해야 하는데...”라고 아쉬워했다.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했을 때 진린은 명나라 황제 신종(神宗)과 선조에게 이순신의 뛰어난 전공을 알렸다. 이에 신종은 이순신 장군에게 도독(都督)의 직함을 내리고 명조팔사품(明朝八謝品)을 하사했다. 이 물건들은 통영 충렬사가 보관하고 있다. 장군에게는 이렇듯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었다. 그것은 오로지 진실된 우국충정의 성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린은 이순신 장군 사후,‘경천위지지재(經天緯地之才) 보천욕일지공(補天浴日之功)을 가진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 천지를 경영하는 비상한 재주와 하늘의 뚫어진 구멍을 깁고 해를 목욕시키는 커다란 공로가 있다는 말이다.

20대 초반 안하무인 위안스카이, 조선 왕 노릇

청나라 말기 조선에서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던 위안스카이, 원세개(袁世凱 18591916)라는 인물을 빼놓을 수 없다. 22세의 앳된 원세개는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조선 정세를 안정시킨다는 빌미로 조선에 부임했다. 일본이 조선에 거주하는 자국민 보호를 위해 군대를 파병할 움직임을 보이자, 청나라는 신속히 군대를 파병했다. 청나라는 흥선 대원군을 군란의 책임자로 몰아 톈진으로 압송, 구금함으로써 일본의 무력 개입의 여지를 없애 버렸다. 청나라는 우세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구식 군인들과 민중의 반란을 진압했고, 민씨 일파를 중심으로 한 친청(親淸) 정권을 수립했다.

갑질의 대명사, 위안스카이
갑질의 대명사, 위안스카이

위안스카이가 대한제국 고종 황제를 무시하고 사실상 왕 노릇을 했던 일은 기억되어야 한다. 청나라 보호국이던 조선 땅에 진주한 뒤 무능했던 고종 황제 면전에서너 같은 혼군(昏君)은 임금 자리도 아깝다. 당장 폐위해도 시원찮다라며 호되게 꾸짖었다. 그는 조선의 군주를 배알하는 자리에서도 기립하지 않으며 고종을혼군(昏君)’이라 칭하면서 폐위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조선 관료 20명을 갈아치우고 그 자리에 자신의 측근들로 채웠다. 당시 미국 공사 포크는 이를 무혈 정변이라고 했다. ! 혀를 깨물고 죽어도 시원찮을 치욕의 나날이었다.

세월이 흘러 부패한 대한제국은 일제에 먹혔고 35년 동안 역사는 우리가 아는 바이다. 해방과 함께 좌우익 투쟁을 거쳐, 195012월 한국전쟁 때 중공군 100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왔다. 혜산진까지 진격했던 국군과 UN군은 눈물을 머금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통일이 눈앞에 왔건만, 통일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중공군의 기치는 항미원조(抗美援朝 미국을 물리치고 북조선을 도움)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 거주 화교(華僑 외국에 사는 중국인)에 대해서는 단호한 정책을 펼쳤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945년 해방 당시 국내 거주 화교는 60만명이었으나 1961년 군사혁명 이후 정부의 강력한 화교정책으로 국내거주 화교는 1975년경 57천명으로 줄어들었다. 박 전 대통령의 화교통제정책은 중국에 대한 역사적인 피해의식 잔존과 화교들의 과잉된 경제활동으로 인한 서민경제 위축을 회복한다는 이유였다.

시험대 오른 화웨이, 사드, 일대일로우리 외교력 감당할 수 있을까

몇 년 전 사드를 둘러싼 중국의 한국 상품 불매운동으로 우리는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 중국 어선은 불법조업으로 극성을 부렸고 지금도 중국 군항기는 우리의 방공식별구역(KADIZ)을 제집 안방 드나들듯 한다. 화웨이 제재를 둘러싸고 미국과 중국은 무역전쟁 중이다. 이 와중에 중국은 경제영토 확장책인 일대일로(一帶一路)를 밀어붙이고 있다. 미국은 항행의 자유 작전으로 맞불을 놓고 있다. 우리는 두 나라로부터 양자택일의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중국 군항기가 침범하는 항공식별구역 카디즈
중국 군항기가 침범한 항공식별구역 카디즈

장하성(전 청와대 정책실장) 주중대사가 중국의 신실크로드인 일대일로에 참여를 표명을 했다고 중국공영방송은 최근 보도했다. 장 대사가 누구인가? 국내에서 소득주도성장을 밀어붙여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의 눈물과 원성을 산 장본인이 아닌가. 외교부 훈령 없이 그런 말을 했을까 보냐 마는, 구중궁궐 중국의 후흑(厚黑 두꺼운 얼굴로 검은 속마음을 감춤), 꿍꿍이속을 알 길이 없어 답답하다. 게다가 외교실무 경험이 전무한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꿀 먹은 벙어리 모양 일언반구 말이 없다.

우리는 이렇듯 G2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서있지만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대한민국의 운명을 가를 외교안보전문가는 보이지 않는다. 오호 통재(痛哉)!

“SOS! SOS! 대한민국호()는 응답하라! 현재 위치는 어디인가?” <4회 끝>

                                           <김동철 박사 약력>

▲교육학박사

▲이순신 인성리더십포럼 대표

▲이순신리더십 국제센터 운영자문위원장

▲성결대 교양학부 객원교수

▲전 중앙일보 기자-월간중앙 기획위원

▲경복고-한국외국어대학교-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명지대 대학원 졸

▲저서: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우리가 꼭 한번 만나야 하는 이순신(이순신 리더십 특강)’ ‘이순신 유적 답사기1’

▲논문: ‘이순신의 청렴 인성 리더십’ ‘나라사랑 충, 부모사랑 효, 백성사랑 애민, 부하사랑 소통, 거북선 창제의 창의력’ ‘충무공 이순신 시조에 나타난 인성’ ‘이순신과 원균의 리더십’ 

 
저작권자 © 자연치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