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년 전, 연애시절의 추억 찾기!

김기만 전 동아일보 기자
김기만 전 동아일보 기자

지금의 아내를 처음 만난 건 1978년 4월, 43년 8개월 전입니다. 저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全經聯)의 신입직원, 그녀는 '전경련' 회장비서실에서 일하고 있던 '소문난 미인'(나중에 입사 후 확인함)이었습니다. 당시 '전경련'이 있던 31빌딩(종로구 관철동)은 서울에서 제일 높고 멋진 건물이었지요.(31빌딩 1970년 준공, 63빌딩 1980년 준공). 당시 전경련 회장은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회장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아내에게 빠졌습니다. 별 일이 없는데도 결재서류를 들고 비서실을 자주 드나들었지요. 구애(求愛) 편지도 자주 썼습니다. 틈틈이 기회를 엿보던 중 천재일우(千載一遇)의 행운이 찾아왔습니다. 회사 산우회(山友會)에서 수덕사(修德寺)가 있는 덕숭산(충남 예산)에 가는데, 갈 예정이 없던 그녀를 온갖 감언이설(甘言利說)로 설득해 동행에 성공했습니다.

등반 도중 그녀가 발을 심하게 삐었지요. 저는 이때다 싶어 재빨리 달려가 처음에는 어깨를 내줬고, 결국에는 그녀를 등에 업고 내려오며 득의(得意)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결국 전라도 시골 청년은 '순수 서울 아씨'와 1981년 1월 결혼에 골인했습니다.

성탄절 휴일을 맞아 우리는 '사내 비밀연애' 추억의 현장인 31빌딩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외관은 별로 달라지지 않은 건물을 둘러보고, 자주 갔던 양식당 '반줄'(BANJUL)에도 가봤습니다. 성탄일이라 문을 닫았는데 횟집으로 바뀐 듯 했습니다 (사진). 또다른 유명 양식당이었던 '파인힐'(Pine Hill)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산책길에 얼굴은 다 가려진 채로 단아한 체격의 아내가 예뻐보여서 "여보, 나 딸하고 데이트하는 기분이야"라고 말했더니 "그래요? 나는 '독거노인' 하나 구제해 주는 기분인데"라며 깔깔대고 좋아했습니다.

을지로 3가, 불현듯 1980년으로 돌아갔습니다. 1980년 5월 18일 전후, 그 '비극의 시절' 무렵 저희 커플은 대학생 데모대열에 끼었다가 최루탄에 뒤범벅된 채 경찰에 쫓겼고, 을지로 3가 지하도로 정신없이 도망쳤거든요. 27, 25살의 커플이 다시 대학생이 된 기분으로 데모대에 끼었던 41년 전의 추억은 차라리 아름다웠습니다.

3년 반의 짧은 근무였지만 '전경련'은 저에게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급여를 받아 두 동생의 학비를 도왔고, 무엇보다 일생의 반려(伴侶)를 얻었으며, 논문쓰기와 어학공부에 좋은 환경이다 보니 조금씩 실력이 늘어 1981년 '동아일보 25기 기자 공채'에서 수석합격하는 행운까지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경련'을 잊지 못합니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뒤로 하고 귀가하면서 돌이켜 보니, 40여년 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20대 청춘이 되어 한판 잘 놀고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추억의 흑백 명화(名畵) 한 편의 주인공이 되었다 나온 듯 했습니다.

아! 청춘은 아름다워라. 낭만과 회억(回憶)속에 "이제 잘 익어가야 한다"'좋은 노인 되기 제 1장'을 새겨보게 한 유쾌, 통쾌, 상쾌한 데이트였습니다!


['김기만 전 기자' 약력]

국립 군산대학교에서 초빙교수로 근무했음

독서신문, 이뉴스투데이에서 주필로 근무했음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에서 대표이사 사장으로 근무했음

Dankook University에서 초빙교수로 근무했음

키즈 KIDS TV에서 부회장으로 근무했음

게임물등급위원회에서 위원장으로 근무했음

대한민국 국회 의장 공보수석

전 청와대 춘추관장

동아일보사에서 기자 (Repórter), 프랑스특파원으로 근무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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