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장시정 대표(독일모델연구소)
나토의 ‘이중결의’가 우리의 핵무장 논의에 갖는 함의

장시정 대표
장시정 대표

[편집자 주] 글쓴이 장시정(sjchang81@gmail.com)은 주 카타르대사, 주 함부르크총영사를 역임하였습니다. 2018년 세종도서로 선정된 ‘한국 외교관이 만난 독일모델’을 저술하였습니다.(이 글은 필자의 개인적 견해입니다. 관련 의견은 댓글로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국민의 힘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북핵 문제에 관한 논의가 한창이다. 홍준표 후보는 북한핵에 대항하여 우리도 나토식의 핵공유 체제를 도입하거나 그것이 힘들다면 자체 핵개발이라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1970년대 헬무트 슈미트 서독 총리가 나토의 ‘이중결의’를 이끌어낸 사례를 원용하였다. 유승민 후보는 이에 동조하는 입장이다. 원희룡 후보는 윤석렬 후보와 함께 미국의 ‘확장억지력’ㅡ즉, 기존의 핵우산에 의존하는 현상 유지를 선호하는 듯하다.

쿠바 사태 이후 1970년대는 미·소간 데탕트 시기였다.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으로 우선 핵무기의 양적 제한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1976년부터 소련이 서유럽을 겨냥한 중거리 핵미사일 SS-20를 동독에 배치하기 시작하자, 데탕트 분위기는 서서히 냉각되기 시작했다. 이에 대응하여 나토는 1979년 12월 ‘이중결의(double-track decision)’을 채택하고, 중거리 핵미사일 퍼싱 Ⅱ와 BGM-109G 그리폰을 서유럽에 배치하는 일방, 유럽에 배치된 사거리 1000~ 5500km의 중거리 핵전력제한협상(INF)의 개시를 제안하였다. 이에 소련은 모든 협상을 거부하고 이 결의 채택 후 2주 만에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미· 소간의 냉전은 재점화되었다.

 

1982년 서독에서는 헬무트 콜 총리로 정권이 넘어갔지만 ‘이중결의’에 따라 퍼싱 Ⅱ를 배치하였고, 한편 미국에서는 레이건의 공화당 정권이 들어서서 5년간 260억 달러가 소요되는 ‘전략방위구상(SDI)’ 도입 등으로 군비 경쟁에 적극 나서면서 소련을 압박한 결과, 이를 견디지 못한 소련 경제가 와해되면서 급기야 냉전체제가 종식되는 결과로까지 이어졌다.

콜 총리가 말했듯이 독일 통일도 ’이중결의‘의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 한반도에 최대 100기 정도까지 배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미국의 전술 핵무기는 1991년 11월 노태우 대통령의 ‘한반도 비핵화 선언’과 이듬해 1월 남북한간 '비핵화 공동선언' 이후 철수하였다. 이것은 소련이 붕괴하고 냉전 구조가 허물어지면서 미·소 간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이 타결된 연장선에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북한은 이런 분위기를 역이용하여 핵무기를 개발하였고, 2006년부터 2017년까지 모두 6차에 걸친 핵실험을 감행하여 이제는 수십여 기의 핵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한핵은 한반도 안보 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일대 전환적 사건으로, 폭력의 수위를 급격히 비등시켰다. 이런 계제에 우리가 안보 질서의 회복을 시도하는 것은 당연하며 이 시도는 결국 핵균형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비대칭 무기를 재래식 전력으로 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중결의’에서 보듯이 핵에는 핵으로 맞서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나토식 핵공유가 되든, 자체 핵개발이 되든 남한의 핵무장 필요성이 대두되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나토식 핵공유는 미국이 나토 동맹국에 핵을 배치하고 공동 관리하에 두는 것이다.

 

현재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이탈리아, 터키가 이 핵공유에 참여하고 있고 총 100기의 B61 핵폭격기가 이들 나라에 배치되어 있다. 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권한, 즉 핵단추는 미국만이 가지며 동맹국들은 이 핵무기를 전폭기에 싣고 투하할 시 자국 조종사들에 의한 거부권을 가진다. 우리의 현실에서는 나토식 핵공유보다는 미국 전술핵의 재반입이 좀 더 용이한 선택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에도 여러 가지 애로가 예견된다. 우선은 미국의 입장이 매우 부정적이며, 설령 핵을 재반입하더라도 결국 핵단추는 미국이 갖고 있어 지금과 같은 핵우산 체제보다 크게 달라질 게 없다는 주장이다. 아울러 핵비확산조약(NPT)에 배치되며 국제적인 여론을 악화시키고, 동북아 지역에서 핵도미노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킨다는 우려도 있다. 나토의 핵공유협정도 NPT조약에 위배된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전술핵을 우리 땅에 두는 것은 많은 유용성을 갖는다. 2차 대전 후 미국이 일본, 한국, 호주 등 동맹국에 제공해 왔던 전통적인 ‘확장된 억지력’을 넘어서서 동맹국에 보다 더 강화된 ‘동맹 확증’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공격 시 미국 본토의 전략핵을 사용하여 대응하는 것은 확신하기 어렵다. 북한이 애써 ICBM이나 SLBM을 개발한 것은 북한핵의 미국 본토 타격력을 확보하여 유사시 미국의 개입을 막으려는 데 있다고 보인다. 또한 기술적으로도 북한을 목표로 하는 ICBM은 러시아의 영공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다고 한다. 아울러 해상이나 공중을 통한 핵 보복 가능성이 남겨져 있지만, 이것들 역시 한국 영토에 고정 배치된 핵만큼 확증을 주지는 못한다.

 

특히 SLBM은 보이지 않는 바다 속에서 발사하는 만큼 동맹국의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응징 전력은 보이고, 들려야,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장에 배치된 핵이야말로 가장 실질적인 응징 전력일 뿐 아니라 동맹국에 긍정적인 정치적, 심리적 메시지도 갖는다. 최후적 선택으로 우리가 자체적인 핵개발을 한다면 이것은 상상하기 힘든 국제적 저항과 제약을 수반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미국 정치학자들에 의하여 제기되었듯이, 북한핵의 위협이 핵 비확산조약 제10조에서 말하는 우리의 ’지상 이익‘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 명백하므로 이에 따른 탈퇴 권리를 행사하는 방안도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현상 타개를 주장하는 홍준표 후보의 입장이 일응 타당하며 여기서 나토의 ’이중결의‘의 지혜를 돌아보자. 우리가 나토의 ‘이중결의’로부터 얻을 수 있는 첫 번째 교훈이라면 우선 전력 불균형에 따른 심각성을 즉각 인지하고 외교적으로 대응하였다는 것이다. 1976년부터 소련은 유럽에 배치된 핵전력을 신형 SS-20로 교체하고 백파이어 핵전폭기를 배치하기 시작하였다. SS-20는 3개의 핵탄두를 장착한 다탄두 발사 기술이 적용된 중거리 탄도 미사일로 트럭에 싣고 이동, 발사할 수 있어 타격 정밀성을 획기적으로 높인 것 외에도 SLBM과 같은 기동성과 은닉성을 갖고 있었다.

당시 나토는 유럽에 SLBM과 노후화된 핵전폭기만 배치하고 있어서 소련의 SS-20의 전진 배치는 ‘공포의 균형’, 즉 동서 간 핵전력의 균형을 양적이나 질적으로 와해할 것이었다. 헬무트 슈미트 서독 총리는 이러한 심각성을 충분히 인지하였으며, 당시 팽배했던 데탕트의 분위기 속에서도 1977년 런던의 국제전략연구소 연설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고 대응 조치를 요구함으로써 2년 후 나토의 ‘이중결의’를 이끌어 내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그는 국방장관을 역임한 방위 전문가였다.

 

두 번째는 SS-20의 2차 타격 가능성에 주목하고 이 간극을 메꾸는 군사 전략적 대응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1960년 대 소련은 ICBM과 수소폭탄의 개발로 미국과 대등한 핵전력을 보유하기 시작했는데, 이런 상호확증파괴(MAD)의 상황이라면 소련이 자신들의 본토가 미국의 전략핵 보복으로부터 안전하다는 오판에서 자신들이 우위를 갖고 있는 戰域核(Theater Nuclear Forces)으로 유럽을 공격하는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의구심이 바로 ‘이중결의’를 통하여 퍼싱 Ⅱ를 유럽에 배치한 배경이 되었다. 당시 미국과 나토는 유럽에 전역핵을 배치하여 전략핵을 동원하지 않고, 소련의 공격을 전면전에서부터 국지전에 이르는 다양한 수위에 맞추어 막아낸다는 ’신축적 대응’ 전략을 취하고 있었지만 소련의 신형 전역핵 배치로 이 신축적 대응 체계에 하자가 생긴다고 보았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서독 배치 퍼싱 Ⅱ로 모스크바를 타격할 수 있게 되었지만, 소련은 동독 배치 SS-20로 미국을 타격할 수 없는 예기치 않은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세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교훈은 협상력을 높이고 관철하기 위한 유효한 협상 전략을 구사했다는 것이다. ‘이중결의’의 1번 항목이 퍼싱 Ⅱ 등 응징 전력의 유럽 배치이며, 2번 항목이 INF 협상의 요구였다. 그리고 이러한 채찍과 당근을 보충적, 병행적으로 시행해 나간다는 이중적 전략을 제시하였다. 여기에 시한을 설정하여 협상력을 높인 것이다. 소련은 나토가 응징 전력을 실전 배치한 후에야 협상에 임했고 결국 1991년까지 양측은 유럽에서 중거리 핵미사일은 모두 철수하게 된다. 이 와중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독일은 통일을 달성하였다.

네 번째는 소련이 ‘이중결의’를 적극적으로 방해했다는 사실이다. 소련은 ‘이중결의’에 관한 구상이 나오자, 브레즈네프 서기장이나 그로미코 외상 등 최고위 선에서 서독 방문 등 기회를 활용하여 이것을 저지하고자 외교적인 총력전을 폈다. SS-20 배치로 소련이 먼저 데탕트에 찬물을 끼얹었음에도, 당시 군축에 관한 유엔선언 등을 근거로 ‘이중결의’ 구상을 비토 하였다. 1983년까지 독, 소간 정상회담에서 ‘이중결의’가 7번이나 주요 의제로 올라왔을 정도였다. 지금 북한의 적반하장식의 태도는 이런 소련의 행태를 닮았다.

마지막 교훈은 국내 정치적 측면이다. 당시 서독 등 유럽 시민들은 다수가 퍼싱 Ⅱ의 유럽 배치에 반대하였다. 몇 십만 명이 결집하여 인간사슬을 만드는 등 엄청난 반핵, 평화시위가 일어났지만, 1983년 11월 콜 총리와 의회는 퍼싱 Ⅱ의 서독 배치를 의결하였다. ‘이중결의’에서 협상 조항이 들어간 것은 시민들을 설득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다수의 의견이 꼭 맞는 것은 아니다. 독일은 지금도 연방 차원의 국민투표제를 두고 있지 않다. 히틀러 시대에 남용되었던 국민투표제의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일 것이다.

 

이제 다시 한반도로 돌아와 보자. 북한은 2005년에 일찌감치 핵보유를 선언하고, 6차에 걸친 핵실험을 완료하여 100kt 이상의 핵무기를 보유한 사실상의 핵보유 국가로 떠올랐다. 마지막 6차 핵실험은 수소폭탄 실험으로 평가될 정도이며, 핵탄두의 소형화, 경량화에 성공하고 ICBM과 SLBM의 완성에 이어 EMP 폭발 능력까지 보유하고 있다고 떠벌리고 있다. 우리는 누리호가 위성 궤도 진입에 실패하였지만 북한은 이미 9년 전에 광명성 3호로 이를 성공시켰다. 올해 1월 당 대회에서는 국가 핵무력의 완성과 발전에 계속 매진하겠다고 했다. 이러한 비대칭 전력의 압도적 격차 앞에서 재래식 전력의 우위를 논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최근 한국이 SLBM 발사에 성공했다지만, 이것은 세계 유일의 비핵탄두 SLBM이다. 아무리 미사일이 좋아도 핵이 없다면 소용이 없다. 한반도만 놓고 본다면 미국이 전술핵을 철수시킨 1990년 대 초와 북한핵의 완성 시기로 보이는 2010년 정도를 기준으로 남북한 간 핵전력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여기에 ‘백년의 굴욕’을 만회하려는 중국이 지난 수십 년간 확장적 대외정책을 시도하면서 한반도와 타이완을 포함한 동북아가 새로운 무력 분쟁의 한 가운데로 내몰리고 있다. 대응책이 시급한 이유이다.

관건은 미국의 우리에 대한 신뢰이다. 최근 미국이 프랑스의 반발을 무릅쓰고 오커스(AUKUS) 동맹인 호주에 핵잠수함 기술을 제공하기로 한 결정에서 보듯이 미국이 결심하면 된다. 그런데 이런 논의가 갑자기 공허하게 들리는 건 현 정부의 안보 기조가 전혀 신뢰적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선 후보들 간 북핵 논의가 북한의 오판이나 실수를 경계하고 대비하는 새로운 출발이 되기 바란다. 종전선언 같은 한가로움은 적어도 지금 우리 세대의 몫은 아니다. ‘이중결의’의 교훈을 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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