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글 특별기고]

고교 시절, 방황하다 상담 받은 사연
"앞으로도 수많은 아픔 마주하겠지만
이미 겪어본 일이라 괜찮아.
오히려 새로운 방패가 되어줄 거야"

[편집자 주] '치유글쓰기' 신문사에서는 독자들에게 치유글쓰기를 지도해 드리고 완성본을 게재해 드립니다. 신상이 드러나지 않도록 예명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일선 학교와 병원, 요양원, 수행단체에서 출장 강의도 해 드립니다. 온라인 비대면 강의(ZOOM)도 가능합니다.(문의=gjgjgj7777@hanmail.net)

“계속 상담 치유를 받으셔요. 지금 여기서 상담을 멈추면 앞으로 더 힘겨운 짐을 메고 살 겁니다.”

고교 졸업반 때의 일이다. 수학능력시험이 끝난 뒤 더 이상 상담을 받지 않겠다고 하자 상담사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의 말이 진짜일까봐 무서워 기분이 안 좋았다. 이대로 평생 무기력함에 빠져 실패했다는 감정 속에서 살아갈까 걱정되었다.

첫 상담을 받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보건선생님께 추천 받아 찾아갔던 상담소는 우리 학교에서 꽤 멀었다.

“힘내. 지금 상황은 나중에 커서 보면 정말 별 것 아닐 거야.”

승용차 안에서 담임 선생님께서는 최대한 격려해 주셨다. 그 말씀이 위로가 되면서도 ‘현재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는 뜻으로 다가왔다.

상담소에 들어서자 한 상담사가 휠체어에 앉아 환하게 웃으며 반겨 주었다. 상담소 곳곳엔 그녀의 신앙을 증명해 주는 수많은 기도문과 성경 문구들이 있었다.

“오는 데 힘들진 않았어요? 어떤 상황인지는 전해 들었어요. 많이 힘들었죠? 솔직하게 이야기해 줘야 상담의 효과가 있을 겁니다.”

본격적으로 상담이 시작됐다. 내 이야기를 시작해 보라는 상담사의 말에 나는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이야기를 하면서 과거를 돌이켜봤다.

중학교 때 내 별명은 ‘독종’이었다. 그냥 독종이 아니라 ‘정말로 징그러울 정도의 독종‘이었다. 친구들도, 선생님도 모두 나를 부담스러워했다.

시험을 잘 보지 못하면 수행평가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는 아이, 과제를 해오지 않은 친구들이 수업 직전에 베껴보려고 보여 달라고 할 때 단호한 거절을 하는 아이, 늘 혼자 다니며 자신만의 과제를 다하지 못해 항상 전전긍긍하는 아이….

어렸을 때부터 공부만이 살 길이라는 말을 솔깃하게 들었던 나는 주위 환경이 불만족스러웠다. 교실은 항상 시끄러웠고, 친구들은 수업시간을 지겨워하다 못해 선생님과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집안 사정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의견을 조율하지 못해 자주 목소리를 높이는 부모님과 사춘기를 힘겹게 보내는 누나의 고통은 나의 학습 의욕을 높이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명문 고교에 입학한다면 좋은 친구들과 독립된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더 악착같이 성적을 올려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친구들을 외면해야 했다.

중학교 3년을 광적인 수준으로 성적에만 집착한 결과는 꽤 달콤한 사탕과도 같았다. 내가 지원할 수 있는 고등학교가 많아질수록 미소가 번졌다. 원하던 고등학교의 이름도 많았다. 마침내 원하던 고등학교 면접을 통과해 명문 고교 합격증을 거머쥐었다. 주위 사람들이 나보다 더 호들갑을 떨며 합격 소식을 퍼뜨렸다. 아버지는 친가의 모든 이들에게 전화를 돌리셨다. 어머니는 자신의 가게에 찾아온 손님들에게 넌지시 소식을 전하곤 하셨다. 행복한 순간들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날 모래성과도 같은 나의 거짓된 행복은 실체가 탄로나고 말았다. 아버지께서 실직을 하신 것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한 달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 그 뒤,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전개되었다. 사립고교에 다니던 나는 보통 고등학생들이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곳에 돈을 써야 했다. 전교생이 활동하는 동아리에서 하는 다양한 행사부터 중국 수학여행, 삼겹살 파티, 반에서 진행하는 기부행사 같은 일이 있을 때마다 한숨이 깊어 갔다.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하나 싶다가도 기숙생활을 하는 고등학생을 써줄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나를 가로막았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최상의 성적을 얻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학교에서 성적을 결정짓는 건 사교육을 받는지의 여부였다. 친구들 대부분이 학원을 다니고, 인터넷 강의를 결제하는 동안 나는 그 어떤 선택도 하지 못했다. 책장에 눈시울을 붉히며 정신을 붙잡고 책 속의 글귀를 읽어나갈 뿐이었다. 그렇게 2년을 버티고 집에 내려가 있던 와중에 불현듯 부모님께 한 마디를 건넸다.

"나 이제 다 그만하고 쉬고 싶어."

부모님께서는 구체적으로 무슨 말인지 의미를 확인하셨다. 휴학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고등학교에서 휴학이 가능할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쩌면 가능할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던 것이다. 휴학을 반대하시는 부모님께 나의 아픔을 말씀드렸다. “고통스럽다”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던 게 효과가 있었는지 결국 부모님과 상의하여 휴학을 신청할 수 있는지 학교에 문의했다. 학교 측 답변은 ‘불가능하다’였다. 학교를 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퇴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자퇴를 선택했다. 학교를 계속 다니다가는 큰일이 날 것만 같아서였다. 학교에서는 숙려기간을 주면서 생각을 정리해 보라고 권유했다. 숙려기간에 집에 내려가 하루종일 멍하니 창문만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집에는 실직하신 아버지께서 TV를 보고 계셨다. 우리 둘은 각자의 방에서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통을 감내했던 듯하다.

그러다 일이 터졌다. 참고 있던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혼을 하겠다며 싸움을 시작했던 것이다. 누나들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나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싸움의 도화선이 된 주식투자에 비난을 쏟아 부으며 아버지를 원망했다.

"끝마치지도 못할 학교에 왜 입학시켰던 거야?" 

원망 가득한 목소리를 낸 뒤 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궜다. 싸움의 끝은 내가 학교로 다시 돌아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누나들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이 모든 사건의 발단은 나의 휴학결정이라고 은연 중에 생각하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들 주변의 무거운 공기가 나에게 그 사실을 전해줬다. 결국 나는 학교로 복귀했다.

학교로 돌아온 뒤 내 주변은 폐허와 다름이 없었다. 주변 친구들도 사라져 있었고, 선생님께서도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듯 말을 걸기를 꺼려 하셨다. 오직 처음으로 나의 이야기를 전한 담임 선생님 한 분만 나에게 말을 걸어오셨다.

나는 내 안의 많은 이야기를 선생님께 전해 드렸다. 어릴 적 신장이 아파서 입원을 했던 사실과 장기 입원 도중에 아버지께서 저녁에 술을 드시고 오셔서 병실을 난장판으로 만든 일, 그 이후로 내 아픔을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는 것까지 서슴없이 말씀드렸다. 속이 한결 후련해졌다. 학교를 다니는 게 점점 고통이 아닌 무감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3학년이 되면서 담임 선생님이 다른 분으로 바뀌었다. 다시 이전에 했던 모든 이야기를 새 담임께 전했지만, 이전처럼 따뜻한 위로는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담임께서는 나와 부모님의 문제점을 지적하셨다. 졸지에 문제아가 되어 버린 나는 서서히 다시 입을 닫았다.

“넌 정말 사람을 지치게 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아.”

1학기 절반이 지났을 때, 새 담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다른 선생님을 연결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바로 보건 선생님이었다. 힘들 때면 보건실을 찾아가 하고 싶은 말을 전해 드라는 뜻이었다. 보건 선생님은 좋은 분이셨지만 학생들에게 진심어린 위로를 해 주는 스타일은 아니셨다. 그래서 그 제안을 거절하려다가 담임과 더 이상 감정싸움을 하고 싶지 않아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담임은 내게 한 마디를 덧붙이셨다.

“너 때문에 내가 우리 반 학생들의 대학입시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기억해야 해.”

담임의 이 한 마디에 나는 다짐했다. 앞으로 나의 세계를 누군가에게 펼쳐보이는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보건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또다른 상담을 권유하셨다. 그 상담을 받으면서 이전에 했던 이야기들을 또다시 반복했다. 이 상담도 ‘이미 정해진 결말을 향해 흘러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음 속에 담긴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입을 닫으니 생각보다 나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덧 수능시험 당일이 되었다. 친구들은 잔뜩 긴장을 하고, 얼굴이 사색이 되어 시험장에 들어갔다. 그와 대조적으로, 나는 생각보다 매우 담담하게 수능을 치렀다. 시험장의 책상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나도 이런 평범한 일반고교에서, 평범한 생활을 했더라면 더 행복했을까?'

수능시험일 뒤에도 두 차례 상담을 받았다. 형식적인 이야기들만 오갔다. 상담사는 계속 자신이 도와주겠다는 말만 했다. 의구심이 들면서도 이게 유일한 해결책인 것 같아 상담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머니로부터 상담이 경제적으로 부담스럽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곧바로 상담사에게 ‘상담을 그만 두겠다’고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상담사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여기서 상담을 멈추면 앞으로 더 힘든 짐을 메고 살 거에요.”

무서웠다. 내 삶이 여기서 끝난다는 말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난 뒤 이게 결국 나의 숙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담사에게 이렇게 답했다.

“괜찮아요. 이렇게 살아온 게 하루 이틀은 아니니까요. 저는 이렇게 힘든 짐을 메고 살아가도록 할게요. 어쩔 수 없는 건가 봐요.”

5년이 흘렀다. 그동안 대학교를 들어갔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다. 또 군대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학교로 다시 돌아와 어느덧 4학년이 된 나는 그 때의 기억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때로는 나를 후벼 파는 아픈 기억으로 내게 돌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하루하루 버티면서 내가 느낀 건 그 모든 아픔이 이제는 내게 새로운 방패막이가 되어 세상에 대한 무식한 용기가 되어주고 있다는 점이다.

처음으로 대학에 들어와 낯선 분위기의 수업들에 겁을 먹고 세상을 두려워했을 때가 있었다. 그 이후로 전과를 하고 온전히 혼자가 되어 학교를 다니기도 했고, 군대에선 처음으로 미군과 조우하여 그들의 무지막지한 체구에 압도당해 덜덜 떨며 소총 훈련을 받기도 했다. 그 순간에는 내가 세상에 삼켜져 내 안의 모든 게 녹아내리는 것만 같다고 느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 안에 쌓여가는 과거의 시린 아픔들은 새로 다가오는 시련들을 차갑게 덮어버리는 냉매 같은 역할을 했다.

“이 정도 고통은 아무것도 아닐 거야. 전에 비하면 지금은 충분히 견딜 수 있는 수준이야.”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새롭게 상처가 날 때마다 그것을 차갑게 덮어버렸다. 모든 순간들이 지나갈 때까지 자리에 가만히 서서 주위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처음 보는 낯선 이들과도 자유롭게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실수를 저지를 때 나를 다그치기보다 담담하게 뒤처리를 할 수 있었다. 더 이상 세상에 막연한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되었다. 

앞으로도 살면서 나는 또 수많은 아픔을 마주할 것이다. 그 때마다 과거를 끄집어내며 이미 겪어본 일이라고 나 자신을 다독이겠지. 아프겠지만 다시 먼 훗날 새로운 방패가 되어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겠지. 그리고 지금도 나는 나를 다독이며 이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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