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영 교수(동양대)

"우리 미스코리아! 이리 와, 아빠랑 같이 산책하자!"

"아빠가 라면 끊였는 데 같이 먹을까?"

교직에 계신 아버지는 내 애칭을 미스코리아라 부르며, 내 공부 시간에 방해되지 않는 한 모든 걸 함께 공유하고자 했다. 그런 다정하기도 하시고 때론 무서우신 아버지께 효도하고 싶었고, 학창 시절 늘 공부를 잘했던 친 언니를 이기고 싶은 마음이 컸나 보다.

어린 시절, 나는 공부만 열심히 하던 학생이었다. 중학교 2학년, 3학년 시절은 가히 내 인생의 전성기였던 시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나는 시험이란 시험만 보면 만점을 받았고, 한 두개 틀리는 게 있으면 몹시 후회하고 안타까워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보니 시험이 끝나면 반 학생들은 모두 내 자리로 몰려들어 정답을 맞춰보곤 했다. 심지어 담임 선생님뿐 아니라 영어, 국어, 사회 교과목 선생님들도 그 과목 문제 풀이를 내게 맡긴 듯이 문제를 읽고 해석해 주라는 요청도 다반사였다.

시험이 끝나고 성적이 나오면 담임 선생님은 반 전체 포함 학년 석차를 어김없이 게시판에 공개하곤 했다. 지금 같으면 개인정보법 위반이라 아마 학생들의 불만이 성토할 수 있겠지만 전교 1등을 달리던 나는 내 성적이 자랑스러웠다. 가장 먼저 알리고 싶은 사람은 당연, 나의 부모님이었다. 전교 1등 성적표를 안겨드리는 게 난 효도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중학교 3학년, 5월 눈부시게 아름다운 봄날, 그 날도 전교 1등 성적표를 받고, 집에서 책을 보고 있던 저녁 시간이었다. 모든 게 순조롭고 해피하기만 했던 나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발생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나는 그 날을 잊을 수 없다. 집 전화로 고모에게 전화가 왔다. 눈물 가득한 목소리로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위독하다는 전화였다. 난 너무 놀라기도 하고 머리 속이 하얗게 되버렸다.

고모는 아버지가 고속도로 졸음운전으로 돌아가셨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 채 내게 거짓말을 하며 울고 계셨던 것이다. 갑자기 떠난 아버지를 보내지 못했던 나는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어린 나이에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눈물만 났다. 그리고 공부할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모태 신앙인 난 하나님께 왜 하필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지 원망하였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같은 차를 타고 경상북도에서 집으로 귀가하는 길에 졸음 운전으로 가드레일을 들이받은 채,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사망하시고 어머니는 전복된 차에서 튕겨져 나가 기적적으로 살아남으셨다.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었고, 아버지의 교통사고로 인한 죽음은 내게 깊은 상처와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다.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할 지 알지 못했고, 마음을 잡을 수 없어서 방황하였던 내 어린 시절, 보호자가 사라졌다는 게 그저 핸드캡처럼 다가왔고 심파는 이룰 수 없이 컸고 茫然自失한 감정이 온 몸을 지배했다.

화양연화와 같은 날들이 되어야 할 내 어린 시절이지만, 아버지를 잃었고 어머니는 병상에서 오랜 기간 재활 치료를 받아야만 하는 시간이 지속되었다.

중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께서는 내 어머니를 간호해 주시느라 오랜 기간 병원 방문을 하고, 정성을 보여주셨다. 고마웠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던 건 나와 단 한 마디 상의도 없이 현대여자고등학교 3년 특별 장학생 특차 원서를 나 몰래 내고 합격했다는 통보를 해 주셨다. 좀 황당하고 억울했다. 내가 가고 싶었던 학교였던 대원외고인 특목고 날짜와 동일하게 특차 시험이기에 난 대원외고 원서조차 쓸 수 없게 돼버렸기 때문이다.

그 시절 어린 난 한동안 아버지에게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내 학창 시절, 방황은 없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갈등, 우울감은 오래 지속되었다.

그 이후 난 홀로서기를 부단히 연습한 듯하다. 우울한 감정과 싸우고, 홀로 남겨졌다는 고독을 이겨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좋은 생각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내 스스로의 실력을 키우지 않으면 대한민국이란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누구보다 더 단단한 내가 되기 위해 노력한 계기가 될 수 있었다.

남들은 부모님의 뒷받침이나 치맛바람으로 과외 공부를 하고, 취미나 특기를 살리고 하는 게 다반사이나 난 그런 여유나 혜택을 누릴 수 없었다.

부모님 찬스 없이 순수한 노력만으로 일군 지금의 나인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겪은 시련, 아픔을 극복하고 세상에서 홀로서기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기에 남들보다 두 세배 더 노력해서 얻은 성취와 성과만이 내 열매가 되었다. 남들보다 더 노력해야만 얻을 수 있는 성과들이 많았던 건 행운일 수 있다. 살면서 겪은 많은 어려움과 고난들이 닥칠 때마다 난 누구보다 태연한 자세가 될 수 있었던 건 아마 어린 시절부터 단련이 된 홀로서기 연습 덕분이 아닐 까 생각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보내고 슬픔에 빠져 원망만 하고 보낸 시간들이 길다 보니 그런 멈춤의 시간을 극복하기로 마음먹은 것이 내가 일찍 철이 들고 성숙하게 된 계기가 된 듯하다. 대학 시절, 용돈을 벌기 위한 과외 아르바이트도 많이 해봤고, 대학 졸업 후 방송 일, 행사 MC, 강의, 박사 학위 취득까지 모두, 시간이 허락하는 한 노력했던 건 내가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 자립하는 길이었다.

'서울 깍쟁이 차도녀일 것이다', '외모를 보면 매우 여성 여성할 것이다'라는 잘 모르는 이들의 편견은, 나를 제대로 알고, 대화를 해보면 확 바뀐다고들 한다. 사람들은 날 보며 털털하고 인내심이 강하고 남자 성격에 더 가까운, 영웅적 기질이 넘치는 여걸이라 종종 부른다. 남자들보다 강한 멘탈 내지 과업지향적 사고 방식과 털털함을 지니고 있지만 반면, 속으로는 상처도 많은 사람이라 사람들의 비수 같은 말과 행동, 오해에 잠 못 드는 예민함도 동시에 지니게 됐다.

사람은 경험만큼 단단해지는 것 같다. 무너지는 마음에 매몰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내 스스로의 믿음과 자존감이 있어야 열심히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는 듯하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에 난 장거리 운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나 역시 강의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졸음 운전을 해 본 적이 있기에 그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인지하고 조심하게 된 것이다.

나처럼 슬프고 견디기 힘든 경험을 한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인생은 어찌보면 고해일지 모르나, 삶이 버겁게 느껴질 때, 나를 보며 용기를 내고 더 긍정적으로 살 길 바란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보고싶고 사랑해요!

<이서영 교수 약력>

- 저서 -

'아나운서 이서영의 사람을 끌어당기는 공감 스피치'

'끌리는 말에는 스토리가 있다'

'예스를 이끌어내는 설득 대화법'

'7일 만에 끝내는 스피치'

- 2019년 3월~현재 : 동양대학교 전임 교수

- 2017년~2019년: "Marquis Who's Who in the world" 등재 및 Marquis Albert Nelson Lifetime Achievement 수상

- 2004년~2017년: SBS GOLF, YTN, MBC, MBC SPORTS, 한경 TV, NATV, ETN 및 국제 컨퍼런스 영어 MC 및 아나운서,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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