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한글날 단상 - '언어와 노벨상'

장시정 독일모델연구소 대표

'한글의 탄생'을 저술한 노마 히데끼 野間秀樹는 한글이 태어나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그 신비로움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일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다. 일본인 학자의 높은 평가에서 보듯이 우리는 한글이라는 빛나는 문화유산을 갖고 있다. 하지만 유아독존에 빠져서는 안된다 생각에 오늘 한글날을 맞아 우리 말과 글에 대한 단상을 올려본다.

독일 철학자 피히테는 사람이 언어를 만드는 게 아니라 언어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고, 비교언어학의 창시자라는 빌헬름 폰 훔볼트는 언어와 생각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 같은 언어를 쓰는 민족은 동일한 사고방식에 제약받는다 했다. 각 언어가 나름의 세계관을 갖는다는 것이며 조금 과장한다면 언어에 따라 생각이나 지적 수준의 우열도 결정된다는 의미이다.

노마 히데끼 野間秀樹가 지은 '한글의 탄생'(사진=장시정 대표)
노마 히데끼 野間秀樹가 지은 '한글의 탄생'(사진=장시정 대표)

10월은 노벨상이 발표되는 노벨상 시즌이다. 이때가 되면 늘 떠오르는 의문이 "왜 한국 사람은 노벨상을 못 탈까"라는 것이다. 평화상은 학문, 연구와는 거리가 멀어 ...논외로 하겠다. 방탄소년단을 포함, 세계적인 예술가나 연예인 그리고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체육인은 꽤 많은데, 아니 당장 손흥민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공부나 연구를 해서 세계적인 업적을 이룬 한국인은 거의 없다. 노벨상을 기준으로 해서 말한다면 더욱 그렇다. 여기서 언어와 노벨상의 연관성을 생각해 본다.

우선 영어나 독일어를 쓰는 서양 문화권 사람들의 사회적, 문화적, 과학적 영역에서의 지적 활동 범위와 수준을 생각해 보고 그것을 우리 국어를 쓰는 한국과 비교해 보자. 통계치 같은 이성적 근거를 댈 수는 없지만 나의 칸트식 '감성적 직관'에 따른다면 아마도 양적, 질적인 면에서 잘해야 1,000 vs 1 정도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나마 세계화의 진척으로 나라 간 학술, 연구 교환이 이루어지고 많은 연구 업적이나 저서들이 번역되기는 하지만 그 수준이나 속도를 볼 때 우리가 영미권이나 독일 등 유럽의 학술, 연구 수준을 따라잡는 데는 수십 년 이상이 걸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언어나 언어권이 갖는 의미는 상상 이상으로 크다.

그나마 일본이 서양 문화권과 고립된 언어 문화권임에도 불구하고, 물리, 화학, 의학 노벨상만도 22개나 받을 정도로 학술, 연구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난학의 도입 이래 지난 수백 년 동안 각고의 노력으로 학문의 자립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어, 일본 글자가 한글보다 적어도 학문, 연구의 관점에서 더 유리한 것은 틀림없다. 일본어는 한자의 채용으로 개념을 나타내는 명사가 우리보다 훨씬 발달되어 있고, 외래어를 가타카나라는 별도의 문자로 소화해서 활용하기 때문이다.

한글을 소개할 때 우린 한글이 배우기 쉽다는 실용성을 늘 자랑하지만, 언어 습득 과정의 용이성보다는 습득 후의 활용성이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인간의 수명이 몇 개월, 몇 년이 아니고 최소한 반세기에서 한 세기에 걸친 장기간임을 볼 때 성인이 되기 전 일정 교육기간 중 충분히 습득할 수 있을 정도의 난이도라면 그것이 너무 간단하고 쉬운 것보다는 다소간의 복잡성을 갖더라도 활용도가 큰 것이 좋을 것이다. 그래서 독일어가 배우기 어려운 언어에 속하지만 그것을 모국어로 사용하는 독일인들에겐 교육 기간 중 충분히 습득 가능한 언어이고, 오히려 그 난이도로 인한 활용 가능성이 더욱 크고 정확하기에 더 우수한 언어라고 보는 것이다.

한글은 표음문자로서, 파릇파릇하다, 푸릇푸릇하다 등의 의성의태어가 매우 발달한 언어지만 명사가 턱없이 취약한 언어다. 특히 눈으로 볼 수 없는 개념을 나타내는 명사는 더욱 취약하다. 그러니 예체능 분야에서라면 몰라도, 철학이나 과학 분야에서라면 어휘부터 부족한 게 사실이며 이런 언어의 빈약함이 다시 우리의 사고를 제약하는 것이다. 그나마 우리말의 명사, 특히 추상적 개념을 나타내는 명사는 거의 대부분 한자어이며, 이 중에서도 일본 사람들이 만든 소위 '일본제 한자어'가 수없이 많다. 많은 학술 용어(사회, 문화, 혁명, 경제, 회사, 주식, 국민, 운동, 헌법 등)부터, 일상생활용어(구두, 야채, 인간, 시계, 충치, 건물, 호우, 방송, 생방송, 가격, 단어 등)까지 일본제 한자어는 넘친다. 한자의 종주국인 중국에서조차 학문 용어 중 반 이상이 일본제 한자어라 한다. 사정이 이럴진대 어찌 한글 전용 주장으로 우리의 사고를 더욱 마르게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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