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대로(한국어인공지능학회 회장)

국어연구학회는 국어독립운동가 양성소이자 본부

우리 겨레는 우리말은 있으나 우리 글자가 없어 오랫동안 중국 한자를 썼다. 그래서 말은 우리말을 하고 글은 한자를 쓰게 되어 삼국시대부터 중국 한문을 읽는 것이 학문이었으며 교육이었다. 문화도 우리 자주 문화는 없고 중국 문화 곁가지였다. 그러니 이천 년이 넘게 한문을 썼지만 요즘도 우리가 쓴 한문책보다 중국 사서삼경을 읽고 우러러본다. 그런데 이 한자는 배우고 쓰기 힘들고 한문은 우리말과 달라서 매우 불편했다. 그래서 세종이 1443년에 우리말을 적기 매우 좋은 우리 글자를 만들었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중국 한문 속에 살아서인지 제 글자 한글은 오랫동안 힘을 쓰지 못한다.

400여 년 동안 그러다가 19세기 고종 때부터 우리 글자를 써야 좋다는 것을 깨달아서 1894년 칙령으로 공문서부터 우리 글자를 쓰자고 했으나 한글을 쓰기 편하게 갈고 닦지 않은데다가 오랫동안 중국 한자와 문화를 섬기던 버릇이 남아서 뜻대로 되지 않았다. 1907년에 정부에 국문연구소를 만들어 우리말을 우리 글자로 적는 길을 열려고 했으나 이 또한 여러 사람 생각이 다르고 연구소 안에 일본인까지 있어 감시하니 주시경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주시경은 진짜 우리말을 우리 글자로 적는 말글살이를 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려고 1908년 8월 31일 서울 봉원사에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뜻이 있는 인사들을 모시고 국어연구학회(회장 김정진)를 만들었다.

사무실은 상동청년학원에 두고 산하에 ‘국어강습소’를 설치하고 우리 말글을 가르치면서 우리말본을 연구하고 말모이도 만든다. 이 때 국어강습소를 만들고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키운 것은 매우 잘한 일이고 뜻깊은 일이었다. 거기서 교육을 받은 이들이 모임 회원이 되고 또 함께 다른 이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고 연구를 했다. 강습소 1회는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기 전에 마쳤는데 21명이 나왔고 2회는 나라를 빼앗긴 1910년 10월에 열려 51명이 나왔는데 최현배, 김두봉 들 훌륭한 국어독립운동꾼들이 나왔다. 이 강습소를 마친 이들은 모두 모임 회원이 되고 강사와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왼쪽부터 국어연구학회 연혁을 ‘적은 한글모죽보기’ 겉장과 그 속에 있는 특별회원(강습소 출신 최현배, 이대영 들) 명단, 오른쪽 끝은 주시경이 연구해 한글로만 쓴 우리 말본 자료.
왼쪽부터 국어연구학회 연혁을 ‘적은 한글모죽보기’ 겉장과 그 속에 있는 특별회원(강습소 출신 최현배, 이대영 들) 명단, 오른쪽 끝은 주시경이 연구해 한글로만 쓴 우리 말본 자료.

이 모임 뜻이 좋으니 관립 한성사범학교 교사와 졸업생들, 뜻을 찬성하는 젊은이들이 회원으로 참여하여 학회 규모가 커졌다. 그러니 일본 경찰 감시가 더욱 심해졌다. 그래서 1914년 여름 주시경은 외국으로 망명하기로 결심하고 고향에 다녀온 뒤 갑자기 먹은 것이 체해서 병원에 갔다가 이 세상을 떠난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여기저기 여러 학교를 돌며 우리말 교육을 하다 보니 몸도 마음도 약해져서 먹은 것이 체한 것이다. 그런데 병원에 가니 일본인 의사가 큰 병이 아니라고 했는데 주사를 맞고 입에 거품을 내며 돌아가셨다고 한다. 의료사고나 아니면 그 때 일경 감시를 받고 있을 때이니 독살한 것으로 여겨진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그 뒤 제자 김두붕은 중국으로 망명하고 한동안 모임 활동이 잠잠하다가 남아있던 제자 최현배, 김윤경, 장지영, 임경재 들이 중심이 되어 1921년에 ‘조선어연구회’라는 이름으로 다시 모여 주시경이 이루려던 일을 이어가면서 ‘한글’이란 학술지도 내고 한글날(1926년 가갸날이었다가 1928년 한글날로 바꿈) 만들었으며 1931년에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한글맞춤법, 로마자표기법도 만들고 표준말도 정하고 우리말 말광을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겨레를 없애려고 학교에서 우리말을 못 쓰게 하고 창씨개명까지 하던 일제는 1942년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차안유지법 위반으로 모두 옥에 가두고 출판을 앞둔 말광 원고를 빼앗는다.

그 때에 모진 고문과 추위에 이윤재, 한징 두 분은 옥에서 돌아가셨다. 이렇게 목숨까지 바치며 우리 말글을 지키고 갈고 닦은 덕에 1945년 광복 뒤 우리 말글로 교과서도 만들고 공문서도 쓸 수 있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이 모두 1908년 국어연구학회를 만들고 국어 운동가를 키운 덕분이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니 우리말을 국어라고 할 수 없고 일본말이 국어가 되니 1911년 학회 이름을 ‘배달말글몯음’이라고 우리말로 바꿨다가 1913년에 ‘한글모’로 바꾸면서까지 이 모임을 살리고 애쓴 고마운 분들이 있었기에 된 일이다. 이 모임은 보통 학회를 넘어 우리말 독립운동가 양성소였고 본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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