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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로 쓴 대한제국 기념장과 민영환 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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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로 쓴 대한제국 기념장과 민영환 유서
  • 리대로 한국어인공지능학회 회장
  • 승인 2020.03.11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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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때 한글을 살리려 애쓴 자취들

우리 5000년 역사에서 대한제국 시대는 한말글 독립 발자취에서 매우 뜻깊은 때였다. 삼국시대부터 2000여 년 동안 쓰던 한문에서 벗어나 우리 말글로 말글살이를 해야 좋다는 것을 깨달은 시기였고 그렇게 하려는 씨앗을 뿌린 시대였다. 조선 초기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것은 우리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에도 빛날 훌륭한 일이었다. 그리고 400여 년이 지나 세종정신과 우리 글자를 살려서 써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정부가 그 깃발을 든 중대한 시기였다.

세종 뒤 연산군 때부터 400여 년 동안은 세종의 자주, 창조정신이 사라지고 중국 한문을 섬기는 뿌리 깊은 언어사대주의에다가 당파싸움으로 나라가 흔들리고 기울었다. 거기다가 선조 때엔 임진왜란, 인조 때엔 병자호란으로 나라가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개혁군주라는 정조 때 실학파란 박제가, 박지원, 정약용들은 우리 얼과 말글을 살릴 생각은 아니하고 오히려 더 한문과 중국 문화에 빠져서 중국어를 공용어로 하자고까지 했다. 이들은 중국 한문에서 벗어나는 것이 참 개혁이고 실학이란 것을 깨닫지 못했다.

대한제국 고종황제 50돌 기념장(왼쪽 푸른색)과 2006년 한글날 국경일 기념주화 ‘효뎨례의’
대한제국 고종황제 50돌 기념장(왼쪽 푸른색)과 2006년 한글날 국경일 기념주화 ‘효뎨례의’

그 때엔 기독교가 들어와 성경을 한글로 선교하면서 한글이 일반인들에게도 알려졌을 때이니 정부와 학자들은 한글을 갈고 닦아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길을 만들어야 하는데도 그랬다. 그 때 개혁군주라는 정조와 실학파들이 제 글자를 쓰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이고 큰 개혁인지 깨닫고 우리 글자를 잘 갈고 닦아서 누구나 쉽게 쓸 수 있게 다듬었더라면 이 나라는 몰라보게 발전하고 튼튼한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였다. 참으로 서글픈 일이었다.

그리고 그 뒤 임금들은 왕세자를 낳지 못하거나 어린 왕자를 임금으로 앉히고 섭정을 하는 세도정치와 당파싸움이 심하니 왕권은 약해지고 나라는 흔들렸다. 그런 때에 대원군이 나타나 그 아들인 고종을 임금으로 앉히고 왕권을 회복해서 나라를 튼튼하게 해보려고 나선다. 마침 서양 세력이 중국과 우리를 넘보고 일본이 중국에 맞서니 우리가 중국 지배로부터 벗어날 기회가 왔다. 우리처럼 소리글자인 로마자를 쓰는 서양 기독교가 성경을 한글로 쓰는 것을 보고 한글이 조금씩 빛을 보기 시작했다.

1886년 고종이 세운 신식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 영어교사로 온 미국인 헐버트가 한글이 훌륭함을 깨닫고 한글을 배워 3년 만에 한글로 ‘사민필지’란 세계사회지리책을 내고 기독교 선교사들이 한글로 성경을 번역해 보급하고 배재학당, 이화학당들을 세우고 중국 사서삼경이나 읽던 교육이 아닌 과학, 수학, 외국어, 세계지리들을 가르치고 공부하니 중국 유교와 한문 세력이 약해진다. 그리고 1894년에 고종이 칙령으로 공문서를 우리 글자로 쓰게 하고, 1996년에 한글로 만든 독립신문이 나온다.

그리고 1997년엔 중국으로부터 허락받은 ‘조선’이라는 나라이름을 버리고 자주국가가 되겠다고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그 기념으로 1901년 9월 7일에 고종황제 태어난 50돌을 맞아서 “ “대한뎨국 대황뎨폐하 성슈 오십년 칭경긔념 은쟝 광무 오년 구월 칠일”이라고 한글로 가로 쓴 기념장을 만든다. 이 기념장을 가지고 있는 최봉영 교수 말에 “이 때 기념장이 금, 은, 동 세 가지로 만들어졌으며 1902년에 고종황제의 51세와 등극 40돌에도, 1907년 1월에 황태자의 가례를 기념하여, 1907년 8월에 순종황제의 즉위를 기념하여, 1909년에 순종황제의 순행을 기념하여서도 기념장이 만들어졌다.”라고 했다.

오른쪽은 각 공관에 보낸 민영환 한글유서(연합뉴스), 왼쪽은 명함에 쓴 한문유서(천지일보)
오른쪽은 각 공관에 보낸 민영환 한글유서(연합뉴스), 왼쪽은 명함에 쓴 한문유서(천지일보)

이 기념장이 한글로 가로 쓴 것은 매우 뜻깊고 가치가 큰일이다. 세종 때 ‘효뎨례의’라고 우리 글자로 쓴 동전을 만든 것처럼 우리 글자를 알리고 쓰려고 애쓴 중대한 사건이다. 고종이 우리 글자를 쓰게 하려고 칙령을 내리고 우리 글자로 쓴 기념장을 만든 것은 고종도 훌륭하지만 그 가까이에 누군가가 이렇게 우리 글자를 써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한 이들이 있었고 그 결심을 따른 관리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 일은 독립문에 그 이름을 ‘독립문’이라고 우리 글자로 쓰고 또 매일신문과 대한제국신문들이 한글로 나온 일과 함께 한글을 살리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알 수 있는 큰 발자취이다.

또 하나 대한제국 때 중요한 한글 역사 자료가 지난 2월 26일에 나왔다. 대한역사문화연구회 이재주 고문이 공개한 자료인데 대한제국 때에 민영환 선생이 외국 공관에 보낸 한글로 쓴 유서다. 천지일보 보도에 “이 유서는 24㎝x27㎝ 크기로 한지에 내려 쓴 것으로서 고려대박물관에 소장된 명함에 쓴 한문유서(5㎝x9.5㎝)와 내용은 비슷하나 내용 일부와 제일 끝부분이 다르다. 한문으로 쓰인 유서는 ‘嗚呼國恥民辱乃至於此(오호국치민욕내지어차)’로 시작되었으나 한글유서는 첫 머리에 ‘민보국 유지 경고 한국인인(民輔國 維持 警告 韓國人人)로 시작되며 끝 부분은 각 ‘공관 기서(寄書. 각 공관에 편지를 보냄)’가 본문 글씨보다 크게 나타나 있다.”라고 했다. 이 문서는 명함에 쓴 한문유서보다 크고 공문형식이다.

이 한글유서는 “공문은 한글로 쓰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는 1894년 고종 칙령 공문식을 지킨 것으로 보인다. 민영환님이 한문 유서를 쓴 한글명함을 보면 한글 가로쓰기로 되었다. 오늘날 정치인과 공무원들 가운데 외국인을 위해서 한문으로만 명함을 만드는 자들과 견주어 보면 그 시대 한글만으로 쓴 유서와 함께 그 분이 얼마나 바른 사람인지 짐작이 간다. 그 때 이완용은 철저한 기회주의자요 가짜 애국자였지만 민영환님은 법을 잘 지키는 참된 국민이었고 나라를 사랑하고 고종을 잘 모시는 참된 애국자요 충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시대에 민영환 같은 충신과 애국자가 많았고 온 백성들이 그들을 밀어주었다면 나라는 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은 천지일보에 나온 민영환님의 것으로 추정되는 한글 유서인데 몇 낱만은 이해를 돕게 하려고 한자를 함께 쓰고 풀이한 것이다.

민보국 유지경고 한국인민오호라, 나라와 민족의 치욕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구나. 우리 인민이 장차 경정하는가. 온대 진멸하는 지라. 무릇 살기를 구하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사람은 반드시 살아날 수 있으니, 이를 어찌 폐릉(斃蔆?. 죽어가는 한해살이 수초. 대한제국 국민들을 지칭함)은 알지 못 하리요.영환이 한번 죽기를 결단하여 우러러 황은(皇恩)을 갚고, 우리 2천만 동포 형제들에게 사례(謝禮)하노니 영환이 죽어도 죽지 아니하였고 이제 죽어도 혼은 죽지 아니하여 구천에서 여러분을 돕고자 한다.동포 형제는, 천만 배나 분려(奮勵)를 빼내어 지기를 굳게 하고 학문에 힘써 결심 노력하여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할지어다. 그러면 나는 지하에서 기꺼이 웃으련다.오호라, 조금도 바람을 잃지 말지어다. 영결하여 우리 대한제국 2천만 동포 형제에게 계고 하소라(하노라).

각 공관 기서(意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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