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용옥 [경희대 명예교수] 
광화문 현판, 서예체로 변경해야
한자보다는 한글로

광화문 현판을 원점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201457일 문화방송 보도를 접하면서 그리고 숭례문 화재와 부실 복원을 목격하면서 허탈감을 넘어 절망감이 앞선다.  글쓴이는 2005디지털 복제는 문화재 복원이 아니다.”는 칼럼을 중앙일보에 썼다. 수많은 복제품이 남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문화재청장이 사진 원판 영상을 디지털로 복원하겠다는 계획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는 내용이었다

문화재 소위의 복원 쌍구 모본 방식 변경

청장이 갈리게 되자 현판 복원 방식도 변경 되었다. 디지털 복원은 문제가 있으므로 사진 원판 영상을 임태영 서체와 근접하게 복원한다고 하였다. 이른바 쌍구 모본(雙鉤模本) 방식이다.

쌍구 모본이란 서체의 윤곽선을 그리고 그 안을 칠하여 채워 넣는 방식이다쌍구 모본이란 서예의 습작단계에서 대가의 서체를 본뜨거나 탁본에서 시행하는 방안이다. 유명한 광개토대왕비문은 일본군 사코 중위의 초기탁본이 쌍구 모본 방식으로 작성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방식은 서예 작품의 복원으로는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그러자 문화재청은 2차 질의의 회신에서,임본 또는 의본이란 말로 살짝 바꾸었다.

디지털 영상 복제(서체글씨 추출)와 서예 원상 복원의 차이 

문화재청은 세종대학 백성옥 교수에게 디지털 영상 복원 용역을 주었다. 복원영상이라 표현했지만 서체 글씨 추출이지 서예 작품 복원은 아니었다.

디지털 영상 복제중인 모습

백상옥교수의 디지털 영상 복원은 결국 당시 유 청장이 제안한 디지털 영상 복원 방식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문화재 소위가 결의한 쌍구 모본 복원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유는 디지털 복원은 글씨추출이지 서예 작품의 재창작 과정이 없기 때문이다. 부실 복제라는 말은 아니다. 결국 2010815일 현판식을 강행했다

복제 현판의 균열  

그러나 3개월도 못가 현판에 균열이 생겼다. 문화재청은 원목 제공자 신응수 대목의 협력으로 균열 부분에 땜 빵 처리하여 또 다시 걸었다

복제된 현판의 규격미달 

문화재청은 글쓴이의 질의서 회신(2010810)에서 “1926년 실측도면에 입면도와 상세도에 현판이 도시되어 있으며, 유리원판 사진에는 연목의 개수를 확인할 수 있어 현판 규격 검토에 참고하였고,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광화문 근경 사진에 현판의 외곽선이 확인되어 복원설계도면과 비례를 통하여 현판의 규격을 검토한 결과 1968년 광화문의 현판과 거의 유사한 수치로 확인되었음라고 회신하여 왔다

복제된 현판의 규격미달
복제된 현판의 규격미달

3차질의(130312) 회신에서 사진 측량술에 의한 글씨 추출 및 쌍구 작업을 했다고 알려왔다. 그러나 서까래 규격에서 차이를 보였다.  원본에는 14개의 구간이지만 복원 영상에서는 12개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사진 측량 측량술에 의한 보정이 이루어졌다고 하였으나 규격 미달로 밝혀지면서 사진 측량술 기법을 사용했다는 3차 답신은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역사복원  

경복궁은 1395(태조 4)에 창건하였다. 1592, 임진왜란 때 노비들의 방화로 불탔다. 1865(고종 2)에 흥선대원군 때 중건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광화문은 동쪽 건춘문 쪽으로 옮겨갔다. 폭격으로 문루는 파괴되었다. 1968년 콘크리트 건물로 복원했으며 박정희 한글 현판을 달았다. 당시의 시대정신을 반영한 결과였다. 분명한 점은 문루는 파괴되었지만 석축 3통문은 파괴되지 않고 이전되었다는 점이다

서체 논란과 역사 흔적 지우기  

광화문 현판복원 문제는 지난 10년 동안 논란을 지속해 왔다. 2005년 유 청장의 제의로 시작된 디지털 영상복제는 수많은 착오와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3차 복원이 진행 중이다. 언필칭 최첨단 디지털 ICT기술을 응용하겠다고 했지만 디지털로 복제된 현판에서 풍기는 맛은 이발소에 걸어 논 서양유화 복사판 그림을 연상케 한다.  

중건 당시 대원군은 서원 철폐령에서 보듯 문신과 양반의 기득권 철폐를 겨냥하면서 문신들을 조롱하듯 무신에게 휘호를 명한 것으로 보인다. 임태영 휘호는 치기(稚氣)성이 엿보이는데다 영건 도감 제조의 서예적 소양이 그렇게 높아 보이지 않는다. 또 대원군의 하수인 격의 보통 서생 정도의 작품이다. 서예 수준은 전문가의 감식안이 아니더라도 그다지 높다고 볼 수 없으며, 여러 복제 과정을 거치면서 박제품처럼 보이고 있다. 이는 우리의 서예 문화적 전통과 자긍심을 크게 훼손한 결과로 보인다. 첫 단추부터 잘못된 선택이었다.  

유 전 청장은 그의 저서에서 박정희 한글 서체를 사령관체라고 혹평하고 살기마저 느낀다 하였다. 이런 편견에다 문화재의 충실한 복원이란 자아 독선을 명분으로 사령관체를 내리고 산업사회 상징인 콘크리트 문루(門樓)를 헐었다. 당시 대부분의 목조 문화재 복원은 콘크리트 건물[청와대 건물도 마찬가지다였다.]이었다. 비용도 문제지만 영구 보존의 목적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김형오 전 국회 의장은 승자의 역사파괴[2005, 둘은 동기동창으로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라 지적했으며 언론에서는 역사 흔적 지우기란 지적이 있었다. 또한 건물과 함께 역사를 복원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조선일보]

문화재청은 서울시와 협의하여 역사복원을 하겠다고 발표했지만 10년이 지나도 감감 무소식이다. 역사 지우기만 진행하고 앞 광장 조성 등 전체 복원 구상은 이루어 지지 않았다.  

이 사진에서 보면 현판 밑에 하얗게 칠한 후 가물(假物)이 보인다. 문화재 당국은 명확한 입장이 없으나 창호에 부가물을 달았다는 것이다. 후 가물의 정체도 명백히 밝혀 이중 현판 설치의 역사적 근거로 삼아야 한다

마무리하는 말 

결국 디지털 영상 복제는 글씨체는 명쾌하게 추출했지만 서예의 복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더구나 구 시대유물을 철저히 복원한다는 명분으로 세로쓰기를 채택했다. 門化光이라는 세로 쓰기의 서법이다. 눈과 손의 간격이 보통 정서에 맞지 않는다. 지금의 시대상황은 가로 쓰기와 한글이 대세이고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위에서 아래로 쓴다. 이러한 시대정신을 반영해서 임태영 휘호체의 광화문(光化門)으로 써야 한다. 이 시대 최고의 서예 작가에게 위촉하여 재창작해야 한다

새 현판 구성 예시
새 현판 구성 예시

한글현판 복귀 문제  

흔히 한글 현판 글씨를 독재자의 글씨라고 폄하한다. 그러나 반면에 활달한 기상이 넘쳐난다는 평가도 있으며 지난 40년간 사랑을 받아 왔다. 이제는 산업시대와 역사적 사실로 받아 들여야 한다. 중국의 자금성에는 한자와 만주족 문자를 나란히 병서하고 있다. 중국은 이런 현판을 철거하지 않았고 한자 일변도로 고치지도 않았다. 원래 청나라시대 만주족 글씨를 오른편에 썼던 것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역사의 치욕도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문루 복원과 원형 3통 석축 문 -한글 현판의 위치 문제

우리는 흔히 광화문 복원이라 하는데 정확히는 문루 복원이고 그에 비해 3통 석축 문은 문자 그대로 원형이다. 콘크리트 문루도 헐어버렸지만 그 때도 3통 석축 문은 원형이었다. 따라서 진정한 역사 복원이라면 한글 현판도 3통 석축 문 위의 원 위치로 환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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