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이경묵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

  

이경묵 교수
이경묵 교수

며칠 전에 사법시스템에 대한 신뢰도에서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에서 꼴찌를 했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사법부에 대한 신뢰도가 꼴찌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법부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판사들을 사건 영역별로 전문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고도의 지식을 요구하는 영역에서는 전문화(Specialization)가 일반적인 추세입니다. 한 사람이 좁게 정의된 분야에 집중해서 전문가로 크는 것입니다. 이런 추세를 따르지 않는 대표적인 조직이 법원입니다. 가정 법원이나 특허 법원처럼 일부 전문화된 영역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판사들은 사건 영역별로 전문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범죄나 사건도 복잡해지고 지능화되고 있기 때문에 판사들이 담당 사건의 맥락에 대한 충분한 사전 지식을 바탕으로 심판을 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판사들을 영역별로 전문화하면 판결과 법원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높아지지 않을까요?

전문화(Specialization): 조직설계 핵심 변수

구성원들을 어느 정도 전문화시킬 것인가는 조직설계의 핵심 변수입니다. 한 명의 직원이 협소하게 정의된 업무(과업, Task)를 반복적으로 하도록 할 것인가 아니면 한 명의 직원이 다양한 업무를 동시에 맡도록 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협소하게 정의된 업무만 반복적으로 수행하도록 할 때 전문화(Specialization)한다고 합니다. 시간적으로 한 명의 직원이 협소하게 정의된 직무를 오랫동안 맡도록 할 것인가 아니면 직무 순환을 통해 다양한 직무를 경험하도록 할 것인가도 전문화와 관련된 이슈입니다. 구성원을 특정 분야의 전문가(Specialist)로 키울 것인가 아니면 다양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다기능보유자(Generalist)로 키울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전문가로 키우는 것과 다기능보유자로 키우는 것은 각각 장점과 단점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아래의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blog.naver.com/kmlee8302/221554314379

세계사적 추세인 전문화(Specialization)

모든 분야에서 전문화는 역사적 추세입니다. 사람들이 점점 더 한 분야에 집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학계와 의사들의 예만 들어 보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과학, 사회과학, 철학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했습니다. 지금은 그런 학자가 없습니다. 교수가 모든 분야를 다 연구할 수 없습니다. 쌓인 지식이 점점 많아지면서 쌓인 지식을 학습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점점 더 좁은 분야에 집중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벨 물리학상을 받는 사람들의 평균 나이가 점점 올라가고, 모든 학문 분야가 점점 더 세분화되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의사들도 계속 전문화되어 왔습니다. 예전에는 의사 한 분이 모든 병을 다 다루었지만 전문화가 이루어지면서 내과, 외과, 안과, 이비인후과 전문의들이 등장했습니다. 이제는 안과에서도 백내장 전공, 녹내장 전공 등으로 더 세부적인 전문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쌓인 지식이 많아지고 그것을 학습해서 환자를 치료해야 하기 때문에 전문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정의학과처럼 다양한 병증을 다루는 곳도 있지만 심각한 병증의 경우에는 가정의학과에서 치료하지 않고 세부 전공으로 넘깁니다.

판사들을 전문화시키지 않는 이유: 국민보다는 판사들을 중시하는 문화

사건의 맥락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심판을 보도록 하기 위해서는 판사들을 민사소송 전문판사, 형사소송 전문판사, 파산 전문판사, 금융사건 전문판사, 기업 사건 전문판사 등으로 영역별로 전문화하는 것이 좋습니다. 기업 사건을 판결하는 판사들이 기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잘 모르는 경우도 많고, PEF 사건처럼 복잡한 사건의 경우 판사에게 그것이 무엇인지를 이해시키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합니다. 기업 간 거래의 복잡성도 높아지고, 범죄도 더 정교화되고 지능화되고 있기 때문에 그 분야에 대한 이해 정도가 높지 않으면 합당한 판결을 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해당 분야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의견을 듣기도 하지만 기초 지식이 부족한 상태에서는 전문가들이 설명하는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판사님들은 학습 능력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판결을 잘 할 것이라 믿습니다. 문제는 소송 당사자들의 수용성입니다. 소송 당사자들이 판사가 해당 사건이 일어난 맥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판결에 수긍하기가 어렵습니다. 판사의 전문성이 부족하다고 보기 때문, 즉 작업 기술의 표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판사들의 심판을 받는 국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판사들이 전문화되는 것이 좋습니다.

판사들이 전문화되면 판사들에게도 좋은 면이 있습니다. 전문화되지 않으면 사건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도 어렵고, 이해하는데도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전문화가 이루어지면 판사들이 훨씬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전문성을 가진 영역의 사건에 대해서는 조서를 읽고 사건의 핵심을 파악하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판결문을 쓰기도 쉽습니다.

그런데 왜 판사들의 전문화가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판사들을 전문화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법원 조직에서 결정하는데, 법원에서는 판사들 간의 형평성을 매우 중시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국민들을 대상으로 공정한 심판을 보는 것과 판사들 간의 형평성 사이에서 후자를 우선시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판사들 간의 형평성도 법원 인사에서 고려해야 할 중요한 요소이긴 합니다. 수도권에서 근무하고 싶어 하는 판사가 많고 지방에서 근무하고 싶어 하는 판사가 적으면 지역별 배치 순환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수도권에서는 근무하지 않고 특정 지방에만 계속 근무하겠다는 판사들에게는 그것을 허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지역법관제 혹은 향판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4년부터 시행했는데 향판들이 지역 유지 및 변호사들과의 유착 관계를 형성하면서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향판들이 내린 지방법원 판결 중에서 엉터리 판결이 꽤 있다고 하지요. 그러다가 황제 노역 판결이 문제가 되면서 지역법관제가 폐지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news1.kr/articles/?3751503

판사들을 사건 영역별로 전문화시키지 않는 가장 중요한 이유 역시 판사들 간의 형평성입니다. 판사가 감당해야 할 심리적 부담이 사건 영역별로 다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신 구속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형사 재판을 선호하는 판사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재판하는 판사의 심리적 부담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변호사로 개업했을 때의 수임료도 사건 영역별로 다를 수 있습니다. 판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로 개업했을 때 판사 재직 시에 어떤 사건을 다루어봤느냐가 수임할 수 있는 사건의 종류를 좌우하고, 따라서 높은 수임료를 받을 수 있는 사건을 맡고 싶어 하는 판사들이 많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문화를 할 경우에는 수임료가 낮은 이혼 소송 전문판사가 되길 원하는 판사의 수는 적을 것이고, 수입료가 높은 기업 사건 전문판사가 되길 원하는 판사의 수는 많을 것입니다. 판사들 간의 형평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판사를 그만두기 전에 인기 없는 소송 사건도 맡아 보게 하고 인기 있는 소송 사건도 맡아 보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전문성이 부족한 판사가 심판을 보는 문제가 생깁니다. 행정부에서 공무원들을 전문화시키지 않으면서 발생하는 문제와 동일한 문제가 법원 조직에서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행정부 공무원들을 전문화시키지 않으면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래의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blog.naver.com/kmlee8302/221554314379

판사들에 대해 장구형 경력 개발 방식을 쓰면 어떨까요?

 

​판사들 간의 형평성이 더 중요할까요, 아니면 판결의 신뢰성이 더 중요할까요? 필자는 후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판사들은 국민들에게 고용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고용주인 국민의 이익이 피고용자인 판사들의 이익보다는 우선시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판사들 간의 형평성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두 가지를 조화시키기 위해 판사들의 경력 개발에서 장구형 경력 개발 방식을 쓰면 어떨까요?

장구를 세워두면 아랫부분과 윗부분이 넓고, 중간 부분이 좁습니다. 초임 판사들에게는 다양한 사건을 다루어보게 하고, 부장판사 정도 되면 해당 판사의 전문성이나 실력에 따라 특정 분야의 사건만 맡도록 전문화하고, 대법관이 되면 다시 다양한 사건을 다루도록 하면 어떨까요? 판사마다 학부 전공이 다르고, 판사가 된 이후에도 자기 계발한 영역이 다르고, 선호하는 영역도 다를 것입니다. 판사로서의 기본적인 역량이나 자세도 다를 것입니다. 판사로서의 경력이 어느 정도 쌓인 후에 이런 것들을 고려해서 사건 영역별로 전문화하면 법원의 판단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도가 높아지지 않을까요? 사건 영역별로 판사들에 대한 수요와 해당 영역으로 가고 싶어 하는 판사의 수가 다를 경우에는 인기 있는 사건 영역을 맡을 판사들을 선정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판사의 재판 경험, 근무성적 평정 결과, 해당 분야 자격증 보유 여부, 논문, 학위 등을 바탕으로 선정하거나 그것도 믿지 못하겠다면 지필고사, 면접 등을 통해 뽑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대법원은 대법원장과 13명의 대법관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영역별로 전문화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법관들의 판단을 지원해 줄 수 있는 재판연구관들을 활용합니다. 특정 대법관에게 전속되어 그의 업무만을 보좌하는 연구관도 있고 대법관 전원의 업무를 공동으로 보좌하는 연구관도 있습니다. 재판연구관은 주로 고등법원 판사 중에서 임명된다고 합니다. 101명이 대법원 재판연구관 정원이니 대법관 1명당 7명 정도의 연구관이 있을 것입니다. 이들이 영역별로 전문화되어 있다면 전문성을 바탕으로 대법관의 판단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다만 대법원의 구성에서 대법관들의 전문 영역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법원에서 다루는 사건 영역별 업무 비중에 맞게 대법관을 구성하고, 3명 이상의 대법관으로 구성된 부에서 먼저 심리할 수 있는 사건에 대해서는 해당 사건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대법관이 주심 역할을 하도록 하는 것이 대법원의 효율적 운영과 전문성에 기초한 재판이라는 면에서 좋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금도 제도적으로는 법관인사규칙 제11조2에서 전담법관을 둘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① 재직기간 중 특정 재판사무만을 담당하는 판사를 둘 수 있다. ② 제1항에 따라 보임된 법관은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다른 법원으로 전보되지 아니한다."는 내용입니다. 이 규칙은 가정법원 혹은 특허법원처럼 별도의 법원을 설치하는 경우에만 적용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일반 지방법원, 고등법원에서도 경력이 어느 정도 지난 판사들에 대해서는 사건 영역별로 전문화시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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