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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특강 26 (단락의 형식과 내용의 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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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특강 26 (단락의 형식과 내용의 일치)
  • 글쓰기신문
  • 승인 2019.11.06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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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단락의 형식과 내용의 일치

1) 단락의 형식 표지

옛날에는 글을 쓰는 데 띄어쓰기나 쉼표, 마침표 따위가 거의 쓰이지 않았다. 낱말과 낱말 사이도 띄어 쓰이지 않았고, 문장과 문장 사이에도 경계 표지가 거의 없었다. 글자가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한참 들여다보아야 낱말이나 문장의 뜻을 구별해서 읽을 수가 있었다. 또한 단락의 표지도 없었다. 낱말과 문장이 구별되어 표시되지 않는데 단락의 형식이 나타있기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사정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마찬가지였다. 동서양의 고전을 보면 낱말, 문장 또는 단락의 구분이 되어 있지 않다.

그러다가 점차적으로 낱말이 띄어 쓰이게 되고 문장이 구분되어 표시되기에 이르렀다. 나아가, 문장들이 모여서 이루는 단락을 표시하는 방법도 생겨나게 되었다. 이 단락의 구분 표시는 서양 글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 문장 이상이 모여서 이루는 대문의 시작점에 "¶"라는 기호로 표시하게 되었다. 이 기호는 영어의 "paragraph"를 표시하는 것인데, 본디 뜻은 '곁에다 쓰기(to write beside)'이다. 그 뒤에 이 기호가 사라지면서 단락의 표시 방법은 다음 몇 가지로 나타나게 되었다. "들여쓰기," "내쓰기," 및 "줄 바꾸기"가 그것이다.

들여쓰기는 우리가 흔히 쓰는 것으로서 단락의 시작점을 안 쪽으로 들여 넣는 방식이다. 들여쓰기의 원말 "indention"은 본디 '톱니 모양의 자국을 내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들여쓰기는 단락의 시작점을 한 자(또는 두 자) 정도 안 쪽으로 들여 넣음으로써 자국을 만들어 단락을 표시하는 것이다. 첫 단락뿐 아니라 뒤따르는 모든 단락의 시작은 다 이 방식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내쓰기는 들여쓰기와는 반대로 단락의 시작점을 한 자(또는 두자) 정도 밖으로 내밀어 놓는 방식이다. 곧 단락 시작점이 왼쪽으로 튀어나오게 하고 다른 줄은 모두 안쪽으로 밀어 넣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단락 표시는 뚜렷하지만 지면의 낭비가 되므로 특별한 경우 외에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줄 바꾸기만으로 단락 표시를 하는 경우도 있다. 곧 들여쓰기나 내쓰기를 하지 않고 단락을 표시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왼편 끝이 가지런하여 보기에는 좋으나 단락의 표지가 얼른 눈에 띄지 않는 흠이 있다.

위의 몇 가지 표지 가운데 첫째번의 들여쓰기 방식이 가장 일반적인 단락 표시 방법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글이 이 들여 쓰기의 방식으로 단락 표시가 된다. 그것은 이 방식이 글의 외형적 모습에 무리한 변형을 하지 않으면서도 단락의 표시를 손쉽게 할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에서도 들여쓰기 방식을 단락 표지로 삼고 있다.

2) 단락의 형식과 내용의 일치 문제

위에서 우리는 단락의 형식은 일반으로 들여쓰기로 표시되는데, 단락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무엇보다도 그 형식과 내용이 일치되어야 한다. 들여쓰기만 뻔질나게 하고 거기에 상응한 내용을 갖추지 못하는 것이어서는 충실한 단락이라 할 수가 없다. 반면에 내용적으로는 이미 충실한 단락이 이루어졌는 데도 새로운 들여쓰기를 하지 않고 딴 내용이 계속 첨가되도록 되어서도 안 된다. 한번 들여쓰기를 할 때마다 하나의 소주제가 충분히 다루어지도록 구획이 지워질 때 글의 짜임새는 알뜰하게 된다.

우리의 글에서는 단락의 형식과 내용이 일치되지 못하는 일이 너무나 많다. 들여쓰기는 별 뜻 없는 겉표지거나, 글을 쓰거나 읽는데 호흡을 맞추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어떤이는 글이 너무 빽빽하게 보이지 않게 하려고 들여쓰기를 하는 수도 있는 듯하다.

심지어는 원고의 장수를 불리고자 일부러 줄바꾸기와 들여쓰기를 하는 일도 있다는 말도 들린다. 이제 이와 같은 무원칙하고 무질서한 들여쓰기와 줄바꾸기의 보기들을 들어 보기로 하자.

[보기 8.1]

그 마을에서는 모두 배나무를 심었다. 집집마다 배나무를 심어 놓고 어서어서 배가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해 봄 마침내 이 마을 배나무들은 그 해부터 열매를 맺기 위해 일제히 꽃망울을 머금었다. 마을 사람들의 기쁨은 이를 데가 없었다. 첫번 수확에 대한 기대로 가슴들이 한껏 부풀었다. 헌데 여기에는 수상쩍은 일이 한두 가지 있었다.

위 글은 한두 문장만 쓰고는 무조건 새로운 들여쓰기 곧 형식상 새 단락으로 옮겨 가고 있다. 이런 것은 하나의 소주제를 내세우고 그것을 충분히 뒷받침한다는 단락 본디의 구조와는 너무나 동떨어지는 일이다. 단락의 형식과 내용의 일치를 전혀 마음쓰지 않고 필자의 기분 내키는 대로 줄바꾸기와 들여쓰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윗 글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써 보면 어떤가?

[보기 8.2]

그 마을에서는 모두 배나무를 심었다. 집집마다 배나무를 심어 놓고 어서어서 배가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해 봄 마침내 이 마을 배나무들은 그 해부터 열매를 맺기 위해 일제히 꽃망울을 머금었다. 마을 사람들의 기쁨은 이를 데가 없었다. 첫 번 수확에 대한 기대로 가슴들이 한껏 부풀었다. 헌데 여기에는 수상쩍은 일이 한두 가지 있었다. 이렇게 해놓고 보면, "배나무의 첫 번 수확에 대한 기대"로 요약되는 소주제를 중심으로 다룬 한 단락이 이루어짐을 알 수가 있다. 물론 앞의 경우처럼 해도 뜻이 통하겠지만, 뒤의 보기처럼 해 보면 훨씬 더 짜임새가 있고 글의 핵심이 뚜렷하게 부각된다.

앞 것처럼 해 가지고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어떤 문제를 다루고 어디서부터 딴 문제로 넘어가는지 그 구획이 불분명하다. 이는 사소한 것 같지만 어떤 핵심에 대한 집중적 사고력의 훈련과 큰 관련이 있다. 그뿐 아니라 독자의 이해와도 관계가 있다. 독자는 흩어져 있는 문장들을 모아서 핵심에 도달하는 수고를 덜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핵심 사상을 중심으로 문장들이 집중되고 있으니 읽으면 서 바로 그 핵심에 이르고 그것을 머리 속에 새기기가 더 손쉬운 것이다.

다음 글도 작가가 쓴 글이다. 이유없는 들여쓰기가 나타나고 있다.

[보기 8.3]

수목이 쌓인 낙엽 뒤에 문득 떨어지는 액체는 빗방울은 아니었다. 고개를 숙인 나의 두 눈에서 쏟아지는 눈물방울이었다. 바삭바삭 낙엽을 밟는 발소리 틈틈이 뚝뚝 떨어지는 액체로 나의 시야는 흐려져서 맑은 창공도 분간키 어렵다.

--임옥인, "눈물의 빛깔" 중에서-

위 글에서 처음 한 문장을 쓰고 나서 둘째 문장을 줄바꾸고 들여쓰기를 한 이유가 무엇인가? 이 둘째 문장은 앞 문장의 "액체"를 설명하는 내용으로서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지 않은가. 이런 경우의 줄바꾸기는 거의 무의식적인 것에 가깝다고 할 만하다. 그만큼 많은 글쓰는 이들은 단락의 형식과 내용의 일치에 대한 관심이 희박하다.

소설 문장이 아닌 글에서도 빈번한 줄바꾸기를 한 경우는 많다. 우리 나라의 문장가로 이름난 노산 선생의 글에서도 그러한 보기를 찾아볼 수 있다.

[보기 8.4]

우리 속담에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란 말이 있다. 이것을 우리말로 다시 옮기면 "웃는 집안에 온갖 복이 다 들어온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웃는 집안(笑門)"이란 말은 분명히 혼자 웃는 것을 뜻함은 아니다.집안 전체 다시 말하면 가족 전원이 웃는 것임을 뜻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온갖 복(萬福)"이란 것도 마찬가지다. 어느 한 가지의 부분적인 행복을 이르는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의 행복을 말함인 것이다. 그것을 크게 분석 해서 말한다면 정신적 행복과 물질적 행복을 아울러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웃음이란 실로 가지각색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이 가지각색의 웃음이란 것은 방실방실 웃거나 빙그래 웃거나 허허허 하고 웃거나 껄껄대고 웃거나 하는 따위의 웃는 방법과 웃는 모양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웃음의 성격과 웃음의 종류를 말하는 것이다.

웃음이란 참으로 단순한 것이 아니다. 남을 멸시하는 웃음, 비웃는 웃음, 차디찬 웃음, 아양떠는 도색(挑色) 웃음, 억지로 웃는 가짜 웃음 등 별의별 웃음이 다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웃는 집 안에 온갖 복이 다 들어온다"는 그 웃음은 결코 그 따위 불순한 웃음들이 아님은 물론이다.

-- 이은상, "웃음의 철학" 중에서 --

위 글은 5번의 들어쓰기를 하였는데, 내용적으로 따져 보면 2번이면 된다. 특히 앞 쪽의 세 번에 걸친 들여쓰기는 하나로 합쳐야 마땅하다. 이들이 서술하는 내용은 모두 "소문만복래"라는 말을 풀이한 것들이므로 한데 묶어 놓아야 마땅한 것이다. 그렇게 중요한 사항도 아닌데 3번이나 들여쓰기를 함으로써 글의 짜임새만 흐트러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 예문은 유명한 철학자요 수필가인 분의 글이다. 이 글에서 단락의 내용과 형식은 거의 무관하게 펼쳐지고 있다.

[보기 8.5]

젊었다는 것은 긴 장래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어린이들은 더 긴 미래를 갖고 있어도 그 미래의 뜻과 내용을 모르기 때문에 젊음 이하에 머물 것이다.

그러므로 늙어 간다는 것은 장래가 짧아진다는 의미다. 죽음이 점점 가까워진다는 뜻이다.

우리가 여기에 미래와 장래를 구별하는 이유가 있다. 미래는 앞으로 있을 긴 시간을 가리키나 장래는 우리가 채워 나갈 수 있는 의지와 계획이 동반하는 미래이다.

동물은 미래를 모를 것 같다. 철없는 사람은 막연하게 미래를 느낀다. 그러나 삶의 의미를 깨닫는 사람은 미래를 계획하여 장래로 만든다.

젊다는 것은 스스로 창조하여 가며 건설할 수 있는 미래 즉 장래를 갖는다는 뜻이다.

--김형석, "무엇이 젊음인가?" 중에서

위 글은 한 단락으로 묶일 만한 내용이다. 맨 첫 문장 "젊었다는 것은 긴…"과 맨 마지막 문장 "젊다는 것은 스스로…"가 비슷한 뜻을 나타냄으로써 양괄식 구성법을 따른 단락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도 그 내용을 네 차례에 걸쳐서 줄바꾸기와 들여쓰기를 하고 있으니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특히 "그러므로…"에서 줄바꾸기를 함으로써 앞의 서술과 형식상으로 격리시킨 이유는 납득이 안 간다.

다음에는 줄바꾸기를 해서는 안 될 곳에서 하고 해야 할 곳에서는 아니함으로써 형식과 내용이 일치되지 못한 보기를 들어 본다.

[보기 8.6]

위에서 문자, 즉 말이라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의사를 표현하는 본질적인 면에서 문자나 말이 다를 바 없다는 뜻입니다. 입으로 지껄이면 말이 되고 그것을 물적 기호로써 나타내면 문자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문자 표현이란 언어 표현의 연장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상대의 귀에 호소하는 말을 청각 언어, 상대의 시각에 호소하는 언어를 시각언어라 합니다.

즉, 소리를 내어 말로써 나타내면 귀로들을 수 있으며 그것을 문자로써 기록하면 눈으로 볼 수 있는 문장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좁은 의미에서 말과 글이 같을 수 없습니다. 말은 어디까지나 소리로써 나타내는 표현 전달의 수단이요, 그것을 공기의 진동을 통하여 상대의 귀에 울리게 하는 물리적 현상입니다. 즉 "아"하고 표현하면 "어"하고 응해 주는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 말을 통한 표현입니다. 우리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지껄이는 독백이 아닌 이상 대체로 우리들의 상대는 말소리가 들릴 수 있는 거리에 있습니다.

상대를 앞에 두고, 서로 응대하기 때문에 화제가 쉽사리 풀릴 수 있으며, 경어를 쓰든 평상어를 쓰든, 혹은 어려운 소재를 다루든 쉬운 소재를 다루든 상대의 반응을 살펴가며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의사를 표현하는 장면이 신축성을 가지게 되고 그 만큼 표현도 쉽사리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문자의 경우는 언어 표현처럼 대체로 표현 자세를 가볍게 취할 수 없고 소재를 다루는 태도도 일방적입니다. 그러므로 편지 한 장을 쓰려 하여도 붓이 쉽사리 내려가지 않고 문장이 풀리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A. 문자의 저항

우리가 문장을 쓰려면 붓으로 종이에 기록하게 됩니다. 이 사실은 문자가 우리의 의사를 표현하는 물적인 연장임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박목월, <문장의 기술> 중에서--

위 글에서 둘째 들여쓰기를 한 곳 곧 "즉, 소리를…"은 잘못된 줄바꾸기이다. 앞의 서술을 환언하여 풀이하는 내용인 만큼 당연히 이어져야 한다. 내용적으로 그렇게 긴밀하게 연결된 것을 무엇 때문에 줄바꾸기를 해서 딴 단락으로 갈라 놓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다른 이들의 글에서도 "즉"이라는 접속어를 쓰면서 이렇게 잘못된 줄바꾸기를 하는 일이 있는데 지양해야 한다.) 만일 이 언저리에서 줄을 바꾸어 딴 단락으로 시작하려면 "하지만 좁은 의미에서…"가 마땅할 것이다. 거기에서부터는 앞의 서술 내용에서 딴 방향으로 전환하기 때문이다. 또한 "상대를 앞에 두고…"도 앞 단락에 속하는 내용이므로 들여쓰기를 한 것은 잘못이다. "말"에 관한 부연이므로 앞에 이어져야 할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의 들여쓰기 "하지만…"은 무방하다고 생각된다. 문자의 경우로 화제가 전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다음의 줄바꾸기 "그 이유를…"의 부분은 불합리한 것이다. 앞의 서술에 대한 간단한 이유이기 때문에 이어져야 마땅하다. 또한 뒷부분의 제목 "A. 문자의 저항"도 문제이다. 그것이 글의 형식상으로 앞의 이유로 보기 어려운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 제목 보다는 차라리

"첫째, 문자의 저항을 이유로 들 수 있습니다."

따위로 하는 것이 앞 단락과의 연결을 자연스럽게 만들 것이다. 이 때 그것을 줄 바꾸기 한 것은 "종속 단락"으로 처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분석해 놓고 볼 때 문장론을 쓴 박목월 선생 자신도 단락의 형식과 내용은 전혀 무시하고 있음을 알 만하다. 그러니 여느 사람들 중 그런 의식을 가질 사람이 드물 것은 짐작키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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