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대로 한국인공지능학회 회장]
"김만중은 세종 다음으로
200여 년 뒤에 나온
한말글 독립운동가"

사진=리대로 회장
사진=리대로 회장

한글이 태어나고 성종 때까지 50여 년은 한글을 살려 쓰려고 애썼지만 연산군 때부터 그 정신은 사라지고 아녀자와 깨어있는 선비들 속에서 고종 때까지 목숨을 이어간다. 중국 한문으로 출세하고 잘난 체 행세하는 선비들은 우리 글자인 한글을 우습게 여겼지만 이 한글로 왕실 아녀자들도 편지를 주고 받았으며 소설과 시가를 지은 선비들이 있었다.

한글로 홍길동전을 쓴 허균, 시가를 쓴 정철과 윤선도 들들 여러 선비들이 그들인데 그 가운데 구운몽과 사시남정기란 소설을 한글로 쓴 김만중은 “한문으로 쓴 글은 우리 문학작품이 아니다” 하고 주장했다. 그래서 나는 서포 김만중을 조선시대 우리말 독립운동가라고 말한다.

세조가 간경도감을 두고 한문으로 된 불교 책들을 한글로 바꿔 쓰는 일을 했고, 1481년 성종 때에 중국 두보가 쓴 한시를 한글로 바꿔서 썼으며, 한문이었던 삼강행실도를 한글로 바꿔서 쓰는 일을 했다. 세종대왕과 그 아들인 문종과 세조, 그리고 증손자인 성종 때까지 50여 년은 한글을 살려서 쓰려고 애썼지만 그 뒤 연산군 때 한글 벽보사건이 난 뒤부터 그런 정신이 사라졌다. 다행히 깨어있는 선비들이 한글로 글을 쓰고, 궁궐에서 왕비나 왕자가 한글로 글을쓰기도 했으며 양반집 아녀자가 편지를 한글로 쓴 일이 있다.

사진=왼쪽은 허균이 한글로 쓴 소설 홍길동전, 오른쪽은 김만중이 한글로 쓴 소설 구운몽(국립중앙박물관 자료)
사진=왼쪽은 허균이 한글로 쓴 소설 홍길동전, 오른쪽은 김만중이 한글로 쓴 소설 구운몽(국립중앙박물관 자료)

어린이들에게 한자를 가르치는 교재로 한글을 쓴 자료 가운데 최세진이 1527년(중중 22)이 쓴 훈몽자회는 세종 때 자모 순서와 설명과 다르게 오늘날 쓰는 한글자모(ㄱㄴ ㄷ ㄹ ㅁ..) 순서와 부르는 소리를 적고 한자 3,360자에 대하여 새김과 그 뜻을 적은 것으로서 오늘날 한글과 우리말 연구를 하는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 1578년에 한석봉이 쓴 천자문 교재에는 그 한자 뜻을 한글로 적었는데 이 또한 한글과 우리말 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이는 1728년 김천택이 그때까지 전해 내려오던 시조를 모아 엮은 청구영언, 그리고 누가 언제 썼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외국어 교재인 노걸대언해 또한 한글을 사용한 중요한 책이다.

연산군(1494~1506)이 한글을 탄압해서 정부에서 한글로 공문서를 쓰지는 못했지만 중종(1506년∼1544년) 때부터는 나름대로 한자 교재나 궁중이나 양반 아녀자들이 한글로 편지를 썼다.

사진=왼쪽은 한글 삼강행실도이고 오른쪽은 정철이 쓴 사미인곡(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사진=왼쪽은 한글 삼강행실도이고 오른쪽은 정철이 쓴 사미인곡(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1586년에 죽은 이응태의 부인인 원이 엄마가 그 무덤에 쓴 편지를 보면 그런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다만 한자 나라인 중국 지배를 받고 중국 문화와 공자 맹자를 섬기는 유교에 빠져서 한글이 빛을 보지 못한 것이다.

하여튼 김만중(1637~1692)은 한글로 〈구운몽〉·〈사씨남정기〉등의 소설을 남겼는데 〈서포만필〉이란 글에서 김만중보다 100년 쯤 앞서 살다간 정 철(1536~1593) 의〈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을 들면서 우리나라의 참된 글은 오직 이것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이 말은 우리말을 우리 글자로 적어야 참된 우리 문학작품이라고 외친 것으로서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자주정신과 통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세종대왕 다음으로 200여 년 뒤에 나온 한말글 독립운동가라고 본다. 이런 분이 많았다면 한글이 빨리 나라 글자로 뿌리를 내렸을 것이고 우리말을 한글로 적는 말글살이가 뿌리내려서 나라가 빨리 발전했을 것이다.

사진=왼쪽은 1586년 원이엄마가 쓴 한글 편지, 오른쪽은 1578년에 한석봉이 쓴 천자문 교재
사진=왼쪽은 1586년 원이엄마가 쓴 한글 편지, 오른쪽은 1578년에 한석봉이 쓴 천자문 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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