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장시정 독일모델연구소 대표

홋카이도 대학 정문
홋카이도 대학 정문

 

홋카이도 대학, 중앙 도서관 앞
홋카이도 대학, 중앙 도서관 앞

지난주 삿포로에 도착한 다음 날 홋카이도北海道 대학 캠퍼스를 방문했다. 내가 앞으로 1년간 "방문 학자 visiting scholar"로 머무르게 될 학교다. 삿포로 도심에 위치한 홋카이도대학은 Hokkaido Big Green 이란 닉네임처럼 거대한 녹지와 수목들을 자랑하는 도심 한복판의 오아시스다. 이 대학은 서울시 면적의 1/4이 넘는 학교 부지와 연구림, 식물원 등을 갖추고 삿포로 시내 본 캠퍼스만 윤중제 안쪽의 여의도 면적인 3km2 나 된다. 18,000명의 학생과 6,250명의 교직원을 가진 연구중심 대학이라는데, 그래서인지 대학 내 휴게실에 비치된 홍보 전광판을 보니 "왜 홋카이도대학인가?"라고 질문해 놓고 그 첫 번째 이유로 "세계가 인정한 연구 성과가 있다"로 답하고 있다. 위키피디어를 찾아보니 노벨상을 받은 이 학교 졸업생이 있다. 스즈키 아키라鈴木 章인데 2010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QS World란 곳에서 조사한 2018년도 세계대학 순위가 122위, 일본 내 대학 순위가 7위로, 화학, 재료과학, 생물학, 생화학 분야가 강하다.

왜 홋카이도 대학인가? 대학 홍보 전광판
왜 홋카이도 대학인가? 대학 홍보 전광판

홋카이도 대학의 전신은 1876년 창립된 삿포로 농업학교다. 이 농업학교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두 인사를 꼽으라면, 1886년 이 삿포로 농업학교의 부학장으로 와서 대학 설립을 지원하고 8개월간 학생들을 가르친 후 떠날 때 학생들에게 "Boys, be ambitious!"란 말을 남겼던 윌리엄 클라크William Clack 교수(1826~1886년)와 이 학교 2회 졸업생으로서 "Bushido무사도 : The Soul of Japan일본의 영혼"이란 공전의 베스트셀러를 쓰고 나중에는 국제연맹 사무차장을 지냈던 니토베 이나조(1862~1933년)일 것이다.

클라크와 니토베는 지금도 대학의 지적 상징이 되고 있다. [홋카이도 대학 홍보 전광판에서]
클라크와 니토베는 지금도 대학의 지적 상징이 되고 있다. [홋카이도 대학 홍보 전광판에서]

1877. 4월 클라크 교수가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배웅 나온 학생들에게 남긴 유명한 말이 바로 '청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Boys, be ambitious!'이다. 나는 중학교 때 '성문 핵심영어'에서 이 말을 처음 접했는데, 나는 이 말을 "1월 1일은 가장 큰 거짓말쟁이다. January the first is the greatest liar"란 말과 함께 학창시절 내내 나의 좌우명처럼 늘 기억하곤 했다. 이 말은 1886년 클라크가 사망할 때까지도 세간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1894년 안도 이쿠사부로라는 학생이 삿포로 농대 문예지에 당시 클라크 교수가 학생들과 헤어질 때 말했다고 소개하였고 1898년 '삿포로 농대' 교지에서 다시금 소개됨으로써 세간에 점차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일본의 중고교 교과서에는 “Boys, be ambitious! Be ambitious not for money or for selfish aggrandizement, not for that evanescent thing which men call fame. Be ambitious for the attainment of all that a man ought to be.”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돈을 위해서도 아니고, 이기적인 성취를 위해서도 아니고, 명성이라는 덧없는 것을 위해서도 아니고, 오직 인간이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얻기 위해서 야망을 가져라."라는 긴 문장으로 소개되고 있다 한다. 결론적으로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라는 말 뒤에 이어지는 긴 말은 클라크 교수가 한 말이 아니고 후세에 덧붙여진 것이라 한다. 클라크 교수가 배웅 나온 학생들에게 말 위에서 작별 인사로 짧게 던진 말인데 그렇게 길리가 없고, 또 그는 부와 명예를 부정하지도 않았다 한다. 그는 농업대학 개교식에서 계급사회가 막 무너진 당시 일본의 새로운 사회 질서 속에서 근면과 절제로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위치에 갈 수 있도록 힘쓸 것을 권장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한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신의 은총과 세속적인 직업 활동을 강조하는 퓨리턴적인 사상과 맞닿아 있다. 후세에 부기된 뒷말은 1964년 아사히신문의 '天聲人語'라는 칼럼에 게재되면서 확산되었다는데 그 원전은 1944년 이나토미 에이지로 가 쓴 '메이지 초기 교육사상 연구'란 책이다.

대학 구내의 윌리엄 클라크 흉상
대학 구내의 윌리엄 클라크 흉상

 

홋카이도 대학 구내에 세워진 비석에
홋카이도 대학 구내에 세워진 비석에 "대지大志를 품어라"

니토베 이나조는 삿포로 농업대학 2회 졸업생으로 클라크 교수의 영향으로 기독교도가 되나 클라크 교수가 학교를 떠난 후 입학하여 그와 조우하지는 못했다. 그는 존스홉킨스대학과 독일의 본, 베를린, 할레Halle에서 유학하고 "일본의 토지 소유Ueber den japanischen Grundbesitz"로 할레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교토제국대학 교수등 다수 대학교수로, 고교 교장으로 교육 활동을 하였고 도쿄여대를 설립하고 초대 총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영어와 독일어로 책을 썼으며 미국인과 결혼하고 일본, 미국, 대만 등에서 생활하였고 캐나다의 빅토리아에서 사망하였다. 농경제 학자, 저술가, 교육가이자 사상가이며 나중에는 외교관으로 국제연맹 사무차장을 지냈다. 그는 사무라이의 윤리와 일본의 문화를 유려한 영문장으로 세계에 소개한 "Bushido : The Soul of Japan" 이란 책을 썼고 한때 일본의 5천엔 권 지폐에 그의 초상이 들어가 있었다.

Bushido, Paperback 2018년 간행 / Bushido 초판 1900년 간행
Bushido, Paperback 2018년 간행 / Bushido 초판 1900년 간행

그는 식민정책 전문가로서 대만에 고문으로 파견되기도 했으며 "식민지화는 문명을 전파하는 일이다"라고 식민정책을 옹호하였고 한일병합이 제국주의라는 국제적 환경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가르쳤다 한다. 그러면서도 당시 유럽 제국처럼 식민지를 단순히 경제 자원화하는 것을 비판하였고 식민지 주민의 이익을 중시하는 입장에 섰으며 일본의 군국주의 팽창에 대하여도 반대하였다. 서양의 종교교육에 대응하는 일본의 교육사상으로 일본의 무사도를 꼽고 그에 관한 책, '무사도'를 영문으로 썼는데 그 책이 일본 최초의 세계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니 그의 국제적인 커리어와 함께 니토베는 당시 일본의 세계화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볼 수 있겠다.

대학 구내의 니토베 이나조의 흉상
대학 구내의 니토베 이나조의 흉상

이 두 사람 말고 내가 개인적으로 크게 평가하고 싶은 이 학교 졸업생이 또 있다. 미우라 유이치로三浦 雄一郞인데 최고령 에베레스트산 등정자이다. 2003년 70세로 에베레스트산 등정에 성공했고 2013년 80세에 다시 에베레스트산 등정에 성공하여 자신의 기록을 갈아 치웠다. 다만, 이때 한 가지 흠이라면 내려오면서 6,500m 고지부터 5,364m 고지의 베이스캠프까지 걸어 내려오지 못하고 헬기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어쨌든 70세든 80세든 아직까지 아무도 이 기록을 깨지 못하고 있다. 그는 젊었을 때인 1970년 스키를 타고 에베레스트산 South Col 이란 지점에서부터 수직 거리로 약 1,280m를 내려왔던 와일드 스키의 기록 보유자이기도 하다.

미우라 유이치로,
미우라 유이치로, ".. 이건 세계 최고의 느낌이다.."

나는 홋카이도대학 방문 중 연구 주제를 '세계화'에 관한 것으로 정했다. 일본과 한국의 세계화 과정에 대하여 비교해 보면서, 특히 유교가 양국의 세계화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하여도 큰 관심을 갖고 연구해 보고자 한다. 나는 미우라 유이치로보다 한참 젊다. 그는 80세에 에베레르트산을 등정했는데, 내 나이로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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