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리대로 회장
사진=리대로 회장

세종대왕은 1443년 한글을 다 만들고 3년 동안 그 쓰임새를 알아보고 집현전 젊은 학사들에게 훈민정음 해례본을 쓰게 한 뒤 1446년에 온 세상에 알렸다. 그렇게 알린 것으로 끝낸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쓰게 하려고 애썼다. 반포하기 전에 그 당시 성스런 내용인 조선왕조의 선조들 이야기인 용비어천가와 부처 이야기인 월인천강지곡을 새 글자로 썼다. 그리고 반포 뒤에 바로 새 글자를 과거 시험과목으로 공부하게 하고 새 글자로 한문책을 번역해 읽게 하는 언해사업도 했다. 세종은 치밀하고 철저하게 한글을 쓰게 하려고 했다.

가. 다음은 세종실록에 훈민정음을 과거시험에 이용한 기록이다.

1. 세종실록 114권, 세종 28년 12월 26일 기미 3번째 기사 1446년 명 정통(正統) 11년 이과와 이전의 취재에 훈민정음을 시험하게 하였다. 이조에 전지(傳旨)하기를,

"금후로는 이과(吏科)와 이전(吏典)의 취재(取才) 때에는 《훈민정음(訓民正音)》도 아울러 시험해 뽑게 하되, 비록 의리(義理)는 통하지 못하더라도 능히 합자(合字)하는 사람을 뽑게 하라."

하였다.

2. 세종실록 116권, 세종 29년 4월 20일 신해 1번째 기사 1447년 명 정통(正統) 12년 함길도 자제의 관리 선발에 훈민정음을 시험하게 하다. 이조(吏曹)에 전지하기를,

"정통(正統) 9년049) 윤7월의 교지(敎旨) 내용에, ‘함길도의 자제로서 내시(內侍)·다방(茶房)의 지인(知印)이나 녹사(錄事)에 소속되고자 하는 자는 글씨·산술(算術)·법률·《가례(家禮)》·《원육전(元六典)》·《속육전(續六典)》·삼재(三才)를 시행하여 입격한 자를 취재하라.’ 하였으나, 이과(吏科) 시험으로 인재를 뽑는 데에 꼭 6가지 재주에 다 입격한 자만을 뽑아야 할 필요는 없으니, 다만 점수[分數]가 많은 자를 뽑을 것이며, 함길도 자제의 삼재(三才) 시험하는 법이 다른 도의 사람과 별로 우수하게 다른 것은 없으니, 이제부터는 함길도 자제로서 이과 시험에 응시하는 자는 다른 도의 예에 따라 6재(六才)를 시험하되 점수를 갑절로 주도록 하고, 다음 식년(式年)부터 시작하되, 먼저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시험하여 입격한 자에게만 다른 시험을 보게 할 것이며, 각 관아의 이과 시험에도 모두 《훈민정음》을 시험하도록 하라." 하였다.

나. 다음은 세종실록에 있는 용비어천가에 관한 기록이다.

1. 세종실록 95권, 세종 24년 3월 1일 임술 3번째 기사 1442년 명 정통(正統) 7년

태조가 왜구를 소탕한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라고 전지하다. 경상도와 전라도 관찰사에게 전지(傳旨)하기를, "홍무(洪武) 13년 9월에 왜구(倭寇)가 떼를 지어 육지로 올라와 우리의 경계를 침략하였을 때에, 우리 태조(太祖)께서 부오(部伍)를 정비하여 이끌고서 바로 운봉(雲峯)에 이르러 한 번에 소탕하였으니, 그 훌륭한 공과 위대한 업적은 후세에까지 전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때의 군마(軍馬)의 수효와 적을 제어한 방책과 접전한 수와 적을 함락시킨 광경 등을 반드시 본 사람이 있을 것이니, 경은 도내 여러 고을에 산재(散在)하여 살고 있는 늙은이들에게 널리 다니며 방문(訪問)하여 상세히 기록하여 아뢰라." 하였다. 이때에 임금이 바야흐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짓고자 하여 이러한 전지를 내린 것이었다.

이 기록을 쓴 때는 훈민정음을 완성하기 1년 전인 세종 24년이다. 세종은 이때부터 새 글자로 용비어천가를 쓸 생각을 한 거 같다.

사진= 가장 처음 새 글자인 한글로 쓴 용비어천가(왼쪽)와 한글로 ‘효례뎨의’라고 쓴 동전 모습(왼쪽)이다. 이 동전은 2006년 국경일이 된 첫 한글날 경축 기념으로 정부가 만든 것이다.
사진= 가장 처음 새 글자인 한글로 쓴 용비어천가(왼쪽)와 한글로 ‘효례뎨의’라고 쓴 동전 모습(왼쪽)이다. 이 동전은 2006년 국경일이 된 첫 한글날 경축 기념으로 정부가 만든 것이다.

2. 세종실록 108권, 세종 27년 4월 5일 무신 3번째 기사 1445년 명 정통(正統) 10년 .

권제·정인지·안지 등이 《용비어천가》 10권을 올리다.

의정부 우찬성 권제(權踶)·우참찬 정인지(鄭麟趾)·공조 참판 안지(安止) 등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10권을 올렸다. 전(箋)에 이르기를,

"어진 덕을 세상에 널리 베푸시고 큰 복조를 성하게 열으시매, 공(功)을 찬술(撰述)하고 사실을 기록하여 가장(歌章)에 폄이 마땅하오니 이에 거친 글을 편찬하와 예감(睿鑑)048) 에 상달하옵니다.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뿌리깊은 나무는 가지가 반드시 무성하고 근원이 멀면 흐름이 더욱 긴[長] 것이옵니다. 주(周)나라는 면과(緜瓜)049) 를 읊조려 그로부터 나온 근본을 미루어 밝혔고, 상(商)나라는 현조(玄鳥)050) 를 노래하여 그 난 바를 미루어 폈으니, 이는 왕자(王者)의 일어남이 반드시 선대(先代)의 공을 지음에 힘입었습니다. ... 줄임 ... 천지를 그림하고 일월을 본뜨오니 비록 그 형용을 다하지 못하였사오나, 금석(金石)에 새기고 관현(管絃)에 입히면 빛나는 공을 조금 드날림이 있을 것이옵니다. 만약 살피어 들이시고 드디어 펴 행하사,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에게 전하여 큰 업(業)이 쉽지 아니함을 알게 하시고, 시골에서 쓰고 나라에서 써서 영세(永世)에 이르도록 잊기 어렵게 하소서. 편찬한 시가(詩歌)는 총 1백 25장(章)이온데, 삼가 쓰고 장황(裝潢)056) 하여 전(箋)을 아뢰옵니다." 하니, 판에 새겨 발행하기를 명하였다.

이 용비어천가를 가장 처음 훈민정음으로 쓴 책이며 새 글자를 반포하기 1년 전인 1445년에 지은 것이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완성하기 전부터 용비어천가를 쓸 자료를 모으게 했고 훈민정음 해례본을 발표하기 전에 이 용비어천가를 완성했다.

다. 1446년 3월 소헌왕후가 세상을 뜬 뒤에 한글로 월인천강지곡을 썼다.

불교 석가모니 이야기인 월인천강지곡은 용비어천가 다음으로 훈민정음으로 쓴 책으로서 한자보다 한글을 더 크게 썼다. 또 세조에게 석보상절을 쓰게 했다. 그 때에 유교 한문책은 훈민정음으로 쓰지 않았는데 유학자와 선비들이 새 글자를 싫어하고 반대했기 때문에, 또 세종과 그 집안이 불교를 믿었기 때문으로 보이고 유교 국가지만 백성들이 불교를 많이 믿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진=오른쪽은 훈민정음으로 적은 월인천강지곡, 왼쪽은 석보상절인데 모두 불교 이야기다.
사진=오른쪽은 훈민정음으로 적은 월인천강지곡, 왼쪽은 석보상절인데 모두 불교 이야기다.

세종은 1443년 훈민정음을 다 만들고 모든 소리와 외국말을 적을 수 있는지와 그 쓰임새를 연구하고 실험했다. 또한 그걸 증명하려고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을 새 글자인 훈민정음으로 썼다. 그리고 외국말을 훈민정음으로 적을 수 있는 연구를 위해서 신숙주와 성삼문들을 중국 요동에 와 있던 중국 언어학자인 황찬을 여러 번 찾아가 중국 발음을 알아보고 실험하게 했다. 이렇게 세종이 새 글자를 살려서 쓰려고 애썼듯이 100년 동안만 더 애썼다면 한글이 더 널리 쓰여서 국민 수준이 빨리 높아지고 나라가 더 많이 발전했을 것이다. 그래서 100여 년 뒤 임진왜란도 겪지 않고 튼튼한 나라가 되었을 터인데 그러지 못한 것이 안타깝고 아쉽다.

저작권자 © 자연치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