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장시정 독일모델연구소 대표

"자유주의적 조합주의liberal corporatism"는 독일 경제의 모델적 요소다. 독일제국 당시 개인이나 기업은 자유로운 활동이 제약을 받자 상공회의소나 동종 기업 간 협회를 조직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했다. 이들 조합은 당시 독일의 권위주의적 환경에서 생존을 위해 광범위하게 조직되었다는 측면에서 영미권의 자발적인 이익단체와는 발생 배경이 다르다. “독일에는 조직되지 않은 이익은 없다"라고 할 정도로 사회 각계각층의 모든 이익이 조직화, 활성화되어 있다. 그래서 독일 경제를 조합주의 시장경제라고도 한다. 독일의 조합들은 "보충성의 원칙"에 따라 국가의 감독보다는 정관 등 자체적인 규칙을 통해 관리되기 때문에 당초 설립 취지나 목적 등을 준수하는 것이 전체 회원사들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이 독일의 조합주의를 관통하는 으뜸가는 운영원리가 ‘고객정치client politics’를 배격하는 것이다.

고객정치란 다수의 일반 이익을 담보로 소수자의 이익을 도모하는 행위다. 공직자든 민간인이든 자신과 친분관계가 있거나 어떤 형태로든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다른 개인이나 소수 그룹을 위해 집단적 일반 이익을 희생시키는 행위가 발생한다면 이것이 고객정치다. 정확하게 위법이나 불법행위는 아닐 수 있지만 탈법이나 편법에 가깝고 사회에 끼치는 부정적 영향은 지대하다. 부패나 정실주의에 가까운 행태로도 볼 수 있어 선진국과 후진국을 가르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특히 한국 사회는 사적인 네트워킹이나 체면을 중시하는 사회로 고객정치가 만연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하고 있다. 어떤 기관이나 단체든 정관 등 당초 설립 목적에 따라서 최대한 공평무사하게 운영하겠다는 의지부터 약하다. 인사권자가 학연, 지연 등 정실에 따라 인사를 하는 사례도 있고, 종합병원 예약이나 귀성열차 차표처럼 공급은 제한되어 있고 수요는 많은 상황에서 아는 사람에게 우선권을 주기도 한다. 바로 고객정치를 하는 것인데, 고객정치는 그 성격상 외부로 잘 드러나지 않고, 드러난다 하더라도 이에 대한 대응수단이 마땅찮다.

스카이캐슬 포스터
스카이캐슬 포스터

지금 전 사회적 공분을 자아내고 있는 어느 공직 후보자의 행태를 보면 '고객 정치'야말로 우리 사회 최대의 적임을 실감케 한다. 이 후보자는 자신의 딸 부정 입학 의혹은 가짜 뉴스라며 "절차적 불법성"이 없다고 했다는데, 자신에 대한 의혹 제기를 가짜 뉴스로 몰아붙이는 뻔뻔함이 놀랍기도 하지만, "불법이 아니라면 괜찮다"라는 잘못된 인식이 더 문제다. 더욱이 법학자이며 대통령의 수석 법률 보좌관이라는 사람이다. "절차적 불법성"이란 애매한 표현은 실체적 불법성은 인정한다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여하튼 여기서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불법이 아니다, 법을 어기지 않았다"는 것이리라. 공정거래위원장을 했다는 사람도 "당시에는 불법이 아니었다"라며 이런 입장을 변호하고 나섰는데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단순히 불법이 아니라는 방패막으로 행해지는 '고객 정치'의 폐해는 불법의 그것을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이다. 주차 위반을 하면 불법이 되고 벌금을 문다. 그러나 훨씬 큰 문제를 야기하는 고객정치의 횡행은 어떤 벌금도 물지 않고 이런 행태에서 보듯이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는다. 법을 어기지 않았다는 그릇된 자부심으로 오히려 당당하기조차 하다.

이번 사태로 드러난 386 교수들 간에 유행한다는 '스펙 계'라는 것도 입시 경쟁이 치열한 한국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고객정치의 대표적 유형일 것이다. 교육자라는 교수들이 자녀들의 자소서 스펙 확보를 위해 교수 사회의 인맥을 활용하는 것인데, A 교수는 B 교수의 자녀를, B 교수는 A 교수의 자녀를 봐주는 것이다. 고교생이 단독이든 공저자로든 어려운 논문을 썼다는 많은 사례들이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고 한다. 이것은 자신들의 자녀와 동년배 학우인 대다수 학생들의 이익을 자기 자녀만의 이익과 맞바꾸는 반사회적, 반교육적, 반윤리적인 파렴치한 행위다. 이런 고객정치의 폐해가 불법이라는 주차 위반의 폐해와 비교가 되겠는가?

이 후보자는 갑자기 자기 가족 소유의 사모펀드와 학교법인을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한다. 이 학교법인은 부채가 많아 순자산이 마이너스라는데 자신들의 부채를 사회에 떠넘기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여하튼 '기부'를 강조하는 의도로 보인다. 하지만 민간경제에서 볼 수 있는 ‘기부'는 공개적인 부패로 간주되기도 한다. 특히 이 경우가 그렇다. 여러 가지 의혹으로 본인의 장관 청문 절차가 어려워지자 기부를 앞세워 이를 극복해 보겠다는 의도가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기부란 이름으로 포장된 또 다른 부패에 다름 아니다.

스폰이란 후원 문화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돈이 될 만한 학회”가 개최되면 이해관계가 있는 기업들이 따라다니며 후원을 한다. 그리고 후원을 받은 쪽은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보답을 한다. 그 학회에 소속된 학자들은 언론 기고 등을 통해서 자신들을 후원한 기업 편을 든다. 물론 학설로 포장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경제적 동물인 인간이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기부나 후원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단지 명칭이 달라서, 공공부문에서는 부패라고 하며 민간부문에서는 기부나 후원이라고 할 뿐이다.

어떤 정치세력이 특정 지역이나 집단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경제, 재정정책에 관한 결정을 내린다면 그것 역시 전형적인 고객정치일 것이다. 한국 사회를 진정 망치고 있는 사람들은 재판정에 선 범법자들 보다 오히려 고객정치를 자행하는 점잖은 지식인들일지 모른다. 법치국가는 법질서만을 규정할 뿐 사람들의 생활 방식까지는 결정하지 않는다. 그러니 법질서만을 지키는 것은 민주 시민의 최소한의 도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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