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남한산성’ 독후감
척화파 김상헌과 주화파 최명길의 말씨름
친명배금 정책 펴던 인조와 서인세력, 두 차례 후금(청)의 공격받아
인조, 성에서 나와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 치욕의 예 올려

 

병자호란의 치욕, 통한의 남한산성.
병자호란의 치욕, 통한의 남한산성.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은 1636년 병자년 12월 14일 이듬해 정축년 1월 30일까지 47일 동안 ‘조선이 통째로 성에 갇힌’ 절체절명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성의 바깥에는 청나라 30만 대군의 말(馬)의 소리가 울려 퍼지고 성의 안쪽에서는 주화파와 척화파의 말(言)이 성을 쌓고 있었다. 임금은 “너도 옳고 너도 옳다.”며 하루 하루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창의병은 아니 오고 고립무원이 된 성은 그냥 놔둬도 스스로 말라버릴 것이었다. 여러 여진 부족을 통합해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의 여덟 번째 아들 홍타이지는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자칭 칸의 자격으로 친명배금 정책을 펴는 조선을 응징하러 온 것이다. 1627년 정묘호란으로 조선과 형제의 맹약을 맺은 홍타이지는 이번에는 병자호란을 일으켜 군신관계를 요구했다. 그러나 뼛속까지 친명사대 사상을 가진 인조와 군자의 나라인 ‘소중화(小中華)’임을 자처하던 서인들에게 예법과 글도 모르는 북로(北虜) 오랑캐 여진족은 하찮은 존재였다.

그러나 생존을 위한 방편으로 주화파(이조판서 최명길)와 척화파(예조판서 김상헌)의 흑백 논쟁은 말에 말의 꼬리를 이으면서 평행선으로 달렸다.

인조와 세자, 대신들의 자취가 서린 행궁의 한남루.
인조와 세자, 대신들의 자취가 서린 행궁의 한남루.

김상헌은 말한다.

“저들 마음의 어둡기가 짐승 같아 말길이 막히고 화친의 길이 끊어졌으니, 오직 싸움이 있을 뿐이다. 군신상하가 한 몸으로 성을 지키고 창의를 몰아오는 구원병과 함께 떨쳐 일어서면 대의가 이미 우리와 함께 했으니, 깊이 들어와 의지할 곳 없는 오랑캐를 국경 밖으로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주화파 최명길은 다음과 같이 받는다.

“전하, 지금 성안에는 말(言)의 먼지가 자욱하고, 성 밖 또한 말(馬) 먼지가 자욱하니 삶의 길은 어디로 뻗어 있는 것이며, 이 성이 대체 돌로 쌓은 성이옵니까. 말로 쌓은 성이옵니까. 성 밖에 오직 죽음이 있다 해도 삶의 길은 성안에서 성 밖으로 뻗어 있고 그 반대는 아닐 겁니다.”

김상헌은 절대 바뀌지 않는 원리인 경(經)을 말하고 최명길은 현실에 맞게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권(權)을 이야기했다. 이런 가운데 임금은 1637년 정축년 새해를 맞아 명에 대한 망궐례를 올리면서 춤을 추었다. 이 장면을 지켜본 칸은 하늘의 태양이 하나임을 생각하며 현실을 모르는 조선 왕의 우매에 적개심을 품었을 듯싶다. 명나라는 지는 해요, 청나라는 떠오르는 태양이었다.

작가는 제3자 전지적 시점에서 다음과 같은 후일담을 남겼다.

“성안에서 많은 언어와 지표들이 뒤엉켰는데, 말, 그 지향성 안에는 길이 없었고, 말의 길을 이 세상의 땅바닥으로 끌어내리는 곳에서 걸어갈 수 있는 길은 겨우 생겨났다. 그 길은 산성 서문에서 삼전나루, 수항단(受降檀 항복을 받는 곳)으로 이어지는 하산의 길이었다.” 아무도 디딘 적이 없는 땅에 몸을 갈면서 나아가야 했던 임금에 대해 작가는 ‘고해(苦海)의 아비’이며 그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렇다. 명분과 실리!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임금은 자신의 보존은 물론, 백성을 위해서라도 성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니 나와야 했다. 한겨울 고립된 성안의 군사들은 손에 동상이 걸려 조총과 활을 잡을 수 없었고, 영양실조로 죽어갔다. 이 상황에서 전시 군정과 민정을 책임지는 체찰사인 영의정 김류는 오락가락 갈피를 잡지 못했다. 다만 산성의 방어를 책임진 수어사 이시백이 보인 우뚝한 기상이 인상적이었다. 칸의 명을 받은 용골대는 무위를 보이려 행궁을 향해 홍이포를 쏘아댔다. 식량은 5일 치가 남았다.

인조가 항복하러 나간 서문(지화문).
인조가 항복하러 나간 서문(지화문).

마침내 인조는 칸에게 보낼 국서를 최명길에게 맡겼다. 국서를 쓰는 것은 ‘만고의 역적’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최명길은 썼고 이에 대해 김상헌은 “글이 아니다.”라고 폄하했다. 최명길은 “글은 아니지만 길이다.”라고 맞받아쳤다.

좌고우면하던 영의정 김류가 끼어들었다.

“글을 밟고서 나아갈 수 있다면, 글 또한 길이 아니겠나이까.”

결국 인조는 서문을 통해 삼전도로 가서 수항단 땅바닥에서 9단 높이에 앉아 있는 칸을 향해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올렸다. 절을 세 번하고 이마를 땅에 아홉 번 찧었으니 이런 치욕은 전에 없었다. 이 와중에 조선 기녀 200명이 자진모리 풍악에 맞춰 속곳이 펄럭이고 머리채가 흔들릴 정도로 정신없이 춤을 추었다. 흥에 겨운 신바람인가 복수의 춤인가? 힘없는 나라의 군왕이 기꺼이 감수해야 할 치욕은 그동안 준비하지 않은 게으름에 대한 역사가 내리는 준엄한 징벌이었다. 40년 전 임진-정유재란에 국토가 시산혈해로 곤죽이 되었건만, 임금과 조정은 이를 반면교사로 여기지 않고 안일했다. 집권층의 유비무환 자세가 없었던 만큼, 백성들은 어육이 되어 침략자의 성노리개가 되었고 수십만 명이 포로가 되고 말았다. 오호 통재라!

성의 방비를 하던 수호장대.
성의 방비를 하던 수어장대.

17세기 중반 명과 청의 거대한 충돌, 그 틈바구니 속에서 생존의 길을 모색하던 조선은 문명과 야만, 화하(華夏 중국)와 이적(夷狄 오랑캐)의 관계로 국제질서를 이해했다. 이러한 성리학적 교조주의로 똘똘 뭉친 하급관리 오달제와 윤집은 척화신을 데려오라는 칸의 명령에 따라 희생양을 자처하고 나섰다. 여기에 홍익한 또한 오랑캐에게 절대 굴복할 수 없다는 신념을 지키며 죽어갔다. 목숨보다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더 중시한 그들의 절개는 빛났고 역사는 이들을 삼학사(三學士)로 부른다.

남한산성에서 나온 최명길은 임금을 따라 대궐로 들어갔고, 김상헌은 안동으로 몸을 숨겼다. 왕의 항복 이후에도 대궐에서는 주화파와 척화파 간 권력투쟁이 한결같았다.

영조가 쓴 무망루. 무망루(無忘樓). 인조의 치욕을 잊지말고, 볼모로 청의 심양으로 끌려갔던 효종은 북벌을 꿈꾸다가 죽었다.
영조가 쓴 무망루. 무망루(無忘樓). 인조의 치욕을 잊지말고, 볼모로 8년 동안 청의 심양으로 끌려갔던 효종은 북벌을 꿈꾸다가 죽었다.

 

성에 갇힌 47일 동안 척화파와 주화파의 말싸움은 사라지고 풍경소리만 남았다.
성에 갇힌 47일 동안 척화파와 주화파의 말싸움은 사라지고 풍경소리만 남았다.

소설은 조선 백성인 서날쇠와 정명수를 내세워 명암의 극적인 대비를 보여주고 있다. 대장장이 서날쇠는 김상헌의 청에 의해 군기를 수리해주고 김상헌이 희생시킨 뱃사공의 딸 나루를 보살펴준다. 또 왕의 격서를 가지고 성 밖으로 나가서 창의군을 모으는 데 힘을 쏟는다. 그는 천민이지만 충실한 조선의 영웅으로 그려진다. 반면 평안도 은산 관노 출신 정명수는 압록강을 건너가 여진말을 배워 칸의 역관(譯官 통역사)이 되고 호가호위한다. 그는 삼공육정승을 면전에서 모욕하고 양반집 규수와 기생을 맘대로 취하는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다. ‘자신의 조국’인 청나라로 돌아갈 때는 공물과 뇌물을 실은 수레가 줄을 이었다. 부모가 천민인 극천(極賤)으로서 조선에 대한 적개심이 천박한 복수심으로 드러난 것이었다.

의문점이 하나가 남는다. 초반부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김상헌은 송파나루에서 어린 딸과 함께 사는 뱃사공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청병이 들이닥친다는데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

“청병이 오면 얼음길을 잡아 강을 건네주고 곡식이라도 얻어볼까 합니다.”

김상헌은 ‘이게 백성인가’라는 회의감을 갖는다. 뱃사공은 또 “어제 어가를 얼음길로 인도해서 강을 건너 주었는데 좁쌀 한 줌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남한산성으로 가지 않겠다는 사공의 목을 김상헌은 자신의 환도로 내리쳐 죽였다.

왜 죽였을까? 자신의 지고지순한 이상을 알아주지 못하는 무지랭이 백성에 대한 서운함의 표시였을까? 그 죄책감으로 성안으로 아버지를 찾아온 뱃사공의 딸 나루를 지극히 아끼고 돌보아준 것인가?

만물이 소생하는 봄날이 왔다. 얼음이 녹았고 뱃사공이 쓰러졌던 흔적은 없어졌다. 피난갔던 서날쇠의 가족이 성으로 돌아왔고 서날쇠는 대장간에서 쌍둥이 아들 중 어느 녀석이 초경을 치른 나루와 혼인할지 생각하며 혼자서 웃었다.

작가는 이렇듯 말 많은 지배층 못지않게 민초인 백성들에게도 관심과 따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세상은 외부 세력에 의해 뒤집혀졌지만, 백성들은 그저 살기 위해 또 다시 일을 시작해야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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