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가 사람 잡는다'...안보불감증

‘미국놈 믿지 말고 소련놈에 속지 마라
일본놈 일어나고
되놈(중국) 되(다시) 나온다.
조선은 조심해라’

돈으로 평화 산 송나라, 금나라에 멸망,
남송은 원나라에 멸망

'독서가' 이순신 장군의 독후감 '송사를 읽고'
황윤길-김성일, 일본 정세 보고
제 각각, 당리당략의 망조!
국제질서는 힘의 논리, 북한의 화전양면 전술 경계해야
율곡 이이, "나라가 나날이 썩어가는 것이 큰 집의 대들보 같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안보불감증

우리는 절체절명 두 개의 운명선(運命線)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남해를 통해 태평양으로 뻗어 나가는 해상로이고 다른 하나는 북한과 맞닿은 155마일 DMZ와 동-서 NLL 해상경계선이다. 남해 해상통로가 수출입과 원유 등 에너지 수입루트인 생명의 젖줄이라면 북쪽 라인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죽음이 예고되는 데드라인(dead line)이다.

평양에서 열린 9.19 남북군사합의서 서명식.
평양에서 열린 9.19 남북군사합의서 서명식.

그런데 작금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 일어나는 갖은 군사 사태를 지켜보자니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속담에 귀가 기울여진다. 한반도에는 평화통일무드가 퍼져 있어 안보를 말하면 “지금 전쟁을 하자는 거냐”는 핀잔을 듣기 십상인 분위기이다. 아마도 그것은 2018년 4.27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한 판문점선언 때문일 것이다. 당시 송영무 국방장관과 노광철 북한 인민무력상은 2018년 9월 19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판문점선언의 이행을 위한 군사 분야 합의서’에 각각 서명하고 11월 1일부터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상대방을 겨냥한 각종 군사연습을 중지하기로 했다.

합의서에는 공중에서는 군사분계선 동-서부 지역 상공에 설정된 비행금지구역 내에서 고정익항공기의 공대지유도무기사격 등 실탄사격을 동반한 전술훈련을 금지하기로 했다. 이로써 접경지역과 북핵을 감시해야 할 우리의 정찰능력은 먹통이 되고 말았다. 평화를 담보로 한 양보! 그것이 위장평화라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은 누가 책임을 지는 것인지 심히 회의적이다.

범죄이론 가운데 ‘깨진 유리창(broken window)의 법칙’라는 게 있다. 유리창을 깨트린 뒤 자동차를 방치해 놓으면 그 차는 버려진 것으로 보고 사람들이 모든 부품을 떼어가서 나중에는 차체 자제가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것은 둑에 난 작은 구멍이 나중에 둑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는다’는 우리 속담과 엇비슷하다. 이 이론에 따르면 ‘100-1=0’다. 아니 ‘100-1= -100’이 될 수도 있다.

‘미국놈 믿지 말고 소련놈에 속지 마라,

일본놈 일어나고 되놈(중국) 되(다시) 나온다.

조선은 조심해라’

70년 전 노래로 불려져  

심심하면 중국과 러시아 군용기가 우리의 방공식별구역인 카디즈를 무단 침입하고 전략 요충지인 독도가 있는 동해는 북한, 중국, 러시아, 일본 등의 ‘잠수함 놀이터’가 된 지 꽤 오래됐다. ‘고립된 섬’인 한반도 주변 상황을 보니 대한민국은 태풍 앞에 놓인 촛불 같아 위태롭기 짝이 없다. 400여 년 전 선조 때 임진-정유재란과 100여년 전 고종의 대한제국이 눈에 어른거려 기시감을 떨쳐낼 수가 없다. 70년여 전 일본 강점기에서 해방된 뒤 이 나라에서 ‘미국놈 믿지 말고 소련놈에 속지 마라, 일본놈 일어나고 되놈(중국) 되(다시) 나온다. 조선은 조심해라’는 노래가 어린이들 사이에서 퍼졌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아 1950년 6월 25일 소련의 무기 지원을 받은 북한의 남침으로 한반도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동족의 유혈참극이 벌어졌다. 미 제10군단의 두만강 혜산진 북진으로 통일이 눈앞에 왔건만 중공군의 인해전술 대공세로 통일의 기회가 싹 날아가 버렸다.

6.25 한국전쟁 때 중공군을 방어하는 미국 해병대.
6.25 한국전쟁 때 중공군을 방어하는 미국 해병대.

이렇듯 우리의 운명은 참으로 기구하고 처절했다.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부국강병을 이뤄나갈 수 있을까.

돈으로 평화 산 송나라, 금나라에 멸망, 남송은 원나라에 멸망

다음은 ‘돈으로 평화를 산 나라’의 종말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역사적 사례이다. 오늘 우리의 문제를 역사에서 답을 구하는데 시사하는 바가 클 것 같다. 송나라 때 8대 황제인 휘종(재임기간 1100~1125)은 인재를 보는 눈이 부족하고 정치적으로 무능했으며 더욱이 방탕했다. 간신 채경을 재상으로 임명했고 환관 동관을 중용했다. 휘종의 방탕과 관료들의 당파싸움으로 민생은 피폐해 백성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때 중국 동북부 만주지역에 거주하던 여진족은 150년 동안 거란족인 요나라의 지배를 물리치고 금나라를 세웠다. 요나라에 시달리던 송나라는 금나라의 출현을 오히려 반가워했다. 금나라로 요나라를 견제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송나라는 요나라에 빼앗긴 연운 16주를 수복하기 위해 1120년 금나라와 동맹을 맺고 각각 남북으로 요나라를 협공했다. 송나라는 요나라에 대패했지만 금나라는 요나라를 정복했다. 금나라는 요나라에 패한 송나라를 무시했는데도 송나라는 요나라의 멸망만을 기뻐했고 금나라의 위협을 무시했다. 금나라는 1126년 황하를 넘어 송나라를 침략했다. 무력한 휘종은 제위를 황태자에게 양위하고 호위병을 데리고 강남으로 도망쳤다. 휘종이 퇴위하자 신하들은 피난파와 주전파로 나뉘어 적전 분열을 일삼았다. 후임 흠종과 피난파는 주전파인 이강(1083~1140) 몰래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 강화를 요청했다. 화친의 조건은 금나라에게 태원, 중산, 하간 등 3진을 떼어주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고 금나라 황제를 백부(伯父 큰아버지)로 받들기로 했다. 강화소식을 들은 이강은 관직을 사퇴하고 조정을 떠나겠다고 했다.

'독서가' 이순신 장군의 독후감 '송사를 읽고'

이 대목에서 ‘독서가’ 이순신 장군이 남긴 독후감 ‘송사(宋史)를 읽고’의 기록을 소개한다.

“아 슬프도다! 그때가 어느 때인데 이강은 떠나고자 했는가? 떠난다면 또 어디로 가려했던가. 무릇 신하된 자로서 임금을 섬김에는 죽음이 있을 뿐 다른 길은 없다. 그런데 종사의 위태로움이 마치 머리털 한 가닥에 천균(千鈞 삼만근)을 매단 것과 같다. 그때가 바로 신하된 자가 몸을 던져 나라의 은혜를 갚을 때이다. 떠나가겠다는 말은 정말로 마음속에 싹을 틔워서도 안 되는데 하물며 어떻게 입 밖으로 낸단 말인가. 내가 만일 이강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몸을 허물어 피를 토하고 읍소하며 간담을 열어젖혀 쓸개를 뚝뚝 떨어트리면서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기에 화친할 수 없는 이유를 명백히 말할 것이다. 아무리 말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에는 죽음을 택할 것이다. 죽음 속에서 살길을 찾으면 만에 하나라도 혹시 나라를 건질 방도가 있을 것이다. 이강은 어찌 신하된 자로서 임금을 섬기는 의(義)를 말할 수 있겠는가?”

한산도 충무사에 병풍으로 보관중인 이순신 장군의 독후감 '송사를 읽고'.
한산도 충무사에 병풍으로 보관중인 이순신 장군의 독후감 '송사를 읽고'.

1597년 10월 3일 메모이다. 이순신 장군은 명량해전에서 중과부적의 열세를 이겨내 신승(辛勝)을 하고 일본수군의 대대적인 재공세에 대비해서 13척의 판옥선을 가지고 서해 고군산도까지 작전상 후퇴를 할 때였다. 물론 ‘주전파’인 이순신 장군도 송나라 황제와 강화론자에 대해서 분통을 터뜨렸을 법하다. 또한 이강의 답답한 마음도 헤아렸을 것이다.

송나라에서는 금나라 군대가 물러가자 수도의 비상사태를 해제하고 태상왕 휘종은 다시 변경성으로 돌아와 전처럼 사치와 방탕을 일삼았다. 각지에서 온 근왕병도 다 돌려보냈다. “평화를 돈으로 사면 평화가 계속될 것”이라고 본 것이다.

침략당한 역사를 잊은 조정의 모습에 대해 이강은 수차례 표문(表文 상소)을 올려 군비를 강화하고 침략에 대비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주화파는 이강을 변방으로 발령냈다가 해직시키고 건창군으로 추방했다. 그 후 얼마 안 가서 이강의 예측대로 금나라는 송나라가 조약을 이행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시 송나라를 침략했다. 금나라는 무자비하게 변경성을 점령했고 흠종은 금나라 군영에 가서 무릎을 꿇고 투항서를 바쳤다. 금나라는 화친의 조건으로 황하를 경계로 하북, 하동의 땅 전부를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흠종은 이 요구를 받아들였다. 금나라는 태상황 휘종, 흠종, 황자, 공주 등 3000여 명을 포로로 압송해 돌아갔다. 송나라 멸망 사건은 정강(靖康) 연간에 발생했다고 해서 역사가들은 ‘정강의 치욕’ 또는 ‘정강사변’이라고 기록했다.

북송이 멸망하던 해 휘종의 아들이자 흠종의 동생인 고종이 1127년 남송(1127~1279)의 황제로 등극했다. 고종이 즉위할 때 금나라 군대가 쳐들어와 민심이 어지러웠다. 그래서 주전파인 이강을 재상으로 등용했지만, 변심한 고종과 주화파의 끈질긴 음모로 77일만에 파직당했다. 고종의 양보와 타협에도 금나라는 남쪽으로 계속 밀고 내려왔다. 1141년 진회가 굴욕적인 강화를 성공시켰다. 대신 남송 황제는 금나라의 신하가 되고 매년 엄청난 양의 은과 비단을 공물로 바쳐야 했다. 국경선도 새로 그어졌다. 돈으로 평화를 산 남송은 국토의 절반만 보존하다가 1279년 쿠빌라이의 원나라에 완전히 멸망해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한반도는 1953년 7월 27일 이후 지금껏 휴전(休戰) 상황이다. 그래서 안보콘트롤 타워의 신속하고도 정확한 판단이 곧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구도다.

다음은 왕과 조정의 최고지휘부가 오판(誤判)을 하면 나라가 어떻게 되는가를 알 수 있는 사례이다.

황윤길-김성일, 일본정세 보고 제 각각, 당리당략의 망조!   

왜란의 전운(戰雲)이 감돌던 1590년(선조 23) 조정은 우의정 류성룡(柳成龍)의 건의로 일본 정세와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통신사를 파견했다. 그 이듬해인 1591년 3월에 귀국한 정사 황윤길(黃允吉)은 “일본은 많은 병선(兵船)을 준비하고 있어 필경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다”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부사 김성일(金誠一)은 “래구(來寇 왜구가 침입함)할 정황을 보지 못하였다”라고 말했다. 선조가 풍신수길(豊信秀吉)이 어떻게 생겼느냐고 하자, 황윤길은 “눈빛이 반짝반짝하고 담과 지략이 있는 자”라고 했고 김성일은 “가는 쥐 눈을 가지고 있어 두려워할 위인이 못된다”고 아뢰었다.

선조 때 동서분당의 계보.
선조 때 동서분당의 계보.

왕에게 복명(復命)을 마치고 나온 김성일에게 류성룡이 “만일 병화(兵禍)가 있게 되면 어찌할 것인가?”라고 묻자 김성일은 “나도 어찌 병화가 없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정사의 보고에 중앙과 지방의 민심이 놀라 동요할까 걱정돼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당시 조정은 영의정 이산해(李山海 동인→ 북인), 좌의정 정철(鄭澈 서인), 우의정 류성룡(柳成龍 동인→ 남인)으로 구성되었는데 동인이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따라서 동인 김성일의 뜻이 받아들여졌다. 이때 서장관으로 따라갔던 허성(許筬)은 동인이었지만 ‘왜의 낌새가 이상했으므로’ 서인 황윤길의 의견에 동조했다가 동인들로부터 뭇매를 맞을 뻔했다.

서인 정철은 1589년 기축옥사(정여립의 난) 때 옥사(獄事)의 위관(委官)으로 3년 동안 동인세력 1000여 명을 대거 참살 또는 귀양을 보내 동인의 미움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또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건저의(建儲議) 문제로 동인의 협조를 구해야 할 상황이었다. 따라서 ‘강성(强性)’ 정철도 못이기는 척 동인의 뜻에 따랐다. 그야말로 당리당략(黨利黨略)과 사심(私心)이 작용했던 셈이다.

북로남왜(北虜南倭), 북쪽 여진과 남쪽 왜구를 미개한 오랑캐로만 치부하던 선조와 조정의 오판(誤判)으로 강토는 7년 동안 수많은 백성이 도륙을 당해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루었다. 또 농지는 거의 황폐화 됐고 먹을 것이 없어 인육(人肉)을 먹기까지 했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인상식(人相食)의 참상이 벌어졌다.

죽은 어머니의 젖을 빨고있는 아이를 보고 울부짖는 류성룡. 일본 에혼다이고기.
죽은 어머니 젖을 빨고있는 아이를 보고 울부짖는 류성룡. 일본 에혼다이고기.

선조실록 1594년 1월 17일 기록이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기근이 극도에 이르러 심지어 사람의 고기를 먹으면서 서로 괴이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길가에 쓰러져 있는 굶어 죽은 시체에 완전히 붙어있는 살점이 없을 뿐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산 사람을 도살하여 내장과 골수까지 먹고 있다고 합니다. 보고 듣기에 너무 참혹합니다” 또 호남 의병장 조경남(趙慶男)의 ‘난중잡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성중에 들어갔을 때 마침 명나라 군사들이 술을 잔뜩 먹고 가다가 길 가운데 구토하는 것을 보고 수많은 굶주린 백성들이 한꺼번에 달려와 머리를 땅에 박고 토사물을 핥아먹었다. 그나마 힘이 미치지 못한 사람은 밀려나서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다” 이렇듯 전쟁의 폐해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비참한 것이다.

경제는 먹고사는 문제이지만, 안보는 죽고 사는 문제이다.

국제질서는 힘의 논리, 북한의 화전양면 전술 경계해야

동서고금의 역사를 개관하건대, 국제질서는 오로지 냉엄한 힘의 논리가 작용한다. 만만하게 보이면 계속 집적거리고 강하게 나가면 꼬리를 내리는 게 그동안 학습된 경험칙이다. 유엔의 제재가 작동 중이지만 미국은 국내 정치용으로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저평가하고 있고 이를 이용하는 북한은 화전양면(和戰兩面) 전술을 구사중이다. 이 와중에 대한민국은 존재감이 없다.

무더위와 계속되는 안보불감증을 다소 해소할 시원한 청량 음료수와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중부전선 백골부대(3사단) 박정인 사단장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 이상으로 대응한 참군인이었다. 1973년 3월 7일 비무장지대에서 표지판 보수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우리 측 군인들에게 북한군이 기습사격을 가해 대위 1명과 하사 1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에 박 사단장은 105mm, 155mm 견인포로 북한 GP와 경계부대에 포사격을 맹렬하게 퍼부었다. 북한은 아무런 대응도 못했다. 이 일로 박 사단장은 옷을 벗어야 했다. 1972년 남북협상이 진행 중이었고 작전통제권을 미군이 가진데 다가 일개 사단장이 함부로(?) 북한을 공격하면 정전협정위반이었다.

‘적은 도발하면 상을 받고 우리는 맞대응하면 벌을 받는다’는 이 학습효과는 꽤 오랫동안 일선 지휘관들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이이, "나라가 나날이 썩어가는 것이 큰 집의 대들보 같다"

‘부부일심지대하(桴腐日深之大厦), 기국비국(其國非國)이라.’ “나라가 나날이 썩어가는 큰 집의 대들보와 같으니, 이건 정말 나라도 아니다.”

동서분당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율곡 이이의 직언리더십.
만언봉사를 통해 선조에게 직언을 한 율곡 이이.

1582년 율곡 이이(李珥)는 왜란의 조짐이 있는데도 국론이 엇갈려 유비무환(有備無患) 정신이 사라진 조정 상황을 상소문 ‘만언봉사(萬言封事)’에서 그렇게 탄식했다. 백성과 나라의 안위를 위해 목숨을 걸고 선조에게 직언한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미래비전인 부국강병을 위해서 이렇게 직언할 자는 없는가? <9회 연재 끝>

 

 

                                           <김동철 박사 약력>

▲교육학박사

▲이순신 인성리더십포럼 대표

▲이순신리더십 국제센터 운영자문위원장

▲성결대 교양학부 객원교수

▲전 중앙일보 기자-월간중앙 기획위원

▲경복고-한국외국어대학교-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명지대 대학원 졸

▲저서: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우리가 꼭 한번 만나야 하는 이순신(이순신 리더십 특강)’ ‘이순신 유적 답사기1’

▲논문: ‘이순신의 청렴 인성 리더십’ ‘나라사랑 충, 부모사랑 효, 백성사랑 애민, 부하사랑 소통, 거북선 창제의 창의력’ ‘충무공 이순신 시조에 나타난 인성’ ‘이순신과 원균의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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