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체육대학서 ‘국내 스포츠신문의 변천과 사회이론적 해석’으로 박사학위
[김경호 경향신문 선임기자 ‘박사논문 연구과정 이야기’ 특별 기고]

한국 최초의 스포츠신문은? 웬만한 스포츠팬이라면 이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일간스포츠.”

맞다. ‘일간스포츠’다. 하지만 반쯤 맞았다. 아니, 그게 아니고 틀렸다고 해야겠다. 한국 최초의 스포츠신문은 ‘일간스포츠’가 아닌 ‘일간스포츠신문’이기 때문이다.

두 신문은 엄연히 다르다. 현재 발행되고 있는 일간스포츠는 1969년 한국일보사에서 발행한 스포츠 전문 일간지다. 그보다 6년 빠른 1963년 일요신문사(현재 일요신문과는 다름)에 의해 ‘일간스포츠신문’이란 스포츠 전문지가 창간됐고, 불과 1년 만에 경제신문으로 전환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 후신이 한국경제신문이다.

김경호 경향신문 선임기자.
김경호 경향신문 선임기자.

‘국내 스포츠신문의 변천과 사회이론적 해석(Historical Process and Theoretical Analysis of Sports Newspapers in Korea).’ 지난 2월 한국체육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하며 제출한 이 논문은 국내 스포츠신문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1963년 창간된 일간스포츠신문에서부터 16년간 독주한 일간스포츠, 스포츠 신문 경쟁시대를 연 스포츠서울, ‘스포츠신문 삼국지’를 이룬 스포츠조선을 비롯해 스포츠투데이와 굿데이가 가세해 과포화 상태로 경쟁하던 시기의 이야기와 그 이후 현재 진행형 이야기를 해당 신문과 관련 문헌, 저서, 그리고 종사자 인터뷰 등을 통해 정리했다.

국내 첫 스포츠신문은 ‘일간스포츠’ 아니라 ‘한국경제’ 전신인 ‘일간스포츠신문’

일간스포츠신문이라는 첫 스포츠신문이 1963년에 나왔다가 1년 만에 경제신문으로 변신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는 있으나 선배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창간의 내막을 들었을 때의 기쁨은 형언하기 힘들었다. 돌아가신 유홍락 선배의 2015년 증언, 그리고 지난해 가을 전화로 생생하게 기억을 재생해 내신 오일룡 선배의 증언 등이 결정적이었다.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이 깊숙이 관여한 일간스포츠신문은 한국경제신문사 지하 창고에 창간호부터 대부분 소중하게 보관되고 있었다. 헬륨 가스로 특수처리된 창고 문을 열고 들어가 부식 직전에 이른 옛날 신문을 조심스럽게 넘기던 때의 흥분도 생생하다.

일간스포츠, 스포츠서울 등 이후 신문을 찾기 위해 휴일이면 국회 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을 수없이 들락거렸다. 소리나지 않는 카메라 어플이 큰 도움이 됐다. 또한 스포츠 신문 이 곳 저 곳을 전전한 후배를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고 증언해 주신 이태영, 김덕기, 홍윤표, 신명철, 이영걸, 박건만, 박재영, 정경문, 이성춘 등 선배들께 감사할 따름이다.

◆ 국회도서관 등 수없이 들락거리며 소리나지 않는 카메라 어플로 신문 촬영

1961년부터 서울경제신문 체육면을 통해 치밀하게 준비한 끝에 장기영이 창간한 일간스포츠는 1970년대 한국의 경제성장, 청년문화 발전과 함께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고우영 만화를 연재한 게 신문의 폭발적 성장과 더불어 한국 성인만화 발전에 기여하게 된 계기가 됐다. 스포츠서울은 1985년 신군부 정권의 3S정책과 맞물려 창간됐지만 컬러 인쇄 및 전면 가로쓰기와 한글전용, 야구 기록지 ‘땅표’ 등으로 한국 언론사에 한 획을 그었다. 스포츠조선 가세 후 3개지가 선정성 짙은 만화부록으로 과열 경쟁을 벌이다가 음란물 시비에 휘말리며 ‘황색신문’의 이미지를 뒤집어 쓴 뼈아픈 기록도 빠짐없이 기록했다.

스포츠신문(적어도 종이신문)은 이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가판시장을 휩쓸던 스포츠신문은 2000년대 중반 메트로, 포커스 등 무료신문 열풍에 무너졌고 이후 인터넷 스포츠전문 매체의 후속 충격으로 완전히 그로기 상태에 빠졌다. 한국일보와 서울신문의 경영에 효자노릇을 하던 일간스포츠와 스포츠서울은 모기업을 살리느라 팔려갔고 굿데이와 스포츠 투데이는 경영난에 무너졌다. 60년에 가까운 스포츠신문의 역사도 이렇게 한 페이지를 마감하고 있다.

스포츠신문은 지식인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신문의 대중화를 이끌었고 엘리트 체육과 프로스포츠, 대중문화 발전에도 톡톡히 기여했다. 건국 초기부터 국가의 위상을 올리는 데 기여한 엘리트 체육의 벗이었고, 국민에게 즐거움을 선사한 친구였다. 스포츠 민족주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 안에서 이어지고 있는 대표 이데올로기다. 스포츠미디어 민족주의, 상업적 민족주의는 그 변형이다.

◆ 스포츠신문은 지식인 전유물이던 신문의 대중화 이끌고 프로스포츠 발전에 기여

2010년 한국체육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을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남의 이야기로 기사를 쓰는 데 열중했지만 이제는 내가 종사하고 있는 스포츠언론 분야에서 무엇인가 정리하고, 무엇인가 남기고 싶다’는 의욕을 갖게 됐다. 스포츠기자 20여 년 경력은 다행히 특별 전형으로 입학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스포츠 언론정보학’으로 석사과정을 보내면서 스포츠 기자들 스스로 ‘한국 언론계의 서자’라고 자조하는 스포츠신문에 주목하게 됐다. 2010년대 초반은 굿데이, 스포츠투데이가 이미 소멸되고 온라인 매체의 습격으로 스포츠신문 시장이 재편되던 시기였다.

1989년 국내 최고의 스포츠신문인 일간스포츠에 입사한 뒤 10년도 다 채우지 못하고 스포츠투데이, 굿데이 창간멤버로 옮겨 다니다 ‘신문 불패’의 신기루가 깨지는 불행한 현장을 목격한 터라 스포츠 신문의 흥망성쇠는 나의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김경호 기자가 발표한 ‘국내 스포츠신문의 변천과 사회이론적 해석(Historical Process and Theoretical Analysis of Sports Newspapers in Korea).’
​김경호 기자가 발표한 ‘국내 스포츠신문의 변천과 사회이론적 해석(Historical Process and Theoretical Analysis of Sports Newspapers in Korea).’

◆ ‘신문불패’ 신기루 깨지는 불행한 현장 목격

스포츠신문 흥망성쇠는 나의 이야기

석사논문 제목은 ‘스포츠신문의 온라인 서비스 활성화와 인쇄신문의 관계-공급자 측면에서’였다. 스포츠신문이 내일자 기사를 전날 자사 홈페이지와 네이버, 다음 등 포털 사이트에 미리 내보내는 온라인 서비스 강화가 종이 신문을 잠식할 것이라는 관점에서 작성한 논문이다.

석사과정은 신문 기사와 학술 논문은 아주 매우 다르다는 것을 배운 시기였다고 할 정도였다. 설문조사와 인터뷰 등을 함께 한 질적 연구 논문인데, 스스로 이것이 학부생의 레포트인지 논문인지 갸웃거릴 만큼 만족스럽지 못했다. 지금 들춰보니 석사논문으로 그리 부끄러운 수준은 아닌데, 당시엔 ‘내가 이 정도밖에 못할까’라는 생각에 자존심이 상했다.

석사 졸업 후 1년을 쉰 뒤 2014년 박사과정으로 들어갈 때 전공을 체육사학으로 선택했다. 스포츠 언론인들이 대부분 사회학이나 마케팅을 전공하는 것과 달리 체육사학을 택한 데엔 1년 먼저 스포츠 사회학 박사과정에 들어간 당시 조선일보 체육부 조정훈 부장의 조언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 석사논문에선 “다음날자 기사를 포털에 미리 내보내면 종이신문 잠식” 예견

선택은 옳았다. 기자로서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바로 한국스포츠 역사의 한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스포츠언론의 기록을 논문으로 남기게 되니 그 보람 또한 매우 크고, 뿌듯한 자부심도 느낀다. 1년 반을 휴학하고, 한 학기를 늦춰 5년 만에 졸업하게 됐지만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데는 하웅용 교수의 헌신적인 지도가 큰 힘이 됐다.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1989년 9월 일간스포츠에 입사해 스포츠 기자의 꿈을 키우던 때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만 30년을 꼭 채우게 되는 올해, 한국 스포츠신문의 역사를 정리하고 나름대로 사회적 의미를 부여해 논문을 완성하게 됐다는 데 큰 보람을 느낀다. <김경호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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