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철의 '이순신 오해와 진실'(8)]

문재인 대통령 "이순신 장군의 12척 배"
정조와 박정희 전 대통령, 이순신 현창사업에 열중
김구 선생, 진해에 이순신 어록 친필 비석 세워
이승만 전 대통령, 국내 최초 이순신 동상 진해 제막식 참석
"이순신 배 12척인가? 13척인가?" 질문 많아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명량대첩 전날, 필사즉생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이순신 친필 편지, "약무호남 시무국가"
독일 역사가 랑케, "모든 시대에는 제각각의 신이 있다"

문 대통령, "호남사람들과 함께 이순신 장군은 12척으로 싸웠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전라남도 무안에 내려가서 한 말이 회자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12척의 배’이야기이다. 보도가 전해진 뒤, 어떤 사람은 “이 정권에서 이순신 장군이 소외되었는데 대통령이 언급했으니 이제 눈치 빠른 공무원들이 이순신을 다시 찾는 계기가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또 어떤 이는 “요즘 이순신 강의로 바쁘시지요?”라며 안부를 물어왔다. 오호 통재라! 언제부터 이순신 장군이 보수, 진보정권의 입맛에 따라 취하고 버리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인가.

정조와 박정희 전 대통령, 이순신 현창사업에 열중해

이 대목에서 역사를 좀 들여다보면, 정조 임금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순신 장군을 가장 흠모했다. 이 징표로는 정조 임금이 1792년 임진왜란 발발 200년을 맞아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편찬을 지시했다. 충무공의 충성을 숭상하고 공로에 보답하며, 무용(武勇)을 표창하고 의열을 빛낸다는 의미에서 어명을 받은 규장각 문신 윤행임에게 편찬을, 예문관 검서관 유득공에게 교정을 맡겨서 3년에 걸쳐 작업한 끝에 1795년(정조19)에 14권으로 간행되었다.

정조 때 편찬된 이충무공전서.
정조 때 편찬된 이충무공전서. 거북선 그림이 들어있다.

 

정조는 내탕금(임금의 사금고)을 내서 전국에 흩어진 이순신의 모든 자료를 모아서 정신과 리더십을 현양하고자 했다. 그러나 대신들의 반발이 심했다. “임금이 신하를 위해서 내탕금을 쓰는 것은 법도에 없는 일이옵니다”라고 간언했지만 정조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듬해에는 이순신 장군을 영의정으로 추증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최고 벼슬을 내린 것이다. 또 그 다음해에는 충청도 아산 어라산 이순신 장군의 묘소 옆에 어제신도비(御製神道碑)를 세웠다. 어제신도비는 임금이 신하의 공적을 기리며 세우는 비석으로 이 또한 ‘법도에 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이충무공전서는 1795년 발간되었다. 7년 전쟁 동안의 난중일기, 임진장초(전장 기록 상소문), 서간첩(편지)과 행록, 행장 등 이순신 장군이 남긴 모든 기록 등이 햇볕에 바랜 것은 역사로, 달빛에 물든 것은 신화로 태어났다.

아산 어라산 이순신 장군 묘역(왼쪽 위) 아래 오른쪽 정조대왕 어제신도비를 모신 비각. 몇해 전 현충사에서 고교생 대상 이순신 리더십 강의를 하고 현장답사함.
아산 어라산 이순신 장군 묘역(왼쪽 위) 아래 오른쪽 정조대왕 어제신도비를 모신 비각. 몇해 전 현충사에서 고교생 대상 이순신 리더십 강의를 하고 현장답사.

그리고 또 한 사람.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6년 문공부에 현충사 성역화 사업을 지시했다. 이듬해 1968년 서울 광화문에 충무공 이순신 동상에 세워지고 노산 이은상 선생에 의해 난중일기가 한글로 번역되어 나왔다. 이어 1969년 전라남도 해남에 충무사 중건, 1973년 경상남도 삼천포시 노산공원에 동상 건립, 조성도 해사 교수에 의한 임진장초 번역, 서울 중앙청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세워졌다. 이어서 1975년 통영 한산도 제승당 성역화작업 착수, 사천해전 승첩비 건립이 이뤄졌다. 박 전 대통령은 1979년 10월 한산대첩비의 건립 제막식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해 12월에는 해군에서 거북선을 복원하여 진수했다.

김구 선생, 진해에 이순신 어록 친필 비석 세워

이승만 전 대통령, 국내 최초 이순신 동상 진해 제막식 참석

한편 김구 선생은 1946년 통영 한산도 제승당 방문에 이어 진해에 도착, 이순신 장군의 진중음 일부(맹산초목지 서해어룡동)를 담은 시비를 세웠다. 또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이승만 전 대통령은 국내 최초로 진해에 세워진 이순신 장군 동상 제막식에 참석했다.

김구 선생의 한산도 이순신 장군 참배.
김구 선생의 한산도 이순신 장군 참배.
한국전쟁 중 진해 이순신 장군 동상 제막식에 참석한 이승만 전 대통령.
한국전쟁 중 진해 이순신 장군 동상 제막식에 참석한 이승만 전 대통령.

임진-정유재란의 당사자였던 선조는 1598년 이순신 장군 사후 그를 우의정으로 증직하고 1604년 7월 좌의정 겸 덕풍부원군으로 봉하고 선무1등공신으로 선정했다. 인조 임금은 이순신 장군 사후 45년만인 1643년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내려 국난극복의 장수에게 최고의 영예를 부여했다. 현종은 경상남도 남해 노량에 충렬사 현판을 내렸고 전남 해남에 명량대첩비를 세웠다.

역사를 개관하건대 이렇듯 많은 정치 지도자들은 이순신 장군을 흠모하고 국민정신의 귀감으로 삼고자 현창사업을 진두지휘했다. 따라서 이순신 장군 사업을 특정 지도자의 정권 보존 및 강화를 위한 ‘보신책’으로 보는 것은 편협하고 협량할 따름이다. 이순신 장군은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위해서 진충보국한 인물이고 여느 사람들이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살신성인을 실현한 비범한 사람이었다.

"이순신 배 12척인가? 13척인가?" 질문 많아

서론은 이만 각설하고, ‘12척의 배’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 12척의 배는 1597년 정유년 7월 16일 원균 지휘 하의 거제도 칠천량 해전 하루 전에 패색이 짙은 전장에서 극도의 위기감을 느낀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배설이 빼돌려 전라도 장흥 회령포에 숨겨놓은 것이다. 이순신 리더십 강의 때 “명량대첩 때 판옥선 13척이 참전했다는데, 12척이 맞느냐? 13척이 맞느냐?”는 질문을 많이 한다. 나는 “배설이 도피시킨 판옥선은 12척이고 나중에 1척이 더 추가되었는데, 그것은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1척을 가져왔다. 그래서 모두 13척이 명량해전에 참전하게 된 것이다”라고 답한다.

또 다른 질문이 이어진다. 13대 133의 싸움이 가능했겠느냐는 것이다.

답은 배의 척수로 볼 때 열 배가 넘는 133척이 모두 한꺼번에 달려든 것이 아니라 좁은 수로임으로 일자진의 전개가 아니라 장사진 전법으로 달려들다가 31척이 깨지고 부서지면서 수장되었다. 후방에는 300여 척이 동원됐지만 직접 전투에 참가하지는 않았다. 일본수군은 선발대가 궤멸되자 후방의 일본 수군은 서둘러 퇴각했다. ‘외로운 형세’의 이순신 수군도 일본 수군의 재침에 대비해서 후퇴를 거듭해 서해 고군산도 앞바다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남해로 들어와 그해 10월 29일 전라도 목포 보화도(고하도)를 거쳐 다음해인 1598년 2월 17일 완도의 고금도 진영에 안착했다. 그리고 1598년 노량해전 때는 고금도에서 조명연합수군(진린-이순신) 함대가 출동해서 순천왜성의 고니시 유키나가를 공격하다가 남해 관음포에서 전사한 것이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이순신 장군이 남긴 명언 가운데 오늘날까지 유명한 말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이다. 어려운 역경에 처한 정치인이나 기업가 가운데 상황을 타개하고 희망을 찾고자 할 때 애용하는 말이다.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사옵니다

전선수과(戰船雖寡) 전선의 수가 비록 부족하지만

미신불사즉(微臣不死則) 보잘 것 없는 신이 살아 있는 한

불감모아의(不敢侮我矣) 감히 적은 우리를 가볍게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 말이 나오게 된 연유는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에서 벗어나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어 12척의 배를 찾기 위해 전라도 바닷가로 서진하고 있을 때였다. 1597년 정유년 8월 15일 보성군에서 머물 때 선전관(임금의 전령) 박천봉이 가져온 선조의 편지에는 “지난 칠천량 해전에서 패한 결과로 해전이 불가능할 경우 육지에 올라 도원수 권율(權慄)을 돕도록 하라”는 명이었다. 선조의 변화무쌍한 변심(變心)이 또 발동했다. 한마디로 수군폐지였다.

보성 열선루 부근 이순신 유적 공원.
보성 열선루 부근 이순신 유적 공원. '금신전선 상유십이'

이에 장군은 황급히 장계를 올리면서 쓴 글이 바로 “금신전선 상유십이~”이다.

수군을 폐지하고 육전에 합류하면 일본 수군이 바다의 제해권을 가지게 되고 남해를 통해 서해를 거쳐 올라가면서 금강, 한강, 임진강, 대동강, 압록강으로 쳐들어갈 것을 염려해서 였다. 장군은 선조의 명을 어겨가면서 8월 19일 장흥 회령포에서 경상우수사 배설이 숨겨놓았던 12척의 판옥선을 찾아냈다. 그나마 삼도수군통제사로서 최소한의 체면치레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배설은 신병치료차 해남 전라우수영에 내려 곧바로 도주했다. 결국 임진왜란이 끝난 1599년 고향 선산에서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상유십이' '미신불사'.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해남 울돌목이 내려다 보이는 식당에 들렀다가 쓴 친필 휘호.
'상유십이' '미신불사'.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해남 울돌목이 내려다 보이는 식당에 들렀다가 쓴 친필 휘호.

판옥선 13척에 1천여명의 수군으로 300여척, 2만여 명의 일본 수군을 정말 어떻게 당해냈을까. 도저히 이길 승산이 없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상황이었지만 이순신 장군은 좁은 수로(폭 294m 내외)와 급류(11노트, 시속 20km)를 이용한 울돌목으로 적을 유인하는 주동권(전투 시간과 장소를 정함)을 발휘했다. 일본군 주력선인 133척의 세키부네를 맞아 사정거리 1천m 안으로 접근한 지점에서 천자, 지자, 현자, 황자총통의 대장군전과 조란탄을 일제히 발사했다. 사수들은 불화살을 벼락처럼 쏘아댔다. 이에 왜군 선발대 31척을 분멸(焚滅)시키고 깨어진 세키부네의 잔해가 어지러웠다. 조선수군의 판옥선은 단 한 척도 상하지 않았다. 도도 다카도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쿠루시마 미치후사, 모리 다카마사 등 굵직한 대명(大名, 다이묘)급 왜장들이 참전했지만 쿠루시마 미치후사는 전사하고 도도 다카도라는 중상을 입었다. 왜수군은 수천여 명이 사상(死傷)하는 등 커다란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천행' 신화와 같은 명량대첩도.
'천행' 신화와 같은 명량대첩도.

명량대첩 전날, 필사즉생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해전이 벌어지기 전날 이순신 장군은 일본 수군의 내습에 떨고 있는 휘하 장수와 군졸들에게 필사즉생(必死則生) 필생즉사(必生則死)를 강조했다.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또 ‘일부당경 족구천부(一夫當逕 足懼千夫)’즉 한 사람이 좁은 길을 막고 있으면 천 명이라도 두렵게 할 수 있다’. “이 병법은 바로 우리를 두고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해전 당일 이순신 장군은 명량의 좁은 수로에 일자진(一字陳)을 치고 맨 앞장을 섰다. 전라우수사 김억추와 나머지 장수들의 전선은 2마장(약 900m) 후방에서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하고 있다가 나중에 합류했다. 이순신 장군은 조선 수군의 군세를 만회하려고 후방에 전라도 지역의 수군 의병이 타고 있는 포작선(어선)과 향선 100여 척을 배치했다. 치열한 전투가 끝난 뒤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에서 ‘하늘이 도와준 천행(天幸)’이라고 술회했다. 그러나 천험의 지리와 천혜의 조건을 유리하게 바꾸어 천행을 이룬 이순신 장군의 ‘필사즉생!’ 전략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나라사랑에 몸 바친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이순신 장군 사자후(獅子吼)가 몹시 그리워지는 시절이다.

이순신 친필 편지, "약무호남 시무국가"

또한 문 대통령이 “전남주민들과 함께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로 나라를 지켰다’는 발언을 하자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말이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 말은 “만약 호남이 없다면 국가가 바로 설 수 없다”는 뜻이다. 이 기록은 이순신 장군이 1593년 계사년 7월 16일 여수에서 한산도로 수군진을 옮긴 뒤 친척에게 보낸 편지(서간첩)에 적혀있다.

다음은 편지 전문이다.

현지평 정안(靜案, 책상)에 들이시오.

임금님의 병이 회복되심은 신하와 백성들의 경사이니 손뼉 치며 축원하는 마음을 어찌 말로 다하겠습니까. 난리로 혼란스러운 나머지 그리운 마음 한창 간절한데 이제 홀연히 사령을 보내시어 월초에 띄운 편지를 받고 급히 펼쳐보니 위안이 되는 마음이 예전보다 더욱 간절했습니다. 하물며 편지에 가득한 말의 뜻이 정중한 것에 있어서는 어떠하겠습니까.

막 서늘한 기운이 들녘에 찾아들었는데 삼가 정양하는 가운데 기거를 더욱 보중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위안이 된다는 말씀은 무어라 형언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괴로운 진중에서 나라의 은혜가 망극하여 품계가 정헌대부(正憲大夫 정2품)에 오르니 감격한 마음 그지없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호남은 국가의 울타리이니 만약 호남이 없다면 곧 국가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어제 한산도에 나아가 진을 치어 바닷길을 막을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러한 난리 중에도 옛 정의를 잊지 않고 멀리서 위문편지를 보내시고 아울러 각종 물품도 받으니 모두 진중의 진귀한 물품으로 깊이 감사하여 마지않습니다. 잘 모르겠지만 어느 날에야 전쟁을 끝마치고 평소 종유(從遊)하던 회포를 실컷 풀 수 있겠습니까. 편지를 쓰려 하니 슬픈 마음만이 간절할 뿐입니다. 남은 할 말은 일이 매우 번잡하여 어지럽게 대강 적고 사례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계사년 1593년 7월 16일 척하 이순신 올림.

이순신 장군은 1593년 7월 16일 친척인 사헌부 지평(정5품)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와같은 표현을 했다. 1593년 7월 15일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긴 지 하루가 지나서였다. 부산에 진을 치고 있는 일본 수군의 남해진출을 막기 위해서 진을 전진배치한 것이다. 지난해 1592년 7월 8일 한산대첩의 전공으로 정2품의 정헌대부로 품계가 올라간 것과 곡창지대인 호남을 수호하는 길이 바로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해남 이순신 공원 '약무호남 시무국가' 석비.
해남 이순신 공원 '약무호남 시무국가' 석비.

전라남도 여수의 오동도 잔디광장에는 거북선과 판옥선 모형이 있다. 거북선과 판옥선 가운데 비석에는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이 글귀는 해남, 보성 등 이순신 장군의 수군재건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말은 호남 사람들에게 뿌듯한 자부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전시에 호남의 식량은 곧 백성과 군인(관군, 명나라 원군)의 양식이 되었으므로 경세가인 이순신 장군의 눈에 호남의 지리적 중요성이 그렇게 비쳐졌을 것이다.

독일 역사가 랑케, "모든 시대에는 신이 있다" 

서울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2019년 6월 어느날, 서울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부근 풍경.

PS: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역사 해독법과 관련해서 역사를 해석할 때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배경을 참고해서 바라보는 눈과 치우치지 않으려는 객관적인 시각의 능력이 필요할 것이다. 독일의 역사철학가 랑케는 “모든 시대에는 제각각의 신(神)이 있다”고 말했다. 이순신 장군은 한시적 정권의 호불호 대상이 아니라 우리에게 영원한 정신적 귀감이 되는국민 멘토로서 기억되기를 바란다. <8회 연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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